기억의 기억, 1986년 글을 쓰기 위해


글을 쓰기 위해 그토록 쏘다니면서 결정을 내린 것이, 대학 진학보다 발로 쓰는 게 낫겠다 싶어 햇수로 고등학교 3년을 다녔지만, 작정하고 그만 두었다.

제대 후에는 예수 귀신이 붙었다고 집에서 쫓겨났다.

영도다리 밑 봉래동 사글세 5만 원 짜리 좁고 추운 방, 어느 날 국제시장 배달 일을 마치고 혼자 저녁 밥상머리 앞에 잠깐 기도하던 중, 불과 1년 전에 하나님을 인정했을 때 보여주셨던 것을 다시 기억나게 하셨다.

그 보여주신 길을 따른다면, 내가 지금껏 5cm 이상의 그 두꺼운 얼음을 깨서 찬물에 머리를 박고, 얼음 부스러기를 털어가며 국제시장에 출근했던, 칼바람 휘몰아치는 영도다리를 걸어 다닌 이유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시기에 그렇다면 순종하리라.’결심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 ‘목사나 선교사로 소명을 받아 어디든지 가라시면 순종해야 되는데, 믿지 않는 부모님을 두고 차마 그렇게 떠나지는 못 합니다·······.’는 기도가 속에서 북받쳐 올랐다.

작정을 했다. 40일.

이 기간동안 아버지 어머니가 교회에 나올 수 있도록.

한 끼를 금식했다.

그런데 며칠 하다 ‘한 끼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 여겨 두 끼를 했다.

일하면서 두 끼를 금식하니 힘이 들기 시작했고, 10일 정도 지났을까!·······. 너무 지친 상태에서 퇴근 후 저녁을 먹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날은 두 끼를 먹게 되어버렸다.

참 한심했다.

‘믿지 않을 때도 엄마한테 고집 부린다고 4일 동안 밥은 물론이고, 물도 먹지 않으며 단식 투쟁한 적이 있는데, 어찌 아버지 어머니의 구원을 염두에 두며 결심하고 행한 일이 이리 어이없이 멈춘단 말인가!’

다시 두 끼를 금식했다.

‘40일이 안되면 나오실 때 까지.’

그 마음을 다지자 그 주 수요일에 엄마가 마을 교회에 나가셨노라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주일에는 아버지께서도.

평생 술로 인생을 마신 분이신데·······.

6.25 참전으로 팔에 상이를 입고 밀양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셨던 아버지.

장애가 있으셨지만 열심히 사셨던 나의 아버지.

후일 친어머니에 대해 듣기로는, 외할머니와 함께 교회를 다니시던 어머니가 개종을 하였고 남묘효랭게교 일연정종을 가까이 하시다가 고생하시며 돌아가셨다 한다.

팔의 장애 가운데 그나마 어머니를 의지하고 자식 커가는 기쁨으로 살았을 아버지·······.

아내를 잃고 스스로 버티기에 누구하나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했던지, 아예 알콜 중독자가 되어 수 십 년을 길바닥에 누워버리셨다

동네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했다.

“거창 댁이 양반이 교회를?·······. 그럴 리가!”

“일주일로 치면 6일 동안 술에 절어있는 사람이 어떻게?”

어째든 아버지는 술과 함께 평생 누워버린 자리를 훌훌 털고, 교회 예배에 나오셨다고 교회 분들이 말씀하셨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자, 아버지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일들이 별안간 나타났다.

어느 날 오리들이 영문도 모른 채 몰살당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오랫동안 오리를 집에서 키우면서도 병 한 번 걸리지 않았었다.

아버지는 불안해 하셨다.

예수님을 더 믿자니 갈등이 생긴 것이다.

갈등이 깊으셨든지 신기하게도 몇 달 동안 드시지 않던 술을, 다시 조금씩 가까이 하신다는 말씀을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리고 술 잡수시러 읍에 나가시다 자전거가 넘어지는 바람에 갈비뼈가 내려 않는 일이 발생했다.

작은 병원에서 어떻게 할 수 없어 마산의 큰 병원으로 이송된 터라, 소식을 듣고 급히 부산에서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아버지가 누워 계셨다.

안타깝고 답답했다.

화가 나기도 하여 “아버지 이제 하나님을 찾으셔야지, 왜 술을 찾다 이 지경이 됐습니까?”라고 울분을 토하니, 아버지께서도 속상하신지 짜증을 내시며 힘들어 하셨다.

그 사건이 있은 뒤 아버지는 “그래도 하나님 없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며, 집에 들르시는 분들에게 하나님 이야기를 하셨다.


남들은 막내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아버지, 어머니 모두 교회를 나오셨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정말 좋지 않았다.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제 마음대로 쏘다니는 녀석·······.’

아버지는 개망나니를 조금 변형시켜서 나를 ‘개망내이’ 라고 늘 부르시곤 했다.

집에서 쫓겨난 뒤, 그 개망내이가 “예수를 믿더니 아가 완전히 변했다.” 고 하시며, 다시 막내아들이 하는 일을 응원하시기 시작한 시점은 정확히 봉래동 영도다리 아래, 그 일 이후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태어나 20대 초반까지 나는 예수가 누군지 몰랐다.

교회 나가 예배 한 번 드린 적 없다.

분명한 것은 누가 믿으라고 전도한 것도 아니고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와 방황, 또 여러 책을 읽으며 그 명쾌한 답을 찾으려 고민했던 결과가 ‘나는 신(부처)이 될 수 없으며, 또 보이는 이 세상을 만들지도 않았고 만들 능력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우주의 현상계를 질서 있게 하고 유지, 통제하는 어떤 분이 있을 것이다.’ 라고 뇌가 확장되었고 그 논리의 파장은 ‘기독교의 유일신이 아니겠는가?’ 로 생각이 미쳤다.

혼자 방안에서 4인용 탁자 크기의 종이를 펼쳐두고 그 위에 잡다한 글을 써내려가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논리라면 하나님이 계신 것 같았다.

지금껏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두려웠다.

‘없으면 아무 일도 아니지만, 만일 계시면 안 되기에 교회 한 번 가서 확인해 봐야겠다.’ 라고 생각한 것이다.

때마침 동네에도 교회가 생겼다하여 거기로 갔다.

동네 한 집의 창고를 개조해 예배당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는데, 당시 전도사님이라는 분이 반갑게 맞아 주었지만 생소하고 부담스러운 만남이었다.

나는 분명히 말했다.

“예수를 믿을라꼬 교회 온기 아이고, 하나님이 있능가 확인할라꼬 한 번 왔습니더.”

한 달 내내 교회 안에는 할머니 몇 분과 꼬맹이들 몇 명·······.

답답해서 확 나가고 싶었다.

‘젊은 사람이 동네 누구 집 창고에서 뭐하는 기고!’ 누가 무어라하지 않았는데, 어색하고 얼굴이 뜨뜻해졌다.

하지만 곧 제대를 앞두고 출가를 결심했기에, 속세를 떠나기 전 다시 한 번 인생을 정리하며 가졌던 그 자리에서 확인된 부인할 수 없는 논리.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와 답을 찾기 위해 숱하게 헤매었던 그 과정에서 이르게 된, 이 비가역적인 순간과 귀결.

그 자체는 부인할 수 없었다.

‘더 있어보자.’

주일과 수요일에 교회를 나갔었는데 한 달 즈음 이었다.

전도사님의 설교를 통해 성경 말씀이 한 구절 정확히 머리에 들어 왔다.

“그런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롭게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

하나님이라는 분이 나를 받아 주신다는 말씀으로 이해되었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라는 말로 해석되었다.

그렇다면 관심이 생겼다.

그 다음 설교에 또 들린 말씀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음·······,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당시 나의 생각은 ‘이십대에 죽으나 칠팔십에 죽으나 죽기는 매 마찬가지인데 굳이 더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예수님께 관심을 가져 보기로 했다.


그런 와중에 말도 안 듣는 개망나니 자식이 이제 교회를 가지 않나, 대청마루 차려준 밥상 앞에서 이웃집 사람들이 보든지 말든지 낳고 길러준 아버지가 아닌, 신이 보이지도 않는데 정신 나간 놈처럼 고개 숙이고 기도를 하지 않나, 아버지는 밥상을 마당으로 던져 버리셨다.

어느 날인가 어머니는 뒤뜰 잡초를 다 쥐어뜯어 버리셨다.

예수 믿는 것에 두 분 다 격분하신 것이다.

제대하자마자 집에서 쫓겨났다.

“너 같은 자식은 상속도 필요 없다. 30만원 줄 테니 알아서 살든지 말든지.”


집에서 쫓겨 나갈 즈음 기도하다 꿈을 하나 꾸었는데, 그것은 칠판을 마치 십자가처럼 지고 다리를 지나는 나의 모습이었다. 

직관적으로 내가 가야할 길을 보여주신 것이라 여겨졌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한 번도 목사 될 생각을 해본 적 없었으니.

내가 살아 무언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래서 학교도 그만 두지 않았던가!

그런데 무슨, 어울리지 않게 성직자라니!

그러나 우려했던 꿈의 해석은 정확히 2004.9.23 목사 안수 받는 그 날 아침, 조용한 호숫가에서 항상 하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매일 읽는 일상적인 말씀으로 확인시켜 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제가 주님 사랑하는 것 주님께서 아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부모님으로부터 쫓겨나 부산 국제시장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더 늦기 전에  검정고시를 치러 문예창작학과로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밥상머리 앞에서 잠깐 기도하다 문득 보여주신 것이, 전에 칠판지고 가는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다시 무릎 꿇고 엄청 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 일 밖에 없는데, 어쩌라구요?’

당시의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부담스럽게도 자꾸 기억나게 하셨고, 하나님을 내가 안 믿든지, 믿으려면 순종하든지 택일해야 했다.

생각조차 일어나지 않았다면 모를까,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부담이 워낙 컸기 때문에 ‘그러면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나를 내려놓았다.

집에서 쫓아낼 정도의 미운 부모이지만,

‘믿지 않는 부모님을 두고, 어디 가라시면 저는 못갈 것 같습니다.’

금식을 작정하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리고 매일 전화 드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찾아뵈었다.

어느 날은 아버지와 한 이불 속에서 아버지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 아버지께서도 눈시울을 붉히시면서 “네가 뭐 잘못 한 게 있나? 다 내 잘못이지.” 하시었다.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시니 수 십 년 원수가 화해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 처음 계획된 40일 안에 교회에 나오셨고, 이제 막내아들은 신학교 간다고 알고 계셨다.

동네 사람들에게도 “우리 막내이는 검정고시 보고 신학교 간다.”고 늘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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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드디어 만나다.


성인이 되어서 한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내 삶의 방식에 적응이 되지 않는지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듯 하였다.

나는 이미 한 사람을 마음에 잉태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어차피 함께 할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먼저 헤어지자고 한들, 자존심 상할 일도 아니고 상처받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처럼 고상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3년을 아파했다.

어쩌면 과거에 사는 남자로 한 인생의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었던 당시의 나의 신세를,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나게 한 사건이 그 세월을 마감하게 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부터 끊임없이 질문하였던 문제에 대하여, 해답의 실마리를 얻고서이다.

역시 그런 것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80년대도 저물어 갈 즈음, 존재의 의미를 찾는 구도와 방황, 실연, 입대 그리고 제대를 앞두고 출가를 다시 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외국어 학습 경험이 없는 4세 남자 아이가 외국어 대학교 학생들과 다양한 언어 구사 대결(당시, 모 방송사의  왕 아무개 아나운서 진행)을 펼치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는 자기를 가리켜 “전생에 어느 사찰의 주지였다“고 하였으며, 행동도 기괴하였다. 

언제가 접했던 무녀들의 체험이 떠올랐다.

영적인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순간이었다.

아울러 죽음 이후에 전개될 영적인 세계에 대해 궁금증이 재발했다.

현상계에서도 가끔 발견되지만, 설명이 되지 않는 일들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비슷한 부류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터라, 한순간 시선은 끌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사람들은 신기하고 특이한 행동을 하는 그들을 ‘신’이라 부를지 몰라도, 소위 영적인 경험을 했다는 사람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신기한 영적 실체도 결국 막연할뿐더러 그마저 지속적이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단편적이나마 신기한 능력을 가진 그들조차도, 어떻게 그런 능력이 나타나는지 정작 스스로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모습이다.

많이 노력해야 겨우 일부 기능이 작동되는 부류의 신(?)이었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신은 인간에게서 찾을 수 없다.

아울러 만물 가운데서도 그 신을 찾을 수 없다.

‘인간은 영영 신을 만날 수 없단 말인가?’

‘인간은 유기된 존재인가?’

실존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애를 쓰면 쓸수록, 답답함의 무게에 눌려 버렸다.

존재의 의미를 찾는 중압감과 별개로 인생의 길이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한 정보나 대책이 전혀 없다.

하지만 사후 세계에 대한 고민과 불안을 안은 채, 자연과 사람은 온갖 문제들과 서로 뒤섞여 나름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디로 가고 있다는 그 사실은 두려운 것이다.

그 무서운 힘에 무릎을 꿇었다.

엎드리지 않으면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죽음을 향해 달리는 그 속도감에 뇌의 기능이 마비된 것이다.

나를 포함한 세계는 스스로의 힘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며, 생명의 근원이 각자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주어졌다는 결과가 도출되자, 그 위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정할 수 없는 판단, 이른바 세상을 지배하는 만물의 영장(靈長)도 태생과 본적이 이러하다.

혹 누군가 “아니야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어. 나는 전능하다.”라고 말한다면,  인류애를 발휘하여 그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형제여 정신 차리시오, 틀림없이 당신은 사람이며 인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왜 다른 부류로 인정해 달라고 하시오?”

그래도 이 말 듣기 싫어하는 자들은 우리가 아는 대로 이미 상당수 사이비 교주가 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본인은 인간이길 원하는데 다른 이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신격화 시켜, 명맥을 이어가는 집단도 상당수 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불교의 싯다르타(석가모니)의 마지막 말,

“나를 믿지 마라. 네 구원은 스스로 이루라.”

이질에 걸려 죽어가면서 한 말이다.

공자도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면서 진리를 찾다 세상을 떠났다.

이 모든 말은 인간의 한계를 드러낸, 사상하는 자들의 최후 고백임에도 불구하고 왜곡을 넘어 미화하여, “아니오.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오. 우리의 신이 되어 주시오.”

인간이 인간에게 신이 되어 달라니???

선생(先生)정도의 호칭과 존경으로 족하지 않은가?

꼭 그렇게 우상을 만들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심오한 진리도 그들이 발견한 것이지, 만든 것이 아니다.

이 우주의 거대한 질서 속에서 이 세상과 인간을 내가 만들지도 않았고, 어쩌지도 못한다는 진실을 알았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그 신을 만나기 위하여 교회를 나갔다.

내가 처음 교회를 찾아 갔을 때, 당시 전도사님께 한 말은 “나는 하나님을 믿으러 온 것이 아니고 정말 하나님이 계신지 확인하려고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교회를 한 달 정도 나가도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좁은 교회당에, 더군다나 어울리지도 않게, 노인들 사이에 젊은 청년이 거기 있다는 것이 어이없고 초라했지만, 돌 공장에서 큰 돌에 기대 책을 보며 누군가를 꼭 만나야 한다는 대전제가 젊은 날 나를 살게 했던 것처럼, 이제 그보다 명백한 귀결은 더더욱 나를 인내케 했다.

한 달이 지나갈 즈음 나를 만나주시는 분이 계셨다.

보이지 아니함에도 자신의 존재를 말씀으로 알리시는 분, 하나님이셨다.

“그런즉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이 답답한 세상을 살면서 나를 비롯한 나의 부모, 심지어 나의 스승도 나를 새롭게 못했는데, 하나님은 나의 신분을 새롭게 만들었다고 선언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에게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어서 말씀하셨는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장 20절)

확실했다.

나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과 방법, 그토록 내가 알고자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특별히 계시하신 성경과 또 설교자의 입을 통해 선포하시는 말씀으로 알려주신 것이다.

게다가 성경을 펼쳐 얼마 읽어 내려가지 않아, 세상 모든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젊은 날 그토록 궁금하여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사는 이유와 죽는 이유를 교회에 얼마 나오지 않아 성경을 읽다 그 사실을 안 것이다.

이제 삶의 목적과 방법을 알았기에 더욱 하나님을 체험하기를 원했다.

이전의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전에도 종교적 체험이 있어, 그런 식의 신비체험을 원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육체적인 고통만 안겨줄 뿐, 하나님을 알 수도 더 깊이 체험할 수도 없었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면서 여전히 내 틀에 맞추어 하나님을 이해하고 바라고 요구하였으니, 성경의 무지에서 비롯된 당연한 노릇이었다.

교회를 다닌 지 1여 년이 될 즈음 확실한 하나님을 체험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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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프로젝트 수업2


학교를 중퇴하고 집에 있으니 모든 것이 불안해져 갔다.

안 그래도 불확실한 삶 때문에 고민하는, 가을 고목의 위태한 이파리 같은 내 정체가 그나마 학생이라는 신분마저 없으니 주위의 입이 너무 나를 흔들어 떨게 했다.

‘적당한 시기에 노벨 문학상은 거저 받을 것이다.’ 라는 자기 기대 하나로 학교를 그만 두었는데, 그 선택의 결과는 생존을 위협받았고 꿈의 소년은 점점 꿈을 덜 꾸기 시작했다.

일, 이년을 버티다 생각을 바꾸었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등록금 한 번 내지 않고 다니던 중·고등학교였는데, 부모님이 협조해 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눈치껏 용돈을 모으는 중에, 마침 시집 간 누나가 친정을 다녀가면서 막내 동생에게 용돈을 준 것이 목돈이 되었다. 3만원.

야간과정에 학원 등록을 하고 학원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의 필요에 의한 선택이었지만 공부가 손에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학원 강의실 자리 채우는 것조차 답답하여, 자주 결석하면서 해운대 밤바다를 헤매고 다니기도 하였다.

어느 날은 비가 퍼붓던 한 밤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 막차에 매달려 바다로 간 적도 있었다. 함께 자던 형이 깨어 갑자기 어디 가냐고 묻는 말에 “바다가 나를 부른다.”면서 어디서 읽은 글귀로 찝찝한 여운을 남기며 문을 급히 빠져 나올 때도 있었다.

한 달이 다 지나갈 즈음 다음달 학원비가 걱정이 되었다.

매 달 등록을 해야 하는데 막막했다.

당시 학원에서는 한 달 기간이 채워질 무렵 시험을 보는데, 수강 첫 달 왜 보는지도 모르고 대충 써놓고 바다로 돌진했다. 만날 사람도 없지만 드넓은 바다가 거기 있기에.

월요일 수학 시간이었다.

학원에서도 담임선생님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 분이 문제를 풀게 해놓고 내 옆을 지나시면서 “못 보던 학생인데 이번에  2등을 했어. 다음에 더 잘해봐” 하시면서 격려를 해주셨다.

순간 얼마나 우스웠는지 모른다.

‘뭐 내가 2등이라고. 우째 이런 일이!’

그 다음날 학원 게시판에 내 이름을 발견했을 때,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2등이면 학원비 반액의 장학금이 지급된다.

장학증서를 들고 부모님께 달려가 이제 잘 할 테니 지켜봐 달라고 말씀드렸다.

출가 한답시고 학교도 집어 치울 뿐 아니라, 마음대로 돌아다니던 미운 막내아들이지만 내심 좋아하시면서 용돈까지 주셨다.

어째든 분위기는 어느 정도 가닥을 잡고 학원을 계속 다녔다.

그 후 학원을 그만 둘 때까지 미안한 마음에 시험을 치루지 않은 달 빼고는 전액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그렇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런 결과를 얻은 것은 아니었고 학교를 그만 둘 때 수준이 그 정도였다.


물론 나의 학교성적은 형편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기말고사를 앞둔 나의 관심은 시험보다는 학교 게시판에 붙은 밀양시 주최 백일장 원고 응모에 더 관심이 있었으니까.

복학 한 후 짝이었던 종식이가 지겹도록 독일어를 물어보아 자주 가르쳐 주었는데, 걔는 시험에 만점을, 나는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다. 점수를 불러주는 그 순간 종식이가 놀라워하며 어이없어하던·······.

어떤 글에도 썼지만, 학교를 그만 두기 한 달 전 여름 방학하는 날의 운동장에서 받아든 나의 성적표는 “양”, “가”, “양”, “미”, “양” 이었는데 오히려 수상자의 호명에 내 이름이 들어 있었다.

글짓기에 응모한 것이 입상한 것이었다. 상장과 트로피, 부상으로 선풍기를 받았다.

자취방에 돌아와 있는데 그것을 보신 주인아주머니께서 “이게 왠거냐?”며 아버지께서 좋아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함께 기뻐해주셨다.

그러나 아주머니께서 그 말씀을 하기 전까지 나는 수상소식을 부모님께 알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전에 비록 별 것은 아니지만, 경향신문에 논술을 응모해서 입선이 되어 내 이름 석자와  고등학교 이름이 나온 신문을 보여 주어도 “니까짓 것이 무슨 신문에 나오냐?”며 쳐다보는 둥 마는 둥 하셨던 분들이셨기에, 자존심 상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는 부모님과의 관계가 너무 험악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 한 요소로 작용한 것이 휴학이었다.

정신적으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던 그 당시 나는 휴학할 것을 원했는데, 부모님과 선생님 모두 반대하였다.

그러나 나의 배수진에 부모님과 선생님 모두 어쩔 줄 몰라 하시면서도 휴학하는 문제만 싫어 하셨다.

결국 내 생각대로 되었지만, 집에 있는 동안 주위의 시선과 입방아로 압박감만 더 늘어났다.

결국 바깥으로 돌아다니다 어머니의 제안으로 새로 방을 하나 구하고, 거기서 다시 생활이 시작 되었다.

새 학기에 복학을 하여 시험을 치루고 그 해 여름방학을 맞이할 때, 이미 나의 장래는 작가가 되기로 굳게 결심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주머니의 말 때문인지 다시금 칭찬 한 조각 주우려 상장과 트로피, 선풍기를 큰 가방에 쑤셔 넣고 차에 올랐다.

집에 들어서자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있었고, 어머니는 옆에서 아버지의 술주정을 들으시느라 힘들어 하셨다.

이런 현실이 나를 순간적으로 폭발하게 했다.

트로피를 마당으로 내동댕이쳤는데, 돌아가신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때기발’ 을 친 것이다.

그리고 수년 동안 틈틈이 썼던 습작원고, 일기장, 독일의 Angela와 나누었던 편지들, 사진.......

그 당시 보물처럼 간직하고 소중히 여겼던, 나의 흔적들을 격렬한 분노의 화염 속에 쑤셔 넣고 뒷마당에 묻었다.

울면서 울면서


그날 이후 나의 인생을 내가 살기로 했다.

청소년기까지 절대적인 끈으로 엉긴 부모님의 뜻과 간섭에 자유하기로 했던 것이다.

나이 18세에 탯줄을 끊었다.

짧은 기간동안 돌 공장에서 일하는 시기가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점심밥을 먹은 후 자투리 시간에 야산에서 퍼온 큰 돌에 등을 기댄 채 데미안을 읽으며, 무엇인가를 만나기 원했다.

그 때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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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나에 대하여

 

하나님의 프로젝트 수업1 ‘죽음’(전봇대에 기댄 사람들)

 

내 나이 열 살이었을 때 어머니가 돌아 가셨다.

장사지내는 동안에 내가 생각했던 것은 어머니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슬픔과 아픔이 아니라, 평소에 먹고 싶어도 잘 먹을 수 없었던 고춧가루가 많이 섞인 김치가 너무 달다는 것이었다.

그 즈음부터 나의 생활의 주제는 모순 된 자아에 대한 관심과 죽음을 알기 위한 본능적인 지식추구였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아버지는 너는 돈이 안 되니 가까운 학교나 가라고 말씀하셨지만, 밀양 시내 쪽으로 방향을 정한 것도 어머니 무덤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죽음 저 편에 대한 관심과 삶의 이유를 찾는 젊은 날의 반사적 행동이었다.

그러나 꿈에 취한 생활 가운데, 나는 얼마나 난감해하고 분노와 절망을 했는지 모른다.

오로지 명문대학 진학이 목적인 학교 분위기.

어떻게 전인교육이라는 구호 아래서, 막연히 인생의 성공이란 목표를 내세우며 덜 자란 아이에게 지식 나부랭이를 강요할 수 있는지·······.

아직도 자라고 있기에 내게 있어 학교는 족쇄로서 기능만 다할 뿐이었다.

이 때에 내가 만난 사람이 까뮈와 쇼펜하우어였고 그들이 나를 용기 있게 했다.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을 매일 읽고 묵상했다. 하루에도 글을 읽지 않고는 속이 허했다.

그리고 하루에 한 줄의 글도 읽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증오했다. 혼자 사는 인생이 아니기에 서로가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와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이후 내가 내린 결정은 출가하는 것이었다.

미룰 것도 없었다. 많이도 돌아 다녔다.

나중에 알게 되었던 사실은 그 시기에 한창 신비주의 관련 책을 많이 접했다는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 명상, 마인드 콘트롤, 단,·······.

그런데 어느 날 심경의 변화로 모두 중고서점에 팔아버렸다.

싯다르타의 삶과 나의 인생 걸음은 닮은 점이 많다.

공통점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 가셨다는 것과 그 일로 인해 삶과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며, 차이점은 그가 보리수나무 아래서 수행했다면, 나는 돌아다니며 현대감각에 맞게 전봇대 아래서 참선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수행의 이유로 5년 동안 목욕하지 않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이 모 작가 같은 사람이 그 길을 걸었지만 동경은 할지언정 그 짓은 못했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 아니 그 당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다.

몸서리를 쳤다. 왜 사는가? 인간은 왜 사는가? 인간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과연 살 이유가 있는가? 웃기는 인간들. 왜 사는지도 모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가슴 벅찬 이유도 없이 멍하니 살아가고 살아야 하는 한심한 사람들.

그 무리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나를 미치도록 분노케 했다.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숨 막히는 이성이 나의 가슴을 뛰게 했다.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3년이나 다녔지만 더 다닐 이유가 없었기에.

당시 담임선생님은 사모님과 함께 “그래도 졸업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하시며, 먼 거리에서 달려와 어떻게든 설득하려 매달리셨지만, 오히려 나는 단호했다.

자퇴서류를 교무실에 제출하고 학교 운동장을 걸어 나올 때, 의도적으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시는 이런 식의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다. 지적 장애아가 험난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특수학교에서 훈련하는 구슬 꿰기처럼 매일 반복되는 획일적인 생활·······, 기계처럼 돌아가는 인간초침·······.'

분명히 내가 선택했지만,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돌아설 수 있었다.

공부가 목적이었다면 처음부터 입시 학원에 갔지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의 심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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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존재 증명

 

몇 십 명이 모여 ‘신은 없다’라고 떠들어 봐야, 한 사람이라도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면 다툼은 그친다.

오늘날 생존하는 수억의 사람들이 예수께서 인류의 구원자(메시아)임을 믿고 전파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에게 신을 증명하거나 설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를 통해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전할 뿐이다.

아무도 신을 증명할 수 없다.

인간이 신을 증명하면 신이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이 신을 증명하지 못하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말인가!

누구라도 자신의 생각과 족적을 감추면 알 수 없듯이, 신은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여 증명할 뿐이다.

신 스스로 자기를 특별히 계시한 성경과 2천년 전에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신은 이미 자신의 존재를 전 인류에게 증명하였다.

단지 그 계시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사람이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못했을 뿐이다.

또 그 사건과 계시가 자신에게 유의미하지 않는 것은 신과 인격적인 만남이 없음을 반증한다.

그 당시 상당수 목격자들은 누구에게나 하나 뿐인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것을 증언하였고, 그들뿐만 아니라 수 천 년의 세대, 인종, 문화, 철학, 연령, 가치 등의 벽을 넘어 엄청난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다.

신에 대해 믿을 만한 구체적인 증거도 갖지 않은 채, 신을 받아들이거나 전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 구체적인 증거란 특별계시인 성경과 내 의지와 상관없이 결국 믿어지는 감동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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