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기억, 1986년 글을 쓰기 위해
글을 쓰기 위해 그토록 쏘다니면서 결정을 내린 것이, 대학 진학보다 발로 쓰는 게 낫겠다 싶어 햇수로 고등학교 3년을 다녔지만, 작정하고 그만 두었다.
제대 후에는 예수 귀신이 붙었다고 집에서 쫓겨났다.
영도다리 밑 봉래동 사글세 5만 원 짜리 좁고 추운 방, 어느 날 국제시장 배달 일을 마치고 혼자 저녁 밥상머리 앞에 잠깐 기도하던 중, 불과 1년 전에 하나님을 인정했을 때 보여주셨던 것을 다시 기억나게 하셨다.
그 보여주신 길을 따른다면, 내가 지금껏 5cm 이상의 그 두꺼운 얼음을 깨서 찬물에 머리를 박고, 얼음 부스러기를 털어가며 국제시장에 출근했던, 칼바람 휘몰아치는 영도다리를 걸어 다닌 이유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시기에 그렇다면 순종하리라.’결심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 ‘목사나 선교사로 소명을 받아 어디든지 가라시면 순종해야 되는데, 믿지 않는 부모님을 두고 차마 그렇게 떠나지는 못 합니다·······.’는 기도가 속에서 북받쳐 올랐다.
작정을 했다. 40일.
이 기간동안 아버지 어머니가 교회에 나올 수 있도록.
한 끼를 금식했다.
그런데 며칠 하다 ‘한 끼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 여겨 두 끼를 했다.
일하면서 두 끼를 금식하니 힘이 들기 시작했고, 10일 정도 지났을까!·······. 너무 지친 상태에서 퇴근 후 저녁을 먹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날은 두 끼를 먹게 되어버렸다.
참 한심했다.
‘믿지 않을 때도 엄마한테 고집 부린다고 4일 동안 밥은 물론이고, 물도 먹지 않으며 단식 투쟁한 적이 있는데, 어찌 아버지 어머니의 구원을 염두에 두며 결심하고 행한 일이 이리 어이없이 멈춘단 말인가!’
다시 두 끼를 금식했다.
‘40일이 안되면 나오실 때 까지.’
그 마음을 다지자 그 주 수요일에 엄마가 마을 교회에 나가셨노라고 연락이 왔다.
그리고 주일에는 아버지께서도.
평생 술로 인생을 마신 분이신데·······.
6.25 참전으로 팔에 상이를 입고 밀양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셨던 아버지.
장애가 있으셨지만 열심히 사셨던 나의 아버지.
후일 친어머니에 대해 듣기로는, 외할머니와 함께 교회를 다니시던 어머니가 개종을 하였고 남묘효랭게교 일연정종을 가까이 하시다가 고생하시며 돌아가셨다 한다.
팔의 장애 가운데 그나마 어머니를 의지하고 자식 커가는 기쁨으로 살았을 아버지·······.
아내를 잃고 스스로 버티기에 누구하나 진정한 위로가 되지 못했던지, 아예 알콜 중독자가 되어 수 십 년을 길바닥에 누워버리셨다
동네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했다.
“거창 댁이 양반이 교회를?·······. 그럴 리가!”
“일주일로 치면 6일 동안 술에 절어있는 사람이 어떻게?”
어째든 아버지는 술과 함께 평생 누워버린 자리를 훌훌 털고, 교회 예배에 나오셨다고 교회 분들이 말씀하셨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자, 아버지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일들이 별안간 나타났다.
어느 날 오리들이 영문도 모른 채 몰살당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오랫동안 오리를 집에서 키우면서도 병 한 번 걸리지 않았었다.
아버지는 불안해 하셨다.
예수님을 더 믿자니 갈등이 생긴 것이다.
갈등이 깊으셨든지 신기하게도 몇 달 동안 드시지 않던 술을, 다시 조금씩 가까이 하신다는 말씀을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리고 술 잡수시러 읍에 나가시다 자전거가 넘어지는 바람에 갈비뼈가 내려 않는 일이 발생했다.
작은 병원에서 어떻게 할 수 없어 마산의 큰 병원으로 이송된 터라, 소식을 듣고 급히 부산에서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아버지가 누워 계셨다.
안타깝고 답답했다.
화가 나기도 하여 “아버지 이제 하나님을 찾으셔야지, 왜 술을 찾다 이 지경이 됐습니까?”라고 울분을 토하니, 아버지께서도 속상하신지 짜증을 내시며 힘들어 하셨다.
그 사건이 있은 뒤 아버지는 “그래도 하나님 없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며, 집에 들르시는 분들에게 하나님 이야기를 하셨다.
남들은 막내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아버지, 어머니 모두 교회를 나오셨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정말 좋지 않았다.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제 마음대로 쏘다니는 녀석·······.’
아버지는 개망나니를 조금 변형시켜서 나를 ‘개망내이’ 라고 늘 부르시곤 했다.
집에서 쫓겨난 뒤, 그 개망내이가 “예수를 믿더니 아가 완전히 변했다.” 고 하시며, 다시 막내아들이 하는 일을 응원하시기 시작한 시점은 정확히 봉래동 영도다리 아래, 그 일 이후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태어나 20대 초반까지 나는 예수가 누군지 몰랐다.
교회 나가 예배 한 번 드린 적 없다.
분명한 것은 누가 믿으라고 전도한 것도 아니고 삶과 죽음에 대한 고뇌와 방황, 또 여러 책을 읽으며 그 명쾌한 답을 찾으려 고민했던 결과가 ‘나는 신(부처)이 될 수 없으며, 또 보이는 이 세상을 만들지도 않았고 만들 능력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우주의 현상계를 질서 있게 하고 유지, 통제하는 어떤 분이 있을 것이다.’ 라고 뇌가 확장되었고 그 논리의 파장은 ‘기독교의 유일신이 아니겠는가?’ 로 생각이 미쳤다.
혼자 방안에서 4인용 탁자 크기의 종이를 펼쳐두고 그 위에 잡다한 글을 써내려가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논리라면 하나님이 계신 것 같았다.
지금껏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두려웠다.
‘없으면 아무 일도 아니지만, 만일 계시면 안 되기에 교회 한 번 가서 확인해 봐야겠다.’ 라고 생각한 것이다.
때마침 동네에도 교회가 생겼다하여 거기로 갔다.
동네 한 집의 창고를 개조해 예배당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는데, 당시 전도사님이라는 분이 반갑게 맞아 주었지만 생소하고 부담스러운 만남이었다.
나는 분명히 말했다.
“예수를 믿을라꼬 교회 온기 아이고, 하나님이 있능가 확인할라꼬 한 번 왔습니더.”
한 달 내내 교회 안에는 할머니 몇 분과 꼬맹이들 몇 명·······.
답답해서 확 나가고 싶었다.
‘젊은 사람이 동네 누구 집 창고에서 뭐하는 기고!’ 누가 무어라하지 않았는데, 어색하고 얼굴이 뜨뜻해졌다.
하지만 곧 제대를 앞두고 출가를 결심했기에, 속세를 떠나기 전 다시 한 번 인생을 정리하며 가졌던 그 자리에서 확인된 부인할 수 없는 논리.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와 답을 찾기 위해 숱하게 헤매었던 그 과정에서 이르게 된, 이 비가역적인 순간과 귀결.
그 자체는 부인할 수 없었다.
‘더 있어보자.’
주일과 수요일에 교회를 나갔었는데 한 달 즈음 이었다.
전도사님의 설교를 통해 성경 말씀이 한 구절 정확히 머리에 들어 왔다.
“그런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롭게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말씀.
하나님이라는 분이 나를 받아 주신다는 말씀으로 이해되었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라는 말로 해석되었다.
그렇다면 관심이 생겼다.
그 다음 설교에 또 들린 말씀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음·······,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그 당시 나의 생각은 ‘이십대에 죽으나 칠팔십에 죽으나 죽기는 매 마찬가지인데 굳이 더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예수님께 관심을 가져 보기로 했다.
그런 와중에 말도 안 듣는 개망나니 자식이 이제 교회를 가지 않나, 대청마루 차려준 밥상 앞에서 이웃집 사람들이 보든지 말든지 낳고 길러준 아버지가 아닌, 신이 보이지도 않는데 정신 나간 놈처럼 고개 숙이고 기도를 하지 않나, 아버지는 밥상을 마당으로 던져 버리셨다.
어느 날인가 어머니는 뒤뜰 잡초를 다 쥐어뜯어 버리셨다.
예수 믿는 것에 두 분 다 격분하신 것이다.
제대하자마자 집에서 쫓겨났다.
“너 같은 자식은 상속도 필요 없다. 30만원 줄 테니 알아서 살든지 말든지.”
집에서 쫓겨 나갈 즈음 기도하다 꿈을 하나 꾸었는데, 그것은 칠판을 마치 십자가처럼 지고 다리를 지나는 나의 모습이었다.
직관적으로 내가 가야할 길을 보여주신 것이라 여겨졌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한 번도 목사 될 생각을 해본 적 없었으니.
내가 살아 무언가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래서 학교도 그만 두지 않았던가!
그런데 무슨, 어울리지 않게 성직자라니!
그러나 우려했던 꿈의 해석은 정확히 2004.9.23 목사 안수 받는 그 날 아침, 조용한 호숫가에서 항상 하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매일 읽는 일상적인 말씀으로 확인시켜 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제가 주님 사랑하는 것 주님께서 아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부모님으로부터 쫓겨나 부산 국제시장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더 늦기 전에 검정고시를 치러 문예창작학과로 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밥상머리 앞에서 잠깐 기도하다 문득 보여주신 것이, 전에 칠판지고 가는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다시 무릎 꿇고 엄청 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 일 밖에 없는데, 어쩌라구요?’
당시의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부담스럽게도 자꾸 기억나게 하셨고, 하나님을 내가 안 믿든지, 믿으려면 순종하든지 택일해야 했다.
생각조차 일어나지 않았다면 모를까,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부담이 워낙 컸기 때문에 ‘그러면 순종하겠습니다.’ 라고 나를 내려놓았다.
집에서 쫓아낼 정도의 미운 부모이지만,
‘믿지 않는 부모님을 두고, 어디 가라시면 저는 못갈 것 같습니다.’
금식을 작정하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리고 매일 전화 드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찾아뵈었다.
어느 날은 아버지와 한 이불 속에서 아버지께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 아버지께서도 눈시울을 붉히시면서 “네가 뭐 잘못 한 게 있나? 다 내 잘못이지.” 하시었다.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시니 수 십 년 원수가 화해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 처음 계획된 40일 안에 교회에 나오셨고, 이제 막내아들은 신학교 간다고 알고 계셨다.
동네 사람들에게도 “우리 막내이는 검정고시 보고 신학교 간다.”고 늘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