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드디어 만나다.


성인이 되어서 한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내 삶의 방식에 적응이 되지 않는지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듯 하였다.

나는 이미 한 사람을 마음에 잉태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어차피 함께 할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먼저 헤어지자고 한들, 자존심 상할 일도 아니고 상처받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처럼 고상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3년을 아파했다.

어쩌면 과거에 사는 남자로 한 인생의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었던 당시의 나의 신세를,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나게 한 사건이 그 세월을 마감하게 했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부터 끊임없이 질문하였던 문제에 대하여, 해답의 실마리를 얻고서이다.

역시 그런 것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80년대도 저물어 갈 즈음, 존재의 의미를 찾는 구도와 방황, 실연, 입대 그리고 제대를 앞두고 출가를 다시 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외국어 학습 경험이 없는 4세 남자 아이가 외국어 대학교 학생들과 다양한 언어 구사 대결(당시, 모 방송사의  왕 아무개 아나운서 진행)을 펼치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는 자기를 가리켜 “전생에 어느 사찰의 주지였다“고 하였으며, 행동도 기괴하였다. 

언제가 접했던 무녀들의 체험이 떠올랐다.

영적인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순간이었다.

아울러 죽음 이후에 전개될 영적인 세계에 대해 궁금증이 재발했다.

현상계에서도 가끔 발견되지만, 설명이 되지 않는 일들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비슷한 부류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터라, 한순간 시선은 끌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사람들은 신기하고 특이한 행동을 하는 그들을 ‘신’이라 부를지 몰라도, 소위 영적인 경험을 했다는 사람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신기한 영적 실체도 결국 막연할뿐더러 그마저 지속적이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단편적이나마 신기한 능력을 가진 그들조차도, 어떻게 그런 능력이 나타나는지 정작 스스로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모습이다.

많이 노력해야 겨우 일부 기능이 작동되는 부류의 신(?)이었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신은 인간에게서 찾을 수 없다.

아울러 만물 가운데서도 그 신을 찾을 수 없다.

‘인간은 영영 신을 만날 수 없단 말인가?’

‘인간은 유기된 존재인가?’

실존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애를 쓰면 쓸수록, 답답함의 무게에 눌려 버렸다.

존재의 의미를 찾는 중압감과 별개로 인생의 길이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한 정보나 대책이 전혀 없다.

하지만 사후 세계에 대한 고민과 불안을 안은 채, 자연과 사람은 온갖 문제들과 서로 뒤섞여 나름 질서와 조화를 이루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디로 가고 있다는 그 사실은 두려운 것이다.

그 무서운 힘에 무릎을 꿇었다.

엎드리지 않으면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죽음을 향해 달리는 그 속도감에 뇌의 기능이 마비된 것이다.

나를 포함한 세계는 스스로의 힘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며, 생명의 근원이 각자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주어졌다는 결과가 도출되자, 그 위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정할 수 없는 판단, 이른바 세상을 지배하는 만물의 영장(靈長)도 태생과 본적이 이러하다.

혹 누군가 “아니야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어. 나는 전능하다.”라고 말한다면,  인류애를 발휘하여 그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형제여 정신 차리시오, 틀림없이 당신은 사람이며 인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왜 다른 부류로 인정해 달라고 하시오?”

그래도 이 말 듣기 싫어하는 자들은 우리가 아는 대로 이미 상당수 사이비 교주가 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본인은 인간이길 원하는데 다른 이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신격화 시켜, 명맥을 이어가는 집단도 상당수 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불교의 싯다르타(석가모니)의 마지막 말,

“나를 믿지 마라. 네 구원은 스스로 이루라.”

이질에 걸려 죽어가면서 한 말이다.

공자도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면서 진리를 찾다 세상을 떠났다.

이 모든 말은 인간의 한계를 드러낸, 사상하는 자들의 최후 고백임에도 불구하고 왜곡을 넘어 미화하여, “아니오.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오. 우리의 신이 되어 주시오.”

인간이 인간에게 신이 되어 달라니???

선생(先生)정도의 호칭과 존경으로 족하지 않은가?

꼭 그렇게 우상을 만들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심오한 진리도 그들이 발견한 것이지, 만든 것이 아니다.

이 우주의 거대한 질서 속에서 이 세상과 인간을 내가 만들지도 않았고, 어쩌지도 못한다는 진실을 알았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그 신을 만나기 위하여 교회를 나갔다.

내가 처음 교회를 찾아 갔을 때, 당시 전도사님께 한 말은 “나는 하나님을 믿으러 온 것이 아니고 정말 하나님이 계신지 확인하려고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교회를 한 달 정도 나가도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좁은 교회당에, 더군다나 어울리지도 않게, 노인들 사이에 젊은 청년이 거기 있다는 것이 어이없고 초라했지만, 돌 공장에서 큰 돌에 기대 책을 보며 누군가를 꼭 만나야 한다는 대전제가 젊은 날 나를 살게 했던 것처럼, 이제 그보다 명백한 귀결은 더더욱 나를 인내케 했다.

한 달이 지나갈 즈음 나를 만나주시는 분이 계셨다.

보이지 아니함에도 자신의 존재를 말씀으로 알리시는 분, 하나님이셨다.

“그런즉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이 답답한 세상을 살면서 나를 비롯한 나의 부모, 심지어 나의 스승도 나를 새롭게 못했는데, 하나님은 나의 신분을 새롭게 만들었다고 선언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에게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어서 말씀하셨는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장 20절)

확실했다.

나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과 방법, 그토록 내가 알고자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특별히 계시하신 성경과 또 설교자의 입을 통해 선포하시는 말씀으로 알려주신 것이다.

게다가 성경을 펼쳐 얼마 읽어 내려가지 않아, 세상 모든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젊은 날 그토록 궁금하여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사는 이유와 죽는 이유를 교회에 얼마 나오지 않아 성경을 읽다 그 사실을 안 것이다.

이제 삶의 목적과 방법을 알았기에 더욱 하나님을 체험하기를 원했다.

이전의 하나님을 받아들이기 전에도 종교적 체험이 있어, 그런 식의 신비체험을 원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육체적인 고통만 안겨줄 뿐, 하나님을 알 수도 더 깊이 체험할 수도 없었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면서 여전히 내 틀에 맞추어 하나님을 이해하고 바라고 요구하였으니, 성경의 무지에서 비롯된 당연한 노릇이었다.

교회를 다닌 지 1여 년이 될 즈음 확실한 하나님을 체험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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