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프로젝트 수업2
학교를 중퇴하고 집에 있으니 모든 것이 불안해져 갔다.
안 그래도 불확실한 삶 때문에 고민하는, 가을 고목의 위태한 이파리 같은 내 정체가 그나마 학생이라는 신분마저 없으니 주위의 입이 너무 나를 흔들어 떨게 했다.
‘적당한 시기에 노벨 문학상은 거저 받을 것이다.’ 라는 자기 기대 하나로 학교를 그만 두었는데, 그 선택의 결과는 생존을 위협받았고 꿈의 소년은 점점 꿈을 덜 꾸기 시작했다.
일, 이년을 버티다 생각을 바꾸었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등록금 한 번 내지 않고 다니던 중·고등학교였는데, 부모님이 협조해 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눈치껏 용돈을 모으는 중에, 마침 시집 간 누나가 친정을 다녀가면서 막내 동생에게 용돈을 준 것이 목돈이 되었다. 3만원.
야간과정에 학원 등록을 하고 학원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의 필요에 의한 선택이었지만 공부가 손에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학원 강의실 자리 채우는 것조차 답답하여, 자주 결석하면서 해운대 밤바다를 헤매고 다니기도 하였다.
어느 날은 비가 퍼붓던 한 밤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 막차에 매달려 바다로 간 적도 있었다. 함께 자던 형이 깨어 갑자기 어디 가냐고 묻는 말에 “바다가 나를 부른다.”면서 어디서 읽은 글귀로 찝찝한 여운을 남기며 문을 급히 빠져 나올 때도 있었다.
한 달이 다 지나갈 즈음 다음달 학원비가 걱정이 되었다.
매 달 등록을 해야 하는데 막막했다.
당시 학원에서는 한 달 기간이 채워질 무렵 시험을 보는데, 수강 첫 달 왜 보는지도 모르고 대충 써놓고 바다로 돌진했다. 만날 사람도 없지만 드넓은 바다가 거기 있기에.
월요일 수학 시간이었다.
학원에서도 담임선생님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 분이 문제를 풀게 해놓고 내 옆을 지나시면서 “못 보던 학생인데 이번에 2등을 했어. 다음에 더 잘해봐” 하시면서 격려를 해주셨다.
순간 얼마나 우스웠는지 모른다.
‘뭐 내가 2등이라고. 우째 이런 일이!’
그 다음날 학원 게시판에 내 이름을 발견했을 때,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2등이면 학원비 반액의 장학금이 지급된다.
장학증서를 들고 부모님께 달려가 이제 잘 할 테니 지켜봐 달라고 말씀드렸다.
출가 한답시고 학교도 집어 치울 뿐 아니라, 마음대로 돌아다니던 미운 막내아들이지만 내심 좋아하시면서 용돈까지 주셨다.
어째든 분위기는 어느 정도 가닥을 잡고 학원을 계속 다녔다.
그 후 학원을 그만 둘 때까지 미안한 마음에 시험을 치루지 않은 달 빼고는 전액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그렇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런 결과를 얻은 것은 아니었고 학교를 그만 둘 때 수준이 그 정도였다.
물론 나의 학교성적은 형편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기말고사를 앞둔 나의 관심은 시험보다는 학교 게시판에 붙은 밀양시 주최 백일장 원고 응모에 더 관심이 있었으니까.
복학 한 후 짝이었던 종식이가 지겹도록 독일어를 물어보아 자주 가르쳐 주었는데, 걔는 시험에 만점을, 나는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다. 점수를 불러주는 그 순간 종식이가 놀라워하며 어이없어하던·······.
어떤 글에도 썼지만, 학교를 그만 두기 한 달 전 여름 방학하는 날의 운동장에서 받아든 나의 성적표는 “양”, “가”, “양”, “미”, “양” 이었는데 오히려 수상자의 호명에 내 이름이 들어 있었다.
글짓기에 응모한 것이 입상한 것이었다. 상장과 트로피, 부상으로 선풍기를 받았다.
자취방에 돌아와 있는데 그것을 보신 주인아주머니께서 “이게 왠거냐?”며 아버지께서 좋아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함께 기뻐해주셨다.
그러나 아주머니께서 그 말씀을 하기 전까지 나는 수상소식을 부모님께 알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전에 비록 별 것은 아니지만, 경향신문에 논술을 응모해서 입선이 되어 내 이름 석자와 고등학교 이름이 나온 신문을 보여 주어도 “니까짓 것이 무슨 신문에 나오냐?”며 쳐다보는 둥 마는 둥 하셨던 분들이셨기에, 자존심 상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는 부모님과의 관계가 너무 험악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 한 요소로 작용한 것이 휴학이었다.
정신적으로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던 그 당시 나는 휴학할 것을 원했는데, 부모님과 선생님 모두 반대하였다.
그러나 나의 배수진에 부모님과 선생님 모두 어쩔 줄 몰라 하시면서도 휴학하는 문제만 싫어 하셨다.
결국 내 생각대로 되었지만, 집에 있는 동안 주위의 시선과 입방아로 압박감만 더 늘어났다.
결국 바깥으로 돌아다니다 어머니의 제안으로 새로 방을 하나 구하고, 거기서 다시 생활이 시작 되었다.
새 학기에 복학을 하여 시험을 치루고 그 해 여름방학을 맞이할 때, 이미 나의 장래는 작가가 되기로 굳게 결심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주머니의 말 때문인지 다시금 칭찬 한 조각 주우려 상장과 트로피, 선풍기를 큰 가방에 쑤셔 넣고 차에 올랐다.
집에 들어서자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있었고, 어머니는 옆에서 아버지의 술주정을 들으시느라 힘들어 하셨다.
이런 현실이 나를 순간적으로 폭발하게 했다.
트로피를 마당으로 내동댕이쳤는데, 돌아가신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때기발’ 을 친 것이다.
그리고 수년 동안 틈틈이 썼던 습작원고, 일기장, 독일의 Angela와 나누었던 편지들, 사진.......
그 당시 보물처럼 간직하고 소중히 여겼던, 나의 흔적들을 격렬한 분노의 화염 속에 쑤셔 넣고 뒷마당에 묻었다.
울면서 울면서
그날 이후 나의 인생을 내가 살기로 했다.
청소년기까지 절대적인 끈으로 엉긴 부모님의 뜻과 간섭에 자유하기로 했던 것이다.
나이 18세에 탯줄을 끊었다.
짧은 기간동안 돌 공장에서 일하는 시기가 있었는데, 어느 날인가 점심밥을 먹은 후 자투리 시간에 야산에서 퍼온 큰 돌에 등을 기댄 채 데미안을 읽으며, 무엇인가를 만나기 원했다.
그 때의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