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영 씨, 산티아고에는 왜 가셨어요? - 진짜 가수 박기영의 진짜 여행
박기영 지음 / 북노마드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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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방 안에 앉아서 조그맣고 네모난 상자를 통해 온 세상을 다 돌아다닐 수 있다. 오죽하면 며칠 전 우연히 여행 관련 모 프로그램을 가족과 함께 보면서 "어머, 저 PD는 세상 안 가본 곳이 없겠다~아(질질 끌면서)" 가족 모두 똘똘한 목소리로 내심 부러움 가득 담아 맞장구를 쳤던 적이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굳이 고된 여행을 하려고 하는 걸까. 그것도 순례 여행을. 마침 나도 궁금하던 차였다. 
 


"박기영 씨, 산티아고에는 왜 가셨어요? 왜 가셨냐구요."


밝고 아담한 이 책의 제목이 <박기영 씨, 산티아고에는 왜 가셨어요?>이다. 내가 알고 있는 박기영이라는 사람은 어렴풋이 '블루 스카이'라는 노래를 시원스럽게 불렀던 가수로 기억한다. 시청자가 보기에 불황이 없는 연예계에 쏟아지는 가수들로 가물가물 잊을 만도 한 가수... 까마귀 고기 구워먹은 요즘 가수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리고 산티아고 역시 특별하지만 여느 여행지와 다를 바 없이 평범한 공간으로 잊을 뻔한 시점이었다. 책 내용에서 자주 마주치는 책, 길, 여행, 걷기, 음악, 사람 이야기 중에 하페 케르켈링[Hape Kerkeling, 독일 인기 코미디언]이 있기에 작년에 읽었던 책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를 기억해낸 것이다. 두 책의 공통점은 외면에 치우칠 수밖에 없는 인기스타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혹독한 순례 여행을 과감하게 실행으로 옮긴 것을 글로 담은 생생한 체험담이자 자기고백서라는 점이다. 


사실 프롤로그에서 이런 글 - "나는 가수가 되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저 음악이 좋아, 노래가 좋아 물 흐르듯 살다보니 어느 날 가수가 되어 있었다."(19쪽) - 을 보지 않았더라도 몇십 년 무명 설움을 겪은 연예인도 아니고 크고 작은 사건으로 도마 위에 오른 심경 복잡한 연예인도 아닌 것으로 알고 있어서 처음 몇 장을 넘겼을 땐 가벼운 여행서를 읽는 기분이었다. 느긋하게 산티아고 가는 길의 풍경 사진도 보고 발걸음도 가볍게 어쩐지 술술 읽히는 구불구불한 글자의 미로를 따라가다 보니까 저자가 걸었던 33일간의 발자취를 한자리에서 뚝딱 읽어버리고 말았다. 


소설가 신경숙 님의 추천 글에서 "남이 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쭐하지 않고, 그저 솔직하게 담백하게 있는 그대로 썼기 때문(281쪽)"이라고 하지만 확실히 걷기 여행이 주는 묘미와 깊이는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누구가 책제목을 들이대며 박기영 씨가 도대체 산티아고에 왜 갔는지 나에게 묻는다면 그저 책을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내가 순례 여행을 한참 가볍게 본 듯 한자리에서 뚝딱 읽어버리고 말았다고 했지만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서 이야기한 '자아의 신화'를 좇아 살고자 하는 사람의 여정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이라면 자신이 품고 있는 두려움이 가장 큰 줄로만 알고 있는 착각과 오만이 수그러들고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한 배를 탄 동료임을 자각하며 저자의 완소 여행에 기꺼운 마음으로 동참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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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r 2008-06-28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도 읽고 가요.. ^^

거리에서 2008-06-28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이신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합니다. ^^
 
무삭제 심리학 - 반복되는 인생의 NG 장면, 그 비밀을 파헤치다
이남석 지음 / 예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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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는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 속수무책인가?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진짜 그럴 듯한 점쟁이를 찾아가서 미래를 점쳐보겠지만 그저 적당히 재미까지 맛보고 싶은 청춘 남녀들은 타로점이나 별자리점, 혈액형점, 띠점... 별거 다 본다. 이런 것들은 말 그대로 정확성보다 적당히 내 상황에 맞는 '것 같고' 더불어 재미까지 있다면 그만이다. 그래서 그런지 앞에 나열한 점을 보고 특별히 내가 주의해야 할 점이라든지 그런 것들을 일부러 뽑아내서 실천항목으로 삼으려는 엉뚱한 짓까지는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하여 미래의 불확실성을 조금이라도 더 덜고 싶은 마음이 발동하는 욕심쟁이들은 한 발 더 나아간다. 바로 '심리학'이다.


심리학은 좌충우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 심리를 비교적 정확하게 알아내는 과학적인 학문이라고 알고 있다. 자칭 괴짜에 가까운 저자 이남석(37) 님은 욕심쟁이들의 욕구를 한층 더 부추긴다. 책제목이 <무삭제 심리학>이다. 사람으로 치면 '가면을 벗기고' '화장을 지우고'쯤이 될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쌩얼을 궁금해 하면서도 막상 쌩얼로 다니면 눈초리 한 방 날리는데 이건 다행스럽게도 책이다. 이 책을 당당한 심리서, 거침없이 달리는 심리서이라고 해도 크게 과장은 아닐 성싶다.



심리학은 인생을 바꿀 수 있는 한방으로 단박에 성공을 선물해 주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세상의 가장 큰 비밀인 '마음의 비밀'에 대해서 알려주기 때문에, 인생의 크고 작은 NG를 줄여주며 자신이 만족하는 삶에 가깝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프롤로그 중에서

목차를 훑어보면 이 책의 특징을 전반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우리가 평소에 당연하다는 듯이 알고 있는 것들을 뒤집어보는 총 8장의 심리학 강의 시간표 같다. 장마다 8가지 주제의 심리학을 설정하여 심리학 연구에 기반을 두어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음의 비밀'을 바로 잡아주며, 장마다 마무리는 '스페셜 팁'이라고 하여 실제 써먹을 수 있는 실용적인 정보를 알려준다. 그러다 보니까 'OOOOO 대학교의 OOOOO OO 교수에 따르면' 'OOOO OO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연구 결과' 이런 글이 자주 나온다. 이 책의 내용과는 별개의 문제지만 우리나라의 심리학 연구도 제대로 활성화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면 사기와 거짓말 공화국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킬 수 있지 않겠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어쩌다가 사기와 거짓말 공화국이 되었냐고 한탄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심리적 이유를 찾자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그릇된 실용주의 때문이리라. 실적만 있으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생명을 경시하거나 논문 조작쯤은 눈감아 줄 수 있다. 좀더 잘살게 된다면 비리 정치가라도 참아주자는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있는 사회 풍토는 '성공한 거짓말쟁이'를 앞으로도 많이 만들어낼 것이다. 그들의 성공은 선량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유혹에 약한 사람을 죄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계기가 될 것이다. -2장, 거짓말의 심리학 중에서(71쪽)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무삭제 심리학>은 자기계발서로도 손색이 없다. 고급 거짓말에 속하는 하얀 거짓말을 하는 법이라든지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성공하는 비법 등 책에서 필요한 부분을 뽑아 자신만의 실천전략으로 삼아 반복 학습과 훈련을 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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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게 책 읽기 - 이제는 책도 먹어야 하는 시대!
이용.김수호 지음 / 경향미디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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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무릎 팍 도사라는 프로그램에서 소설가 이외수님이 배 곯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서러운 것도 없다 하셨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못 먹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먹느냐, 죽느냐의 문제였을 텐데, 그때나 지금이나 책이라면 이야기가 180도 달라진다. 책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그럼 요즘의 음식 문화는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펴보면 조금 흥미롭다-"못 먹어도 좋은데 말야. 못생긴 건 용서 못 해!(음식아! 미안해)" 정도가 될까. 여기서 식탐을 좀 눅이고 주변을 둘러보면 음식을 맛깔나게 요리해서 시각과 미각을 동시에 자극하도록 차려내오는 푸드스타일리스트가 있다. 그들은 요리재료 저마다의 특징과 음식을 먹는 사람의 감정상태를 점쟁이같이 알고 있다. <맛있게 책읽기>에서 시도한 것이 바로 식탐을 책탐으로 전환하여 독자를 유혹해 보고 싶다는 어슴푸레한 의도 아래 책마다의 특징을 알려주며 책을 읽는 사람의 감정상태를 요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책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명 '북스타일리스트'라고 하는데 나는 다시 내식대로 '맞춤형 책도우미'라고 덧붙이고 싶다.



글 쓰는 요리사이자 푸드 칼럼니스트인 박재은은 '식재료 하나 썰어 넣지 않고 온전히 글자만으로 요리하는 맛'을 터득한 '맛글'을 써서 음식 맛을 책으로 옮겨내는 작가이고, 필자는 책을 음식에 비유해 '한 권의 책마다 고유한 맛이 있다'는 가설하에 '책 맛'을 글로 전달하고자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41-42쪽)


 
저자는 의외로(?) 씩씩한 남자(?) 두 분이시다. '맛있는 독서 클럽' 시삽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용 님과 '자기경영 독서학습 실천 전문가'이자 유기농산물 위주의 채식을 하며 농촌지도사로 살고 있는 김수호 님. 


책내용은 한마디로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냥 책 이야기라고 하면 밋밋해서 재미없고, 책제목 그대로 맛있게 책 읽기라고 하기에도 뭔가... 내 주변에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부류들은 책을 맛있게 읽는다는 것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을 테니까. 어쨌거나 내가 느낀 것은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뚝뚝 떼어 넣은 수제비를 맛보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까 헷갈리기도 한 게 이 책의 주독자층이 애매하다는 점이다. 좋게 이야기하면 두루두루 넓은 독자층 선정이 될 수도 있고, 다른 말로 하면 타겟(대상) 설정이 좀 미흡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책을 많이 빨리 읽는 것이 좋은지 좋은(적은) 책을 꼭꼭 씹어서 천천히 읽는 것이 좋은지는 정답이 없고, 책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특정 책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그러한 책 추천 방식이 적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도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책 맛'에 눈을 뜨고 자기만의 비법을 발견하여 리딩 스케줄러(부록)를 재미나게 쓸 수 있다면 목표를 달성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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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
권기봉 지음 / 알마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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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먹고 책도 어느 만큼 읽으면서 나잇살이 붙든지 이젠 좀 무거운 것을 찾을 때도 됐는데 나는 여전히 가벼움을 찾는다. 이 시대의 여느 사람들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이 머리 아프고 복잡하다든가 알고 보니까 생각보다 더 더러운 세상이 밥맛 없어서라고 말하면 누군가는 내가 좀 더 솔직하지 못하고-수준이 덜 돼서 그렇지 요놈아! 따위로 밥맛 없다고 하겠지만, 정말 생각보다 더러운 세상이다. 세상까지 갈 것도 없이 생각보다 더러운 한국이다. 이건 내가 그간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이다. 그럼 또 누군가는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해 보라고 하겠지... 하지만, 그러면 나는 똑같이 더러운 사람이 되고 소위 말하는 부정적인 사람이 돼버린다. 예를 들면, 이런 상황이다.

"있지, 그 교수 너무 더러워. 학생을 학생으로 보지 않잖아."

그러면 다수의 사람들은 '너 참 순진하다.'라는 눈빛을 보낸다. 놀랍게도 어떤 미X ㅆ은 '뭔 일 있느냔.' 눈빛을 보낸다. 자신은 이미 어떤 방식으로든 대충 알고 있다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알아도 모르는 척, 감쪽같이 살아야 둥글둥글하게 사는 것이 돼버린 한국에서의 삶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쓸데없이 하는 이유는, 이 책이 그만큼 독특한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알아도 모르는 척을 철저하게 거부했기 때문이다. 

산골서 자라 유난히 호기심이 많은 저자 권기봉(30, 기자)님은 대학입학과 동시에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에 발을 내디뎠다. 아마도 그때부터 훗날(지금)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라는 책을 낼 준비를 했던 것 같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공간이 궁금해 무작정 길을 나섰는데, 사람이 보이고 역사가 읽히고 그 배경이 되는 건물과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재발견된 메트로폴리스 서울에 대한 글쓰기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책 앞날개에

 건물이 빼곡하고 사람도 많아서 왠지 재미있는 역사가 많을 것만 같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

시민기자를 거쳐 2005년 이후 SBS 기자가 된 저자가 서울을 거닐며 크게 네 가지-일상의 재발견(일곱 군데), 문화의 재발견(여섯 군데), 의미의 재발견(여섯 군데), 장소의 재발견(일곱 군데)을 한 것인데 세종로, 청계고가, 평화시장, 해방촌, 남산공원, 서울역, 단성사, 세운상가, 육당 최남선 고택, 보신각, 서대문 형무소, 독립문, 경교장, 환구단, 와우 아파트, 옛 안기부 등 참 많은 곳을 둘러보고, 장소에서 세월의 흔적을 벗겨 내는 과정을 포함한 그곳의(에 얽힌) 원래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한다. 자칫 장소를 나열해 놓으니 '서울(공간)' 이야긴가 싶지만 '서울'보다는 '역사', 그것도 근현대사에 초점을 맞춘 역사서라고 하는 게 좋겠다. 내가 읽어본 역사서 중에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과 느낌이 비슷한 책이다. 약간 다른 점이라면 인용문이나 참고문헌에 더해 발로 뛰고 직접 공부한 흔적의 기록인 친절한 주석이 있다는 것 정도? 한 편 한 편이 하나의 소논문과 같다.

읽으면서는 내가 몰랐던 역사의 진실에 놀라기도 하고, 분통 터지는 우리 역사의 현장 · 건물 · 사람이 참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나름 어떤-생생한 앎으로 인도하는 정직한 책을 읽는 재미까지 만끽했다. 그런데 그 이후가 문제다. 책장을 덮고 나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뭔가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이런 꿍시렁거림이 이어진다. '이렇게 잘 알면? 잘 알고 많이 알아서 똑똑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사람들은, 왜 사회 돌아가는 모양새는 이 꼬라지인 거야.' 지식인의 두 얼굴이니 별별 지식인의 변명이 이어지는 책들이 있다는 것을 얼핏 알고 있지만 우선은 알았으니 알고 난 후의 발걸음이 이 책이 주는 무게감인 것 같다. 나도 저자의 유쾌함과 여유를 꼭 좀 닮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기억상실'이 당연시되는 우리 사회. 어두운 역사라는 것은 덮어버린다고 해서 잊혀지는 게 아니다. 부끄럽고 슬픈 역사도 분명 우리의 역사다. 고통의 역사를 기억하려는 이유는 그러한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지금 우리는 역사적 성찰을 통해 한 걸음 더 전진할지 아니면 과거로 퇴보할지 중대한 갈림길 앞에 섰다." (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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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연애 사계절 1318 문고 46
김종광 지음 / 사계절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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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연애'하면 왠지 모르게 풋풋하고 설레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낙원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정작 처음 연애에 나의 처음 연애를 대입시켜 보려고 하니까 '...할 것 같았던' 따끈한 이미지는 멀리 달아나고 미지근하고 맹하고 멍한 아지랑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봄날 내리쬐는 햇빛을 차단한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나는 그렇게 아지랑이를 떠올렸나 보다. 그냥 그렇게 떨어져서 보니까 약간 간지러운 느낌이 나는 게 참 좋긴 하다.


떨어져서 보니까, 아니면 남들 얘기니까 더 재미있어 보여 무작정 <처음 연애>를 집어들었다.

사람이란 동물은 뭐든 구경하는 걸 참 좋아한다. 고상한 책이랑 연극 같은 것도 보겠지만 세상에서 제일 재미난 게 불 구경, 쌈 구경이란다. 이참에 나도 합류해 보려고 한다. 남의 집에 불난 구경하는 심정으로 은근 불그죽죽한 표지를 제멋대로 넘겨서 <처음 연애>의 처음 이야기 '징검돌'을 읽는데 아우웃, 농민이 미순을 엎고 징검다리를 건너는 장면부터 (둥가둥가) 이대로 책을 놓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급습했다. 이후로 이어지는 짤막짤막한 단편들이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무척 골때린다. 웃겨 죽겠다. 일부러 재미를 더하기 위해 작가가 짜낸 이름 짓기였대도 이건 정말...  이 친구들의 이름을 한 번씩 크게 불러보고 싶다. 순영아! 천재야! 고운아! 용감아! 곰탱아! 미해야!  정애야! 제석아!  상큼아! 배천아! 판돈아! 규숙아! 무현아! 초해야! 낙미야! 가희야! 자유야! 홍규야! 이 중에 내 첫사랑의 모습도 있고 나의 모습도 있다. 


공사판에서 삽질하던 천재는 머리가 똘똘해서 순영한테 끝끝내 돌아오지 않고, 미인의 절대조건을 갖춘 미해는 수줍음 많은 곰탱이 좀 답답했겠는가.


예로부터 경국지색은, 단순호치는, 절대가인은, 월궁항아는, 천하일색은, 선자옥질은, 빙기옥골은, 녹빈홍안은 소한 대한 때보다 더 차가운 가슴을 가지고 있다 하였다. 미해의 철저한 개무시야말로 그녀가 바로 미인의 절대적 조건인 냉가슴을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63-64쪽)


첫사랑에 실패한 이유를 찬찬히 뜯어보면, 다들 조금씩은 너무 똘똘하고 너무 멍충해서이지 않나 싶다. 



거의 다 읽어 갈 때쯤 알게 된 사실인데 각각의 단편들은 1960년대에서부터 일련의 사건들을 따라 현재에까지 거슬러오고 있다. 확실히 2000년대 이후의 월드컵 커플이나 자유 연애를 하는 커플들은 거의가 '나'중심적이다. 어쩐지 후반부로 갈수록 골때리는 재미는 좀 떨어진다. 1960년대 초짜 연애가 무식하고 답답하지만 뭔가 달콤한 맛이 난다면 2000년대 초짜 연애에선 비로소 쓴맛이 등장한다.


책장을 덮으며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처음 연애를 생각해 본다. 지금 우리는 삶 자체가 '나'중심적이어서 처음 연애가 다 자신과 같은 줄 알고 있는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숨 막힐 듯 빽빽하게 재미진 입담을 자랑하는 소설가 성석제님의 친구라 해도 믿을 김종광님의 입담은 성석제님의 입담보다 조금 숨쉴 구멍을 내주면서 조금 더 발랄하고 의뭉스럽고 뻔뻔하여 마냥 유쾌하다. 이번 여름휴가에 심심해 죽겠는 친구가 있다면 <처음 연애>를 기꺼이 선물해 줄 것이다.




작가에게 한마디 더 > 김종광님? 1971년생이시면서 1960년대 처음 연애를 어찌 그리 잘 아시는지요? 입담이 장난 아니십니다. 역시 노가다 십장 순영 아버님의 말씀이 맞는가 보네요. -"사내 말은 믿지 않는 게 좋다. 이 멍청한 년아, ..."(39쪽)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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