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연애 사계절 1318 문고 46
김종광 지음 / 사계절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연애'하면 왠지 모르게 풋풋하고 설레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낙원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정작 처음 연애에 나의 처음 연애를 대입시켜 보려고 하니까 '...할 것 같았던' 따끈한 이미지는 멀리 달아나고 미지근하고 맹하고 멍한 아지랑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도 않지만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봄날 내리쬐는 햇빛을 차단한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나는 그렇게 아지랑이를 떠올렸나 보다. 그냥 그렇게 떨어져서 보니까 약간 간지러운 느낌이 나는 게 참 좋긴 하다.


떨어져서 보니까, 아니면 남들 얘기니까 더 재미있어 보여 무작정 <처음 연애>를 집어들었다.

사람이란 동물은 뭐든 구경하는 걸 참 좋아한다. 고상한 책이랑 연극 같은 것도 보겠지만 세상에서 제일 재미난 게 불 구경, 쌈 구경이란다. 이참에 나도 합류해 보려고 한다. 남의 집에 불난 구경하는 심정으로 은근 불그죽죽한 표지를 제멋대로 넘겨서 <처음 연애>의 처음 이야기 '징검돌'을 읽는데 아우웃, 농민이 미순을 엎고 징검다리를 건너는 장면부터 (둥가둥가) 이대로 책을 놓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급습했다. 이후로 이어지는 짤막짤막한 단편들이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무척 골때린다. 웃겨 죽겠다. 일부러 재미를 더하기 위해 작가가 짜낸 이름 짓기였대도 이건 정말...  이 친구들의 이름을 한 번씩 크게 불러보고 싶다. 순영아! 천재야! 고운아! 용감아! 곰탱아! 미해야!  정애야! 제석아!  상큼아! 배천아! 판돈아! 규숙아! 무현아! 초해야! 낙미야! 가희야! 자유야! 홍규야! 이 중에 내 첫사랑의 모습도 있고 나의 모습도 있다. 


공사판에서 삽질하던 천재는 머리가 똘똘해서 순영한테 끝끝내 돌아오지 않고, 미인의 절대조건을 갖춘 미해는 수줍음 많은 곰탱이 좀 답답했겠는가.


예로부터 경국지색은, 단순호치는, 절대가인은, 월궁항아는, 천하일색은, 선자옥질은, 빙기옥골은, 녹빈홍안은 소한 대한 때보다 더 차가운 가슴을 가지고 있다 하였다. 미해의 철저한 개무시야말로 그녀가 바로 미인의 절대적 조건인 냉가슴을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63-64쪽)


첫사랑에 실패한 이유를 찬찬히 뜯어보면, 다들 조금씩은 너무 똘똘하고 너무 멍충해서이지 않나 싶다. 



거의 다 읽어 갈 때쯤 알게 된 사실인데 각각의 단편들은 1960년대에서부터 일련의 사건들을 따라 현재에까지 거슬러오고 있다. 확실히 2000년대 이후의 월드컵 커플이나 자유 연애를 하는 커플들은 거의가 '나'중심적이다. 어쩐지 후반부로 갈수록 골때리는 재미는 좀 떨어진다. 1960년대 초짜 연애가 무식하고 답답하지만 뭔가 달콤한 맛이 난다면 2000년대 초짜 연애에선 비로소 쓴맛이 등장한다.


책장을 덮으며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처음 연애를 생각해 본다. 지금 우리는 삶 자체가 '나'중심적이어서 처음 연애가 다 자신과 같은 줄 알고 있는 사람도 꽤 있을 것이다. 숨 막힐 듯 빽빽하게 재미진 입담을 자랑하는 소설가 성석제님의 친구라 해도 믿을 김종광님의 입담은 성석제님의 입담보다 조금 숨쉴 구멍을 내주면서 조금 더 발랄하고 의뭉스럽고 뻔뻔하여 마냥 유쾌하다. 이번 여름휴가에 심심해 죽겠는 친구가 있다면 <처음 연애>를 기꺼이 선물해 줄 것이다.




작가에게 한마디 더 > 김종광님? 1971년생이시면서 1960년대 처음 연애를 어찌 그리 잘 아시는지요? 입담이 장난 아니십니다. 역시 노가다 십장 순영 아버님의 말씀이 맞는가 보네요. -"사내 말은 믿지 않는 게 좋다. 이 멍청한 년아, ..."(39쪽)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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