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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 지식인의 길 - 중국사 지성의 상징 죽림칠현, 절대 난세에 답하다
류창 지음, 이영구 외 옮김 / 유유 / 2012년 10월
평점 :
야만의 시대, 지식인의 길 (중국사 지성의 상징 죽림칠현, 절대 난세에 답하다)
류창(현재 퉁지同濟대학 중문과 부교수) 지음 ㆍ 이영구 외 옮김 / 유유

역사의 회오리바람이 오랜 세월 깊은 땅속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2000년경 슬금슬금 깨어나 끝을 모르고 휘몰아칠 것만 같은 분위기다. 물론 욕심 많은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던 우리나라는 지난 20세기 내내 여러 차례 격동의 시기를 겪어왔지만, 지금 깨어난 이 바람은 중국의 삼국 시대 이후 몇백 년에 걸친 대분열기를 예고하는 건 아닌가.

205년, 죽림칠현의 맏형 산도가 태어났다.
305년, 죽림칠현의 막내 왕융이 세상을 떠났다.
이 일곱 인물의 등장과 퇴장까지의 세월은 더 뺄 것도, 더 보탤 것도 없이 정확히 백 년이다.
그 백 년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갔을까? 번영과 쇠퇴, 기쁨과 슬픔이 끝없이 반복되고 순환되었으리라.
백 년은 어쩌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시간일 뿐이지만, 진정한 풍류는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19쪽)
그렇다면 먼저 죽림칠현이 어떤 이들이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그룹 내에서의 중요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열할 수 있다.
1. 혜강嵇康(223~262) : 자는 숙야叔夜, 초국譙國 질銍(지금의 안휘성安徽省 수계濉溪. 숙현宿縣이라는 설도 있음) 태생.
2. 완적阮籍(210~263) : 자는 사종嗣宗. 진류陳留 울씨尉氏(지금의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에 속함) 태생.
3. 산도山濤(205~283) : 자는 거원巨源. 하내河內 회현懷縣(지금의 하남성 무척武陟) 태생.
4. 유영劉伶 : 자는 백륜伯倫. 패국沛國(지금의 안휘성 회북淮北) 태생. 생졸년 미상. 나이는 완적과 혜강 사이.
5. 상수向秀(227?~272) : 자는 자기子期. 하내 회현 태생. 산도와 동향.
6. 완함阮咸 : 자는 중용仲容. 진류 울씨 태생. 완적의 조카이며 생졸년 미상. 나이는 상수보다 약간 어렸음.
7. 왕융王戎(234~305) : 자는 준충浚沖. 낭야琅琊 임기臨沂(지금의 산동성山東省에 속함) 태생. 왕융은 칠현 중에서 가장 어려서 산도보다 29세, 완적보다 24세, 혜강보다 10세 가까이 연하였음.
이상이 죽림칠현의 명단이다. 혜강, 완적, 산도가 핵심 인물이고 나머지 네 명은 보조 인물이다. (28쪽)
그렇다. 이 책에서 만나볼 ‘죽림칠현竹林七賢’은 험준하기가 이를 데 없었던 위진 시대를 살아냈던 문인 그룹을 이르며, 이들 사후 거대한 나라 중국은 아주 오랜 기간 욕심 많은 자들의 손에 의해 분열기를 겪는다. 사실 학창 시절, ‘죽림칠현’을 언뜻 들어본 것 같긴 한데 뭐하는 자들인지 뚜렷하지는 않고 한세상 유유자적 살다 갔다는 흐릿한 이미지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기 전, 무협지나 무협영화를 접할 때처럼 역사서를 읽는 재미가 우선이긴 했지만, 책 제목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죽림칠현과 지식인이 과연 어떻게 연관 지어질까’ 하는 호기심도 크게 자리 잡았다.
역시 책장을 몇 장 넘기지 않아도 재미는 물론 모 중문학과 교수님을 만나 베일에 가려졌던 역사 속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듯 귀담아들어 볼만한 이야기가 풍부했다. 역사서란 많이 알수록 재미나고 반대로 전혀 알지 못하면 가십거리조차 되지 않는 법인데, 이 책은 적절한 재미와 전문성 두 개 다 갖추었다. 그 이유는 이 책 앞날개에 쓰여진 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2010년 10월 중국 CCTV 교양 프로그램 《백가강단》에서 ‘죽림칠현’을 주제로 강의했다. (...) 그에게 자기만의 스타일로 세상을 살았던 죽림칠현은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다원화된 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자세를 제시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이전에 중국 CCTV 학술 교양프로그램 《백가강단》에서 강의한 '현장 서유기' 36편을 우리나라에서 책으로 낸 <현장 서유기>를 참 유익하고도 재미있게 보았는데, 이 책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최근 다방면으로 급부상하려는 조짐을 보이는 중국답게 역사에 있어서도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여 대중화에 힘쓰는 모습이 부럽기조차 하다. 덕분에 천성적으로 권력의 추악함을 멀리하고 자유를 동경했던 그 옛날 배웠다는 사람들 즉 어떤 지식인 한무리가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의 시기에 어떻게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나며 어떤 끝을 보았는지 살짝 엿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단순 재미만을 위한 역사인물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지금 유유자적 대나무 숲에서 술이나 마시며 놀았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을지 모르는 ‘죽림칠현’이라는 한 시대의 인물들을 연구자의 해석까지 곁들여서 뼈아프게 만나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인, 특히 가장 곧은 인물이었던 혜강의 길이 정말 옳았던 건지, 우리는 어떠한 관점으로 어떠한 해석을 해야 할는지... 핑계가 되겠지만 우리의 역사는 도무지 아무릴 시간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혜강의 죽음이 삶의 가치와 존엄성을 높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앞으로는 혜강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기를, 그리고 혜강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그 암울한 시대가 결코 반복되지 않기를.” (3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