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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
권기봉 지음 / 알마 / 2008년 1월
평점 :
나이도 먹고 책도 어느 만큼 읽으면서 나잇살이 붙든지 이젠 좀 무거운 것을 찾을 때도 됐는데 나는 여전히 가벼움을 찾는다. 이 시대의 여느 사람들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이 머리 아프고 복잡하다든가 알고 보니까 생각보다 더 더러운 세상이 밥맛 없어서라고 말하면 누군가는 내가 좀 더 솔직하지 못하고-수준이 덜 돼서 그렇지 요놈아! 따위로 밥맛 없다고 하겠지만, 정말 생각보다 더러운 세상이다. 세상까지 갈 것도 없이 생각보다 더러운 한국이다. 이건 내가 그간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이다. 그럼 또 누군가는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해 보라고 하겠지... 하지만, 그러면 나는 똑같이 더러운 사람이 되고 소위 말하는 부정적인 사람이 돼버린다. 예를 들면, 이런 상황이다.
"있지, 그 교수 너무 더러워. 학생을 학생으로 보지 않잖아."
그러면 다수의 사람들은 '너 참 순진하다.'라는 눈빛을 보낸다. 놀랍게도 어떤 미X ㅆ은 '뭔 일 있느냔.' 눈빛을 보낸다. 자신은 이미 어떤 방식으로든 대충 알고 있다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알아도 모르는 척, 감쪽같이 살아야 둥글둥글하게 사는 것이 돼버린 한국에서의 삶이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쓸데없이 하는 이유는, 이 책이 그만큼 독특한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알아도 모르는 척을 철저하게 거부했기 때문이다.
산골서 자라 유난히 호기심이 많은 저자 권기봉(30, 기자)님은 대학입학과 동시에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에 발을 내디뎠다. 아마도 그때부터 훗날(지금)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라는 책을 낼 준비를 했던 것 같다.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공간이 궁금해 무작정 길을 나섰는데, 사람이 보이고 역사가 읽히고 그 배경이 되는 건물과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재발견된 메트로폴리스 서울에 대한 글쓰기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책 앞날개에
건물이 빼곡하고 사람도 많아서 왠지 재미있는 역사가 많을 것만 같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
시민기자를 거쳐 2005년 이후 SBS 기자가 된 저자가 서울을 거닐며 크게 네 가지-일상의 재발견(일곱 군데), 문화의 재발견(여섯 군데), 의미의 재발견(여섯 군데), 장소의 재발견(일곱 군데)을 한 것인데 세종로, 청계고가, 평화시장, 해방촌, 남산공원, 서울역, 단성사, 세운상가, 육당 최남선 고택, 보신각, 서대문 형무소, 독립문, 경교장, 환구단, 와우 아파트, 옛 안기부 등 참 많은 곳을 둘러보고, 장소에서 세월의 흔적을 벗겨 내는 과정을 포함한 그곳의(에 얽힌) 원래 모습을 보여 주고자 한다. 자칫 장소를 나열해 놓으니 '서울(공간)' 이야긴가 싶지만 '서울'보다는 '역사', 그것도 근현대사에 초점을 맞춘 역사서라고 하는 게 좋겠다. 내가 읽어본 역사서 중에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과 느낌이 비슷한 책이다. 약간 다른 점이라면 인용문이나 참고문헌에 더해 발로 뛰고 직접 공부한 흔적의 기록인 친절한 주석이 있다는 것 정도? 한 편 한 편이 하나의 소논문과 같다.
읽으면서는 내가 몰랐던 역사의 진실에 놀라기도 하고, 분통 터지는 우리 역사의 현장 · 건물 · 사람이 참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나름 어떤-생생한 앎으로 인도하는 정직한 책을 읽는 재미까지 만끽했다. 그런데 그 이후가 문제다. 책장을 덮고 나서 마음이 무거워진다. 뭔가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이런 꿍시렁거림이 이어진다. '이렇게 잘 알면? 잘 알고 많이 알아서 똑똑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사람들은, 왜 사회 돌아가는 모양새는 이 꼬라지인 거야.' 지식인의 두 얼굴이니 별별 지식인의 변명이 이어지는 책들이 있다는 것을 얼핏 알고 있지만 우선은 알았으니 알고 난 후의 발걸음이 이 책이 주는 무게감인 것 같다. 나도 저자의 유쾌함과 여유를 꼭 좀 닮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기억상실'이 당연시되는 우리 사회. 어두운 역사라는 것은 덮어버린다고 해서 잊혀지는 게 아니다. 부끄럽고 슬픈 역사도 분명 우리의 역사다. 고통의 역사를 기억하려는 이유는 그러한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지금 우리는 역사적 성찰을 통해 한 걸음 더 전진할지 아니면 과거로 퇴보할지 중대한 갈림길 앞에 섰다." (2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