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지나가게 하라 - 흐르는 대로 살아가는 인생의 지혜
박영규 지음 / 청림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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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전 해설을 빙자한 은퇴자의 에세이다. 빙자의 사전적 의미가 남의 힘을 빌려서 의지한다는 것이니, 빌려온 대상은 노자 혹은 도덕경의 내용이 될 것이다. 도덕경의 81가지 문장을 추려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에 주된 출처로 삼았다. 공교롭게도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를 읽던 중에 펼쳐든 책이라 비교하며 보는 맛이 있다. 전자는 노자 연구자의 에세이고 후자는 철학자의 비판적 해설서이기에 냉온탕을 번갈아 오가는 온도차이를 느꼈다.

행복한 은퇴자의 길을 매일 걷고 싶은 저자는 단순하고, 간소하고, 소박하게 살고 싶다. 그리고 학자로서, 교수로서, 정당인으로서 성취한 명예와 성공은 모두 지나갔다. 그저 지나가게 하라는 정언명령은 그래서 더욱 소중해진다. 젊을 때 갈고 닦았던 무위와 자족의 학문적 지식은 비로소 은퇴후 자연인의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쓰임새가 확실해졌다.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간소한 인간관계로, 좋아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삶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다. 노자의 활동무대였던 중국 춘추전국시대에도 오늘날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복잡다단한 인생의 문제를 똑바로 바라보고자 했던 철인들은 후세에도 끊임없이 소환되어 말랑한 현재의 에세이에서도 쉬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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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유전학
임야비 지음 / 쌤앤파커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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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이 살아있는 동안 환경에 적응한 결과로 획득한 형질이 다음 세대에 유전되어 진화가 일어난다는 '용불용설'18세기 생물학자 라마르크가 제시한 고전주의 유전학이다. 그러나 후에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음이 밝혀졌지만 다윈의 진화론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는 평가다.

'자연과학의 용불용설', '혼란스러운 제정러시아',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 - 이 세가지 열쇳말로 독자를 19세기 혹독한 제정러시아의 겨울로 이끈다. 마르크스레닌주의가 헐벗고 굶주린 민중들에게 혁명의 횟불처럼 보이던 무렵 러시아 변방, 조지아에서 온 잔인하고 냉혹한 쳥년이오시프 스탈인은 시베리아 유형을 앞두고 어머니가 차려준 마지막 식사를 하며 부모의 충격적인 유년시절을 듣게 된다.

팩션의 매력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단단한 골조위에 차곡차곡 상상력을 쌓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 제시한 세가지 열쇳말은 소설 구성의 힌트이기도 하면서 별개의 사실이다. 아무런 연관이 없는 열쇳말들이 그럴듯하게 배치된 허구의 이야기에 끈끈한 개연성을 주는 것이 이 소설을 읽는 맛이다. 다만 독자 입장에서는 페이지 번호가 없고 어색한 표현과 엉뚱한 볼드체 문장은 좀 더 완성도 있는 퇴고를 바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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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도 늙지 않기를 권하다 - 죽기 전까지 몸과 정신의 활력을 유지하는 법
마리아네 코흐 지음, 서유리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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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들이 만든 서부영화의 걸작 '황야의 무법자'에서 주인공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두 악당 패거리로부터 끝까지 지켜주는 미모의 가련한 여자 마리솔역을 맡은 이가 이 책의 저자 마리아네 코흐다. 하얀 피부에 청순한 미모를 가졌던 배우로 어릴 적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런 그녀가 92세의 현역 의학박사이며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기대수명은 의학발전으로 점차 늘어나는 반면 건강한 노년을 살다가 존엄한 죽음을 맡게 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온갖 질병을 달고 살다가 혹은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아 지고 있다. 인생을 통틀어 정신적, 신체적으로 변화가 급격한 시기이며 세심한 준비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권하는 노년 건강에 대한 조언은 사실 대체로 평이하며 우리가 모두 아는 내용이다. 그중에서 첫번째로 저자가 독자에게 주문하는 것은 높은 자존감을 갖는 것이다. 나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이를 나와 남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노년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체적 노화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다. 오히려 새로운 것에 대한 배움, 소통에 대한 열린 마음가짐 이야말로 정신적으로 더 성숙할 수 있으며 나이 들어도 두뇌를 더욱 싱싱하게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제는 노년은 늙음이라는 등식은 옛것이 되었다. 노년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각자 알아차리는 것이말로 진정한 늙지 않음의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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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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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후반, 한 때 척추질환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병문안을 온 친구들을 웃으면서 대할 수 없었다. 신음을 삼키며 반가운 표정을 짓기에는 너무 어리고 연약했다. 아프지 않을 때는 아플 때가 올까봐 괴로웠고 정작 아프기 시작하면 이성적 사고는 마비됐다.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백사장역의 황정민은 복수를 하러 찾아온 이병헌을 칼로 찌르며 한마디 한다. '인생은 고통이야. 몰랐어?' 나중에 결국 총맞아 죽지만 일개 건달도 인생이 고통이라는 진리를 알았다. 그러고 보면 고통이라는 감각적 표현은 인생의 전반을 아우르는 함축의 의미가 짙다고 할 수 있다. 비슷하게도 작가 정보라는 고통과 쾌락을 근원적인 모습에서 하나라고 본 듯하다. 불교에서 인생은 고라고 했다. 실상은 괴롭지 않더라도 평상시의 모습이 고인것은 장차 해탈과 열반의 무아를 염두해 두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풀자면 기본값이 고인데 거기서 벗어나려는 평범한 사람들의 노력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작가는 소설에서 제약회사와 신흥교단의 대립이 마치 선악의 문제인 것처럼 서술했지만 결국 고통만 있는 세상도, 쾌락만 존재하는 사회도 비정상의 문제임을 밝히려 한 듯 하다. 저주토끼 이후 단편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여준 만큼 이 소설에서 직관적 재미를 기대했는데 범죄스릴러의 외형을 두룬 장편소설은 등장인물을 특정하기 어려운 난맥상으로 인해 술술 읽어나가기 어려웠다. 특히 형사, 제약회사, 교단등 등장인물과 단체의 정형화된 역할과 지향성은 클리셰 투성이의 B급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서야 조각난 퍼즐을 맞춰보며 이야기를 힘겹게 정리해보지만 그 또한 고통스러운 독서의 과정을 되밟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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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 마을에서
사노 히로미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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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으면서 기시감이 자주 들었다. 슬리피 할로우, 이끼, 빌리지.... 또 뭐가 있을까? 나의 영화감상 목록 중에는 공고하게 마을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그 속에 들어가 해묵은 비밀을 캐려는 사람들과의 갈등을 그리는 여러 장면들이 파닥파닥 넘어간다.

흔히 일본 사람들은 상냥하고 친절하다고 말한다.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하고 공공질서에 대한 준법정신이 대단하다고도 한다. 심지어 그런 성향을 우리도 배우고 실천해야 하지 않냐고 혹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그저 성향이니 국민성이니 말한다면 이 소설은 팔할 정도는 적나라한 실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고급주택가에서 배타적이고 획일적인 성을 쌓고 사는 마을 사람들은 내부의 문제를 마을사람들 다수의 돌팔매로 쓰러뜨리고 매장시켜 버린다. 외부자에게는 웃는 얼굴을 하지만 감시와 독선은 커튼 뒤에 숨긴 채 어두운 밤에 외부자들을 쏘아 보고 있는 것이다. 두 개의 서사가 진행되면서 십여년전 마을의 숨겨진 이야기와 현재 마을을 둘러싼 소문과 사실을 파헤치는 탐정 소설의 외양을 갖췄다. 이야기는 소금이 덜 들어간 설렁탕처럼 담백하긴 한데 좀 싱겁기도 하고 마지막 끝맛을 숟가락 들 때 부터 아는 기분이라, 이럴때는 빨간 깍두기 국물 좀 넣고 대파도 송송 썰어 넣어서 매운 맛으로 먹어야 제맛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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