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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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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 버거의 이 기묘한 장편소설은, 책의 부제와 마찬가지로 ‘편지로 씌여진 소설‘이라 말할 수 있다. 존 버거는 책의 앞장에 등장해 A가 X에게 보낸 이 편지 뭉치들이 발견된 경위에 대해 자세히 밝힌다. 즉, 존 버거의 말에 의하면 어느 폐쇄된 교도소의 73호 감방에서 지낸 마지막 수감자의 편지 뭉치가 밝힐 수 없는 경로로 자신에게 입수되었는데, 시간 순서가 뒤엉킨 이 편지들을 소유자의 편집 순서 그대로 묶어 소설로 출판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총 세 뭉치로 나뉘어진 편지들은 존 버거가 편지뭉치 하나 씩을 열 때에 다시 등장해 편지를 감싼 천의 상태, 거기에 적힌 글씨의 번짐같은 것들을 설명하는 것을 제외하면 편집 없이 거의 그대로 이 소설의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이 기묘한 구성과 편집 방식은, 이 소설이 실화일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암시함과 동시에 현실과 가상의 모호한 경계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메타 픽션적인 성향이 있지만, 존 버거는 ‘이것은 픽션이며 가상의 이야기입니다‘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고 ‘이것은 제가 발견한 편지 뭉치들이며 그것을 소설로 편집하여 묶어낸 것입니다‘하는 자세를 취함과 동시에 ‘종종 제게 이 편지의 내용이 실화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의 실제 여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힘으로써 더욱 이 소설만의 독특한 지점을 창조해낸다. 사실 존 버거의 말처럼,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편지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소설을 모두 읽고 난 뒤에 우리는 A와 X라는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그들만의 특수한 사연들인 동시에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단일한 존재 저마다의 보편적인 이야기임을 알 수 있게 되니까. 그러니까, 결국엔 이것은 그리움의 기록인 동시에 사랑과 인내에 대한 노래이며 치밀하고 저돌적으로 진행되는 세계화-신자유주의-에 보내는 저항과 반동의 움직임인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를 전형적인 소설 작법이 아닌 내밀한 개인의 사적인 기록들, 그것도 일방적으로 한쪽에서 한쪽으로 전해진 편지들로만 구성하여 보여주었다는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탁월한 지점이다.

2.
(존 버거는 이 편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실명이 아님을 밝힌다) 편지의 작성자인 아이다는, 자신의 연인 사비에에게 대답을 들을 수 없는 편지들을 계속해서 써내려간다. 사비에는 사회운동을 하다 이중종신형을 선고받은 기술자로, 이 소설 속에서 사비에의 글은 아이다의 편지 뒷장 여백에 메모해둔 그의 짧은 낙서들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사비에가 아이다에게 보낸 편지들도 분명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들은 이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아이다가 사비에에게 보낸 편지들만이 이곳에 묶여져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중종신형은, 종신형을 두 번 중첩하여 집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감기간 중 한 번의 감형이 인정되더라도, 나머지 하나의 종신형이 남아있기에 그에게 주어진 희망의 두께는 종잇장처럼 얇은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아이다의 편지는, 내내 두터운 밀도의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만날 수 없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의 슬픔과 절망과 고통, 하지만 잃을 수 없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들이 편지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하지만 정말로 내게 가슴 저리게 다가온 것은, 이곳에 보여지지 않은 사비에의 감정들이다.

사비에가 아이다에게 보낸 편지는, 앞서 말했듯이 이곳에 수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비에는 아이다의 편지 뒷장에(아이다는 결코 양면으로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때그때 떠오른 짤막한 이야기들, 세계에서 들려오는 소식들, 자신이 기억해둔 격언들 등을 적어두었고, 그것은 존 버거에 의해 아이다의 편지들 뒤에 고딕체로 분간하여 따로 기록되었다. 그곳에서 사비에는, 아이다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하다. 아이다에게 보내는 이야기들은 모두 아이다에게 부쳐졌을 것이므로, 그곳에는 아이다와는 관련 없는 다른 이야기들이 적혀 있겠지. 하지만 그곳에 적힌 건조하고 담담한 문장들을 읽노라면, 어쩐지 감정 과잉의 아이다의 문장들에서보다 형체가 없기에 짐작조차 하기 힘든 사비에의 감정들이 선명히 읽히곤 하는 것이다.

조세희의 침묵에 뿌리에는, ‘감옥에 갇히는 것은 곧 사랑하는 모든 사람과 헤어져 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갇힌 사람에게는 하루가 50일 같다고 한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사비에가 출구 없는 이중종신형 수감자로서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 절망과 고통 같은 것들은 이 소설 전반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읽히는 것은, 사회운동가로서 그의 문제의식과 강철과도 같은 그의 의지력이다. 그의 글들에는 무력감이나 좌절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읽히는 것은 사회구조에 대한 분노와 의지를 관철시킬 강력한 신념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그 뒷편에 숨어있는 그리움. 그 그리움이 읽히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지,

˝탈 지역화. 단순히 노동력이 가장 싼 곳을 찾아 생산과 서비스가 이동하는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자리잡은 지역들을 파괴해 전 세계가 무의미한 곳, 즉 단 하나의 유동성 시장이 되게 하려는 계획을 뜻한다.˝

와 같은 문장들을 읽어도 사비에가 아이다에게 느끼는 그리움의 감정이 읽히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이 소설 전체에 독자들이 강하게 자신을 이입할 수 있도록 의도한 존 버거의 편집 덕분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내가 가장 가까웠던 어떤 소중한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사람의 이야기에서 역시 고통과 좌절의 시기를 겪은 한 사람의 기록이 등장한다. 그 기록에는 그의 감정에 대한 묘사는 전혀 없었고, 가계부와 같은 현실적인 기록들만 빼곡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 건조한 문장들 사이에서, 내게 소중했던 그이는 불가해한 깊은 슬픔을 느꼈다고. 때론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을 때에 온전히 전해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지점에 문학의 본질이 있을지도.

3.
아이다가 보낸 소식들에는 다양한 사연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시간의 간극은 아무리 좁게 잡아도 2년을 초과한다.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아이다는 만날 수 없는 자신의 연인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쓴다. 그 안에는 ‘그들‘의 억압, 동료의 죽음, 연대와 죽음에의 초극같은 것들이 담겨 있는 동시에 지극한 그리움이 함께 담긴다. 하지만 그들이 저항하는 탈지역화-세계화에 대한 본질을 생각한다면, 아이다와 사비에가 겪은 슬픔이 결코 그들만의 특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동시에 특수한 사건들에 다름 아니며, 그들의 사랑 역시 내게도, 당신에게도 존재했던 내밀한 개인적 사건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들 사이에 인물들의 감정을 밀도있게 넣어두고, 시대에 대한 통찰과 문제의식을 고르게 전달하는 이 소설이 강력하게 마음을 울렸다. 좋아서 메모해둔 내용들은 책갈피라는 이름으로 따로 적어두었다. 앞으로도 내 핸드폰 속의 책갈피들을 따로 올려두려 한다. 좋은 책들은 책갈피가 빼곡하다. 이 소설이 그랬다.


+ 가장 슬픈 장면은, 아이다가 거대한 사건이 아닌 사소한 일에 절망했을 때에 등장한다. 부러진 의자를 혼자 힘으로 고쳐낸 뒤, 반듯하게 선 의자를 바라보며 갑자기 눈물을 터뜨린 자신의 이야기를 말한다.
˝ 왜 눈물이 났던 걸까. 의자를 고치는 건 이렇게 쉬운데 나머지 일들은 너무 어려워서? 아니면 이젠 의자 고치는 일 같든 걸 당신에게 부탁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당신에게!
우리를 두렵게 하는 건 작은 일이에요. 우리를 죽일 수도 있는 거대한 일은, 오히려 우리를 용감하게 만들어주죠.˝ ..91p
이 장면에서 깊이 공감되는 것은 내 의지가 통하지 않는 사소한 지점에서 드러나는 무력감과 절망감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좋아하는 드라마인 ‘연애시대‘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피클 뚜껑을 열려는 데 뻑뻑하여 열리지 않자 피클 병을 집어 던지며 울음을 터뜨리던 은호. 산산조각난 피클병와 터져나온 피클들 사이에서 눈물을 흘리며, 왜 이것 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느냐고 소리지르던 은호의 모습을 떠올린다. 우리 인생에도 그런 장면들이 있지. 엄청난 그리움이나 고통 속에서 의연하다가도, 우리를 손쉽게 무너트리는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아주 작은 사건들이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아주 무력하게 무너지기도 하는 것이다. 가장 슬픈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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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책 ‘열한 계단‘은 자신을 일깨운 도서의 목록에서 출발한 자서전과 같은 책이다. 그 책에서 채사장은 자신을 일깨워 뒤흔드는 책들이 우리 인생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나에게 만일 그런 도서의 목록을 말하라면 얼마나 많은 계단을 올려 세울 수 있을까. 사실 책을 그리 많이 읽지 않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 스스로가 뒤흔들릴 정도의 충격을 준 책의 목록은 그리 길지 않을 것 같다.

다만 가장 최근의 계단을 말하자면 단연 조세희의 이 산문집, ‘침묵의 뿌리‘를 말해야 할 것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그의 다른 책을 읽어본 바 없었으나, 네시이십분 라디오에서 인상깊게 들었던 책이라 꼭 읽어보고 싶었다. 바로 책을 주문하려 찾아봤지만 절판이었고, 중고가는 원래 판본의 두 배가 넘게 형성되어 있었다. 결국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며칠에 걸쳐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책에 담겨있는 치열한 고민과 성찰의 흔적과는 다르게, 조세희는 아주 쉽고 다정한 문체로 글을 써내려갔으므로 읽기 어렵지 않다.

이 책은 조세희가 1980년대 초반, 강원도 정선에 있는 사북읍이라는 작은 마을을 수차례 방문하며 써내려간 수필과 그 기간에 탈고한 소설, 그리고 그와 관련되어 조세희가 청탁해 받은 몇 편의 원고를 함께 묶은 사진-산문집이다. 나는 사북이라는 곳에서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부끄럽게도 전혀 몰랐다. 1980년 사북에서는 어떤 사건이 있었다. 지금은 민주화 운동으로 복권된 그 사건은, 당시에는 폭동 내지는 난동으로 규정되어 관련자들이 형사입건되어 처벌받은 바 있다. 우리 역사에 무지한 나지만, 군사정권을 견디는 동안 숱한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다른 이름으로 호명되고 사법적인 무력에 의해 폭행당했던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북사태 역시 같은 맥락에서의 운동이었으며, 다르게 호명된 사건이었다.

조세희는 사북을 부러 찾아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기록하고 사진찍어 책으로 남기길 바랐다. 그리고 당시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깊은 고민이 이 책에 그들의 삶과 함께 치열하게 적혀 있다. 80년대를 맞으며 급속하게 발전했던 세계 기술사의 변천과, 우리 기술을 갖지 못한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의 아쉬움이 먼저 나열된다. 그는 자신이 과학기술에 무지하다고 자각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 현대 과학의 흐름과 기술발전에 대해 공부한 사실들을 덤덤히 말한다. 그리고 그런 기술 발전으로 인해 우리 경제가 나아지고 있지만, 수백 수천억을 들여 다른 나라의 기술을 사와야만 하는 나라의 기술력을 걱정한다. 하지만 더욱 고민하는 것은 기술과 경제발전과는 다르게 흘려가는 노동자의 삶에 대한 문제다. 기술은 발전하고 경제는 호황임에도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해진다. 가진자는 개인 소득을 일 년에 수백억을 번다고 지적하는 부분은, 그로부터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 읽으면 더욱 소름끼치지 아니할 수 없다. 조세희는 한 개인이 수백억을 벌어들인 부분에서 충격받았지만, 삼십 년 뒤에는 그런 개인이 그로부터 수십배의 더 큰 소득을 벌어들이는 시대가 되어버렸으므로. 그리고 그런 사실이 지금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우므로. 아무도(적어도 사회 자체는) 그 소득격차를 지적하지 않으며, 그 자본가의 이익이 정당하다고 믿는다. 조세희의 이 책으로부터 우리는 한치도 진보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를 지배하는 기득권의 사회구조는 더욱 치밀하고 교묘하게 작동 방식을 발전시켜왔다.

“어려운 나라의 지도 계층이 언제나 숨기려고 하는 것은 다수의 국민이 처해 있는 가난이다. 그들은 빛이 가득찬 세계만 보여준다. ..중략.. 당시의 미국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났다. 경제학자가 사진가를 동원했다. 자기 시대의 기분을 이해한 사진작가들이 비참한 국민생활을 기록하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나갔다. 내가 알기로, 어려운 저희 국민의 생활상을 찍어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거두어들인 세금을 쓴 나라는 당시의 미국밖에 없다. “(..28p)

인상적인 부분은, 감옥 간 조세희의 친구에 대한 이야기에 소설 어린왕자의 주인공을 출연시켜 연출한 에세이다. 감옥에 갇힌 조세희의 친구는 긴 독방 생활 끝에 결국 울었다. 어떤 이유에서 그가 감옥에 갔는지는 설명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그 어떤 누구라도 감옥에 갈 수 있었으므로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감옥에 간 그의 앞에 어린왕자가 등장해 그를 위로한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 있으므로 형이 일해야만 하는데, 형은 일하다가 가슴에 큰 멍이 들어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감옥에 있는 동안 돌아가셨는데 찾아뵙지도 못했다. 형과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울고 있노라고 말한다. 어린왕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를 위로하며, 독방의 높은 창살 앞에서 인사하곤 사라진다. 그것은 분명 이치에 안 닿는 일이었지만, 그 일이 내 친구를 위로했고 친구는 다시는 울지 않았다고 조세희는 말한다.

나는 이 짧은 에세이가 다소 환상적으로 느껴져 좋았다. 누군가의 슬픔을, 그것도 자신이 아닌 타인의 슬픔을, 그 연유를 절절하게 설명하지 않고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지식인이면서도 소설을 쓰는 문학가의 입장에서 그는 그가 쓸 수 있는 방식으로 친구의 슬픔을 사회적 폭력과 연결시켜 다정하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전해져 오는 부분이다.

“감옥에 갇히는 것은 곧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헤어져 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갇힌 사람에게는 하루가 50일 같다고 한다. 독방에서의 하루는 100일 같다. 내 친구는 독방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독방 생활이 47일이나 계속되던 날, 내 친구는 외롭고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독방에서의 하루가 100일에 해당하니까 내 친구가 그 방에 갇혀 보낸 47일을 바깐 세상의 시간으로 바꾸어 놓으면 12년 10개월 6일이 된다. 인내에도 한계가 있어서 내 친구는 울었다. “(..33p)

가장 슬픈 부분은, 단연 사북의 한 광부의 집에서 며칠을 내리 조세희가 끌어안고 읽었다는 사북 어린이들의 수필집에서 발췌한 문장들이 등장할 때다. 나는 그것들을 읽어가며 울컥하는 슬픔과 아픔같은 것들을 견뎌야만 했다. 도저히 가만 앉아 볼 수가 없어 대학교의 햇빛 가득한 학생휴게실의 책상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읽었다. 마음이 뜨거웠다. 내가 모르는 세계, 내 시선과 발길이 닿지 않았던 풍경이 세대를 걸쳐 펼쳐진다. 나는 그 아픈 생채기와 흉터 앞에서 할 수 있는 가능한 일을 찾아보지만, 어느것도 여의치 않다. 조세희는 그런 감정에서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사진기를 들고 그 작은 마을로 나섰다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어린이들의 이야기가 지금에는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 사북의 어린이들은 이름을 바꾸고 고통의 형태를 바꿔 지금도 내 시선과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이런 문장들을 적어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향해본 적 없는 그 시선과 발길의 책임은 오로지 나에게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끄럽고 슬프다.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를 흔들어 일깨운 지식이라고 말하기엔, 내가 얻은 것이라곤 지식이 아니라 부끄러움과 황망한 죄책감 뿐이다. 이 책은 그런 죄책감, 그러니까 죄에 대한 에세이가 된다. 조세희가 느낀 부채감과 죄책감이 그를 움직여서 이 책을 낳게 만들었다. 그 산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사진기를 들고 어디를 가던지 언제나 죄를 느꼈다. 자신의 죄, 사회의 죄, 그리고 모두에게 그럴듯한 알리바이가 있지만 모두에게 있다고 해서 모두가 무죄인 것은 아니라는 명징한 사실에 대해 말한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그 땅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혹은 계속해서 이 자리 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다른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이 책으로부터 20년, 우리는 아마 역사상 가장 수다스러운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조세희가 말한 침묵의 뿌리는 여전히 단단히 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침묵하고 눈감은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슬픔들을 다시 전한다.


<좋은 하느님>
나는 어떤 때 매를 맞는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하늘을 보며 ˝나는 죽고 싶어요, 죽여주세요 하느님˝하며 운다. -5학년 도미숙 (..43p)

<우리집>
우리집은 방이 너무 좁다. 그래서 나는 잠을 편하게 못 잔다. 그리고 내 동생이 한 명 있는데, 내 동생은 잠을 아주 이상하게 잔다. 내 배에다가 다리를 올려 놓거나 아니면 우리 엄마 가슴 위에서 엎드려 잔다. 그래서 나는 아빠보고 방이 넓은 데로 이사를 가자고 그러면, 아빠는 자꾸 1년만 더 살고 가자고 하신다. 엄마한테도 그러면 엄마는 또 아빠하고 다르다. 엄마는 3년만 더 살고 가자고 하신다. -2학년 정혜영 (..44p)

<가장 슬픈 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며칠 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중풍에 걸려서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간경화증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와 할머니가 보고 싶다. -6학년 김은주 (..48p)

<아픈 이야기>
우리 어머니는 숨을 잘 못 쉰다. 그래서 내가 밥을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나왔다. 나는 어머니에게 ˝제가 할께요˝하고 말하였다. 어머니가 ˝그래, 그럼 자 해라˝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1학년 송미경 (..49p)

<하늘 나라>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너무 갑갑하다.
나는 하늘 나라에 가고 싶다.
하늘 나라는 어떻게 생겼을까. 하늘 나라에는 사람이 살고 있을까. 사람이 산다면 어떻게들 살고 있을까. -5학년 이순자(..55p)


마지막으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써둔다. 가슴을 둔중하게 때리는 책이다. 앞으로도 아껴가며 몇 번을 더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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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 제155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김난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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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소설리스트의 리스트를 신뢰한다. 매주 주목되는 소설 신간의 리스트를 제공하는 소설리스트를 감사하게 읽으며, 내게도 인상적인 소설들은 알라딘의 장바구니에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마치 개미들이 겨울을 나기 위한 곡식을 저장해두듯이, 꿀벌이 수천번을 왕복하며 꽃술에서 꿀을 모아 침과 섞어 벌집 속에 담아두듯이. 그리고 한달에 두어번 장바구니의 목록을 살펴보며 시간이 지나 어느새 생경해진 이름들 속에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을 선택하여 주문한다. 오기와라 히로시의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역시 2017년의 ‘금요일의 리스트‘에서 소개받았던 소설이다. 당시 글을 올린 집필자는 어느새 친밀감을 느끼게 된 준님인데, 그녀는 그곳에서 이 소설에 대해 ‘가족에 대한 소설‘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동시해 상실과 화해, 그리고 그 이후 삶을 살아가는 작가의 응원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주 담백하지만 작가의 색채가 묻어나는 문체로 소설은 일관적이게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나간다. 누군가를 상실했거나 불화로 인해 멀어져 있거나 다툼이 있거나 하는 관계의 인물들이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를 만든다. 그 이야기들은 사실 뻔히 눈에 들여다보이는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듯하게 마음을 만지는 뭔가가 있었다. 표제작인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에서는, 흥미로운 구성이 눈에 띈다. 비밀을 간직한 이발소에 찾아간 의문의 청년, 그 둘 사이에서 일방적으로 벌어지는 대화- 즉 이발사의 자기고백이 소설의 주된 이야기지만, 이야기의 끝에 가서야 청년과 이발사의 관계가 밝혀지고 어느새 이발사의 한마디 한마디는 독자가 허투루 읽어 넘길 수 없는 한 인간의 진실된 독백이 되어버린다. 혹은 ‘성인식‘과 같은 이야기의 울림이 깊은 작품도 있다. 아주 오래 전, 어린 딸을 잃은 뒤 일상이 파괴된 부부의 삶에는 어떻게 구원이 찾아올 것인가. 그들이 딸을 기억하며 새롭게 일을 벌이고 활력을 낳는 동안 내내 딸이 함께한다는 사실이 퍽 아름다웠다.

그 외에도 이 소설에는 총 6편의 고른 소설들이 담겼지만,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하늘은 오늘도 스카이‘였다. 가정의 불화 혹은 폭력에 길들여진 소녀와 소년이 ‘바다‘라는 희망을 향해 길을 나선다. 그 길 속에서 녀석들은 폭우를 만나 지장보살과 함께 비를 피하기도 하고, 낯선 부랑자에게 보호받으며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바다를 만난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경찰. 경찰은 부랑자를 의심하며 언성을 높이고, 소녀와 소년은 그는 잘못한 게 없다며 소리친다. 그 와중에도 하늘은, 오늘도 스카이, 맘 모르고 푸르다.

우리 주변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그렇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상실의 흔적을 가볍고 따듯하게, 그리고 아주 조용하고 소란스럽지 않게 들려주는 이 소설들은 내 취향은 아니면서도 읽고 나니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다 읽고나면 가족에 대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세대간의 화해에 대한 이야기가 소설 전체에 걸친 주제라는 생각도 함께 든다. 자식세대와 부모세대는 서로 익혀나간 생존법이 다르듯이 살아가는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 관계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다. 그것은 개인차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그들이 헤쳐나온 사회의 모습과 닮아있다는 점에서 화해는 쉽지 않아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세대 역시 시간이 지나면 오래된 세대가 되기 마련. 서로가 서로의 눈을 마주보고 손을 잡고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이런 희망 때문이다. 치매걸린 히스테릭한 어머니를 어느 순간 이해하거나(언젠가 왔던 길), 남편에게 투정부리는 내 마음이 전쟁세대의 연인들에게는 하나의 사치로 보여질 수 있겠다는 사실을 깨닫거나(멀리서 온 편지), 허세 가득한 아버지의 유품을 고치는 과정에서 타인의 인생들에도 모두 자신만의 서사가 있음을 깨닫는 과정에서나(때가 없는 시계) 모두 그런 희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압도적인 서사로 독자를 휘어잡는 스타일의 이야기는 아니고, 날카로운 사회인식으로 떨떠름한 충격을 주는 작품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때로 이렇게 가볍고 부드러우며 둥글고 푹신한 이야기들이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런 때에 그런 독자에게 읽히기 아주 좋은 소설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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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해 초 겪은 일련의 사건으로 나는 스스로가 가진 젠더 감수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 사건에 대해서 일일히 밝힐 생각은 없고, 많은 고민을 거쳤지만 여전히 그 때 내가 보였던 행동은 지금 돌아보면 의문이 많이 남기도 한다. 정리가 필요한 일이다. 가치관이라는 건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다. 사람은 가치관에 따라 가치판단을 하고, 그 가치판단이 개인의 행동양식을 결정한다. 집단과 개인 간의 가치는 어느 쪽이 우위인가-라는 단순하고도 핵심적인 명제를 중심으로 가치판단이 일반적으로 양분되어 옳고 그름을 뚜렷히 가를 수 없는 범주의 윤리명제는 너무나도 많다. 나는 그 가운데서 내가 옳다고 믿는 쪽을 언제나 믿어 왔으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에 의해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감정적일 때도 있고, 혹은 내가 이성적 판단이라고 믿었던 사실이 실제로는 내게 주입된 환경적 영향에서 기인한 사회적 결정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고민들을 촉발시킨 것은 실제로 내가 겪은 올해 초의 사건 때문이지만, 사실 이런 논란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으며 내가 그런 논란에 귀기울이지 않은 것은 온전히 나의 책임이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는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가치관을 강요하는가? 그리하여 나의 행동을 어떤 식으로 통제하고 나의 사고를 어떻게 편협한 저울 위에서 움직이게 하는가? 이것은 아주 무서운 일이다. 그 고민 이후로 내가 접하는 세상의 모든 의견은 다르게만 보였고 나는 홀로, 혹은 소수와 함께 그런 일련의 다수 의견에 맞서 온라인 상의 언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 느낀 고독이나 슬픔,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분노와 무력감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이 책에 대한 이야기 뒤에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2.
서론이 길었지만, 올 한 해는 스스로 참 많은 것들을 뒤돌아 본 시기이며 역동적으로 내 자아가 분열하거나 움직이거나 성장하거나 퇴보했던 한 해라고 느낀다는 것을 저렇게 길게 얘기한 것이다. 알게 되면 새롭게 보인다. 그럼 마치 밝고 명징해보였던 세계라는 것이 사실은 어처구니 없이 허술하고 멍청하고 그림자에 드리워진 땅 속 깊은 굴처럼 느껴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조남주의 이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은 그런 세계를 보거나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눈 앞에 들이대는 허술하고 멍청한 이 세계를 기록한 치밀한 보고서이며, 혹은 그런 세계 속에서 고통받아온 사람들에게 건네는 연대의 제안서이기도 하다. 그럼 나같은 사람에게는 어떻게 읽힐 것인가? 당연히 전자의 입장에 속한다. 나는 82년생 김지영을 알지 못하였고, 아마 이 책을 읽은 뒤에도 영원히 온전히 그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이해하려는 노력과 연대하려는 움직임만을 가질 수 있을 뿐, 어떻게 90년대에 대한민국에 태어난 남성으로써 그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한다 할지라도, 우리나라의 무수히 많은 김지영은 이 책의 분량 만큼이나, 아니 그보다도 더욱 방대한 자신만의 슬픔과 차별과 고통의 서사를 갖고 있을 지언데, 내게 그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그 세계의 크기에 비해 너무도 미약한 것일 테다.

이 소설은 앞서 말한 듯이, 소설의 형식을 빌리고 있긴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보고서처럼 읽힐 것이다. 소설의 제목까지 치밀하게 설정된 이 책은(82년에 태어난 여성에게 주어진 이름 중 가장 많은 것이 ‘김지영‘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내내 실제 김지영이라는 인물이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들게 하는 핍진성으로 무장하여 이 세계에 애써 눈돌리고 침묵한 다수에게 또박또박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김지영씨의 어머니의 역사, 그리고 그 사회 속에서 죽음당한 김지영씨의 동생, 김지영씨가 자라나며 겪은 은밀하고 당당한 차별의 이야기, 낯선 이에게 뜻모르고 당한 위협과 추행과 가해자를 보호하는 사회적 시선,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포기만이 가득한 선택지, 그리고 그 선택을 옳으며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어가는 이 세계의 목소리들. 김지영씨는 소설 속에서 내내 하고픈 말을 삼킨다. 목소리는 권력을 선점한 자들의 것이다. 사회적인 권력이 있는 자들만이 강한 발언권을 갖는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말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말할 수 없는 자들의 순응이나 그들의 선택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이 문학이 할 일이고, 결국엔 사회 구성원들의 몫으로 남겨진 윤리다. 이 소설은 그런 점에서 문학이다. 때로 이 소설을 읽은 뒤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문학적 정취가 없다는 이유로 가치를 깎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문학이 아니라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여기에 있다. 보고서처럼 읽히는 것은 이 책이 그만한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소설이라고, 허구라고 다시 눈 돌릴 사람들에게 ‘그게 아냐, 이건 당신이 발 붙이고 사는 이 곳, 이 세계의 이야기야‘라고 말하는 것이다.

3.
나 역시 반성할 것이 많다. 그리고 그런 계기는 참 많이도 있었다. 나는 누나가 한 명 있다. 언젠가 누나가 내게 자신이 어릴 적 여성으로서 당했던 기분 나빴던 이야기들을 말해준 적이 있었다. 아마 그런 이야기는 우리나라 여성들이라면 누구든 하나 쯤은 갖고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내가 접하는 커뮤니티 사이트의 익명 게시판에서, 한번 이런 화제가 불 붙은 적이 있었는데, 엄청나게 많은 여성 회원들이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쏟아냈던 기억이 난다. 그 사이트는 체감상 남성 회원의 수가 월등히 많은 사이트인데도 그 글에 남겨진 남성들의 댓글은 모두 ‘미안하다‘, ‘알지 못했다‘, ‘상처를 위로하고 싶지만 할 말이 없다‘같은 공감과 위로의 댓글이었다. 나는 그 때에는 참 그 사이트가 따듯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떤 연대의 희망같은 것도 가졌던 것 같다.

하지만 최근에 그런 생각을 접었다. 어떤 회원이 이 책을 남자친구에게 권했다가 그 책 이상한 책 아니냐고, 너도 그 쪽 사람이냐고, 나는 절대 그 책을 읽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글에 달린 댓글들은 절망적이었다. 일부 사람들이 나서서 이 책을 변호(어휘가 우스꽝스럽지만 아무튼)했고, 잘못된 인식에 대한 중재를 시도했지만 모두 비웃음과 멸시, 이상한 사례에 대한 일반화로 짓뭉개졌다. 나는 좀 슬펐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무력했다. 뭐 내가 대단한 언쟁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비웃음거리로 전락해 ‘남자인 척하는 여자‘로 결정되어 무시되는 지점에서는 참을 수 없었다. 그 표현에는 은연중에 ‘여자의 의견은 무시해도 되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남자임을 입증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대체 왜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내 생물적 성별을 증명해야만 하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어 그 글에서 벗어났다. 그 뒤로는 좀처럼 그곳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남의 집처럼 낯선 공간처럼 느껴진다. 그리 유명한 사이트는 아닌데 사람들이 정이 있고 음악 커뮤니티 답게 문화적 감수성이 높아 자주 들어갔던 곳이다. 그런 집단의 이성적 사고가 그렇게 편협하다는 사실이 애석하고 씁쓸하다.

서론과 더불어 뒷말 역시 길어졌지만, 이 책이 연대의 목소리라는 점과, 바디우적 윤리의 관점에서 ‘계속하시오!‘를 강조한다는 점을 마지막으로 얘기해야겠다. 할말을 매번 삼키던 김지영씨는 결국 정신적인 문제를 앓고 때때로 자신이 경험한 다른 여성으로 분해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증상을 보이게 된다. 그것이 연대의 목소리라는 김고연주 여성학자의 해설에 동의한다. 또한 마지막에 등장하여 소설을 정리하는 화자 ‘나‘의 행동을 통해 거울과도 같은 경각심을 주는 대목에 주목해야한다. 김지영씨의 삶을 추적하며 그녀를 이해하고, 그녀처럼 많은 것을 희생하고 차별받은 자신의 아내를 언급하며, 뭔가 다른 삶의 방식을 결정할 것만 같았던 화자 역시 자신 주위에 짜여진 관계 위에서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어떤 사건이 있을 때, 그 사건이 우리에게 새로운 존재 방식을 강요한다면 우린 그 사건에 충실해야한다. 그리고 충실성에 대한 충실성으로, 우린 우리가 운동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야말로 바디우 적 말대로,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연대하고 목소리를 내기를, 깨부수고 새로이 짓고 바꿔나가기를, 멈추지 않고 계속할 것, 그것이 이 소설을 읽고 만들어 가야 할 우리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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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 Arms 1
료우지 미나가와 지음, 박련 옮김 / 세주문화 / 1999년 7월
평점 :
절판


나 만화를 엄청 좋아한다. 어릴적엔 동네 만화방에 출근하다시피 하며 매일매일 만화를 읽었다. 그 때 읽었던 것들은 대체로 우리나라나 일본의 코믹스 위주였다. ‘나루토‘나 ‘원피스‘, ‘블리치‘ 같은 만화랑은 같이 자라던 세대였고(다 끝나고 이제 원피스만 남았네), ‘도라에몽‘이나 ‘타루루토‘같은 만화들을 보면서 상상력을 키우기도 했다. ‘괴짜가족‘이나 ‘미스터 부우‘같은 B급 만화도 꽤나 좋아했고, 당시 생각보다 꽤나 무거운 주제를 다룬 ‘견신‘, 그리고 이 만화 ‘암스(ARMS)‘도 열심히 봤었지. 지금 와서 떠올려보라면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아무래도 ‘몬스터‘로 대표되는 우라사와 나오키, 그리고 ‘기생수‘의 이와아키 히토시 등. 이와아키 히토시의 만화는 단편도 좋고, 지금 연재중인 ‘히스토리에‘도 좋다. 야마모토 히데오의 ‘호문클루스‘라던지 이토준지의 ‘소용돌이‘같은 기괴한 만화들도 좋아했다. ‘허니와 클로버‘같은 치유계나 성장계 만화도 좋고, 지금 보면 젠더감수성이 아주 개판이구만 싶은 ‘러브히나‘같은 야릇한 만화들도 옛날엔 두근거리며 읽기도 했다.

웹툰계에서는 웹툰의 조상 호연의 ‘도자기‘를 제일 좋아한다. 너무 좋아해서 출판된 뒤로는 주변에 선물로도 자주 줌. 강풀 만화도 좋고 애증의 ‘덴마‘도 좋다. 하지만 역시 사랑스러운 ‘어서오세요 305호에‘와 ‘연민의 굴레‘를 이후 제일 좋아하게 됐다(고아라의 모든 웹툰들도 함께). 지금은 단권, 혹은 두 권 정도에서 정리되는 서사성이 강한 짧은 코믹스나 유럽의 그래픽 노블을 좋아한다. 제일 좋아하는 그래픽 노블은 마누엘레 피오르의 ‘초속 50,000km‘. 정말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길게 써놨는데(암스 얘기 하려고 시작한건데..), 아무튼 요즘 기쁜점은 어딜가서 ‘나 만화 좋아해요‘라고 말해도 대단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웹툰이라는 것이 아주 크게 인기를 끌기 시작한 이후라고 말해도 될까? 혹은 덕후라는 명칭이 더이상 경멸의 단어로 쓰이지 않게 되기 시작한 뒤부터일까? 아무튼 나에게는 엄연한 문화적 키워드였던 만화가 더이상 저급하다거나 말초적인 무언가로 취급받지 않게 되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주변의 시선과는 관계없이, 나는 여전히 만화, 혹은 코믹스, 혹은 웹툰, 혹은 그래픽 노블들을 읽었고, 계속해서 읽는다. 그래서 내가 정말 인상깊게 본 만화들에 대해 좀 기록해둘 생각.

지금 말하려는 ‘암스(ARMS)‘는 일본 만화가 미나가와 료지의 장편 만화로 내가 본 판으로는 총 22권에 달하는 대서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딱히 ‘제일 좋아하는 만화!!‘싶은 종류의 것은 아닌데 왜 쓰냐면, 얼마 전 시코쿠에 머물 당시 농장에서 심심할 때 다시 읽었던 만화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봤던 만화를 또 본 역사는 수두룩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 만화는 그 길이를 고려한다면 꽤나 인상적인 정주행 횟수를 자랑한다고 할 수 있다. 아마 다섯 번 정도는 읽었으려나? 그만큼 당시 만화가 갖춰야 할 흥미요소가 아주 탁월하게 들어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정말 좋아하는 이유는 이 만화가 갖고있는 주제의식에 있다.

만화라고 하면 단순한 유머 위주의 것들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소소한 일상물이나 소년 소녀들의 사랑얘기들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종 이상한 만화들이 있는데, 이제는 전형이 되어버린 배틀물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단순히 -강한 상대들을 무찌르고 더 강해진다-는 것을 넘어서 철학적인 주제들을 갖고 성장하는 인물들을 그린 만화들이 있는 것이다. 다양한 만화들이 있겠지만, 이 만화 역시 마찬가지다.

만화 암스는 평범한 고교생 네 명에게 ‘암스(ARMS)‘라는 미지의 물체가 이식된 후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암스가 무엇인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뜻밖에 진화론적, 과학적 설명을 덧붙여야만 한다. 저자는 생명의 근원에 대해 탐구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탄소 근본의 유기물로부터 시작한 유기생명체라면, 우주 어딘가에서는 그 출발점이 근본부터 다른 미지의 생명체가 있지는 않을까? 라는 상상으로부터 이 만화가 시작한다는 것. 그 미지의 생명체가 무엇인지는 만화에 나오고, 그것이 암스라는 일종의 무기의 시초가 된다.

인물들이 가진 암스는 모두 개별적인 코드네임을 갖는다. 주인공 료-의 암스는 ‘자바워크‘, 신구 하야토-의 암스는 ‘나이트‘, 토모에 다케시는 ‘백토끼‘, 쿠루마 케이는 ‘하트의 여왕‘이다.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이 만화는 꽤나 많은 부분에서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암스는 매우 다양한데, 모두 루이스 캐럴의 동화에서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을 갖고 있다. 다만 주인공 네명의 암스는 오리지널 암스라는 특별한 것으로, 앨리스로부터 탄생한 최초의 암스인 것이다. 이 암스들은 각각 인격을 갖고 있으며 다른 암스들과는 다른 강력한 힘을 자랑한다.

료와 하야토 등은 초국가적 비밀 조직인 ‘에그리고리’의 음모로부터 자신들의 일상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 세계적 군수업체인 에그리고리는 태아 때부터 천재성을 이식받고 자라난 유전자 조작 인간부터 시작해 몸의 일부를 사이보그로 개조한 개조인간, 초능력 인간 등을 보내며 주인공들을 위협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바로 주인공들에게 이식된 오리지널 암스. 외계로부터 도래한 금속생명 앨리스로부터 탄생한 암스를 이용해 신인류로의 진화를 꾀하는 에그리고리는 인격을 갖는 오리지널 암스를 해부해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쓰러트린 적들은 보통의 만화라면 전투력 측정기, 혹은 주인공들의 성장촉매로 활용되고 일회성으로 휘발되어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암스는 그렇지 않다. 그 점이 이 만화의 큰 장점이다. 그들이 쓰러트린 적들은 모두 회개하여 에그리고리에 다시 대항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죽거나 동료로 편입된다. 계속해서 상대가 강해지는 파워인플레 속에 새로 동료로 편입된 과거의 적들이 결정적 인물들로 활약하진 않지만, 몇몇 인물들은 끝까지 주인공들의 조력자로 나서기도 한다.

-힘을 원하는가? 라는 희대의 명대사를 탄생시킨 이 만화는 재미있게도 최종장에 가서는 모두가 힘을 잃은 채 양산된 암스들에게 맞선다. 나는 이 지점이 이 만화만이 갖는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더욱 강해지고 또 강해져서 적을 돌파해버리는 무력 중시의 배틀물이 아닌, 연대와 유대의 힘, 그리고 진화추종자들에게 인간의 힘으로 맞서 이겨나가는 모습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이 만화에서처럼 참으로 지독하고 끔찍한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인간이기에 가능한 인간적인 행동들도 존재한다. 그것들은 이분화하여 이것은 그르고 저것은 옳다거나, 이것은 배제하고 저것만을 취한다던지 하는 문제일 수 없다. 나는 그래서 가장 마지막 챕터를 빼놓고 이 만화가 마무리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모두가 공평히 힘을 잃고, 다시 소중한 사람을 자신들만의 힘으로 되찾아 온 뒤에 그대로 막을 내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시코쿠에 있을 때 쓰다가 말아놓고 보니 쓸데없이 장황하고 이상한 얘기가 되어버렸다만, 쓴게 아깝다. 다음부턴 짧고 기억하기 쉽게 기록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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