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 Arms 1
료우지 미나가와 지음, 박련 옮김 / 세주문화 / 1999년 7월
평점 :
절판


나 만화를 엄청 좋아한다. 어릴적엔 동네 만화방에 출근하다시피 하며 매일매일 만화를 읽었다. 그 때 읽었던 것들은 대체로 우리나라나 일본의 코믹스 위주였다. ‘나루토‘나 ‘원피스‘, ‘블리치‘ 같은 만화랑은 같이 자라던 세대였고(다 끝나고 이제 원피스만 남았네), ‘도라에몽‘이나 ‘타루루토‘같은 만화들을 보면서 상상력을 키우기도 했다. ‘괴짜가족‘이나 ‘미스터 부우‘같은 B급 만화도 꽤나 좋아했고, 당시 생각보다 꽤나 무거운 주제를 다룬 ‘견신‘, 그리고 이 만화 ‘암스(ARMS)‘도 열심히 봤었지. 지금 와서 떠올려보라면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아무래도 ‘몬스터‘로 대표되는 우라사와 나오키, 그리고 ‘기생수‘의 이와아키 히토시 등. 이와아키 히토시의 만화는 단편도 좋고, 지금 연재중인 ‘히스토리에‘도 좋다. 야마모토 히데오의 ‘호문클루스‘라던지 이토준지의 ‘소용돌이‘같은 기괴한 만화들도 좋아했다. ‘허니와 클로버‘같은 치유계나 성장계 만화도 좋고, 지금 보면 젠더감수성이 아주 개판이구만 싶은 ‘러브히나‘같은 야릇한 만화들도 옛날엔 두근거리며 읽기도 했다.

웹툰계에서는 웹툰의 조상 호연의 ‘도자기‘를 제일 좋아한다. 너무 좋아해서 출판된 뒤로는 주변에 선물로도 자주 줌. 강풀 만화도 좋고 애증의 ‘덴마‘도 좋다. 하지만 역시 사랑스러운 ‘어서오세요 305호에‘와 ‘연민의 굴레‘를 이후 제일 좋아하게 됐다(고아라의 모든 웹툰들도 함께). 지금은 단권, 혹은 두 권 정도에서 정리되는 서사성이 강한 짧은 코믹스나 유럽의 그래픽 노블을 좋아한다. 제일 좋아하는 그래픽 노블은 마누엘레 피오르의 ‘초속 50,000km‘. 정말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길게 써놨는데(암스 얘기 하려고 시작한건데..), 아무튼 요즘 기쁜점은 어딜가서 ‘나 만화 좋아해요‘라고 말해도 대단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웹툰이라는 것이 아주 크게 인기를 끌기 시작한 이후라고 말해도 될까? 혹은 덕후라는 명칭이 더이상 경멸의 단어로 쓰이지 않게 되기 시작한 뒤부터일까? 아무튼 나에게는 엄연한 문화적 키워드였던 만화가 더이상 저급하다거나 말초적인 무언가로 취급받지 않게 되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주변의 시선과는 관계없이, 나는 여전히 만화, 혹은 코믹스, 혹은 웹툰, 혹은 그래픽 노블들을 읽었고, 계속해서 읽는다. 그래서 내가 정말 인상깊게 본 만화들에 대해 좀 기록해둘 생각.

지금 말하려는 ‘암스(ARMS)‘는 일본 만화가 미나가와 료지의 장편 만화로 내가 본 판으로는 총 22권에 달하는 대서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딱히 ‘제일 좋아하는 만화!!‘싶은 종류의 것은 아닌데 왜 쓰냐면, 얼마 전 시코쿠에 머물 당시 농장에서 심심할 때 다시 읽었던 만화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봤던 만화를 또 본 역사는 수두룩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 만화는 그 길이를 고려한다면 꽤나 인상적인 정주행 횟수를 자랑한다고 할 수 있다. 아마 다섯 번 정도는 읽었으려나? 그만큼 당시 만화가 갖춰야 할 흥미요소가 아주 탁월하게 들어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정말 좋아하는 이유는 이 만화가 갖고있는 주제의식에 있다.

만화라고 하면 단순한 유머 위주의 것들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소소한 일상물이나 소년 소녀들의 사랑얘기들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종 이상한 만화들이 있는데, 이제는 전형이 되어버린 배틀물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단순히 -강한 상대들을 무찌르고 더 강해진다-는 것을 넘어서 철학적인 주제들을 갖고 성장하는 인물들을 그린 만화들이 있는 것이다. 다양한 만화들이 있겠지만, 이 만화 역시 마찬가지다.

만화 암스는 평범한 고교생 네 명에게 ‘암스(ARMS)‘라는 미지의 물체가 이식된 후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암스가 무엇인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뜻밖에 진화론적, 과학적 설명을 덧붙여야만 한다. 저자는 생명의 근원에 대해 탐구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탄소 근본의 유기물로부터 시작한 유기생명체라면, 우주 어딘가에서는 그 출발점이 근본부터 다른 미지의 생명체가 있지는 않을까? 라는 상상으로부터 이 만화가 시작한다는 것. 그 미지의 생명체가 무엇인지는 만화에 나오고, 그것이 암스라는 일종의 무기의 시초가 된다.

인물들이 가진 암스는 모두 개별적인 코드네임을 갖는다. 주인공 료-의 암스는 ‘자바워크‘, 신구 하야토-의 암스는 ‘나이트‘, 토모에 다케시는 ‘백토끼‘, 쿠루마 케이는 ‘하트의 여왕‘이다.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이 만화는 꽤나 많은 부분에서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암스는 매우 다양한데, 모두 루이스 캐럴의 동화에서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을 갖고 있다. 다만 주인공 네명의 암스는 오리지널 암스라는 특별한 것으로, 앨리스로부터 탄생한 최초의 암스인 것이다. 이 암스들은 각각 인격을 갖고 있으며 다른 암스들과는 다른 강력한 힘을 자랑한다.

료와 하야토 등은 초국가적 비밀 조직인 ‘에그리고리’의 음모로부터 자신들의 일상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 세계적 군수업체인 에그리고리는 태아 때부터 천재성을 이식받고 자라난 유전자 조작 인간부터 시작해 몸의 일부를 사이보그로 개조한 개조인간, 초능력 인간 등을 보내며 주인공들을 위협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바로 주인공들에게 이식된 오리지널 암스. 외계로부터 도래한 금속생명 앨리스로부터 탄생한 암스를 이용해 신인류로의 진화를 꾀하는 에그리고리는 인격을 갖는 오리지널 암스를 해부해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쓰러트린 적들은 보통의 만화라면 전투력 측정기, 혹은 주인공들의 성장촉매로 활용되고 일회성으로 휘발되어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암스는 그렇지 않다. 그 점이 이 만화의 큰 장점이다. 그들이 쓰러트린 적들은 모두 회개하여 에그리고리에 다시 대항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죽거나 동료로 편입된다. 계속해서 상대가 강해지는 파워인플레 속에 새로 동료로 편입된 과거의 적들이 결정적 인물들로 활약하진 않지만, 몇몇 인물들은 끝까지 주인공들의 조력자로 나서기도 한다.

-힘을 원하는가? 라는 희대의 명대사를 탄생시킨 이 만화는 재미있게도 최종장에 가서는 모두가 힘을 잃은 채 양산된 암스들에게 맞선다. 나는 이 지점이 이 만화만이 갖는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더욱 강해지고 또 강해져서 적을 돌파해버리는 무력 중시의 배틀물이 아닌, 연대와 유대의 힘, 그리고 진화추종자들에게 인간의 힘으로 맞서 이겨나가는 모습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이 만화에서처럼 참으로 지독하고 끔찍한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인간이기에 가능한 인간적인 행동들도 존재한다. 그것들은 이분화하여 이것은 그르고 저것은 옳다거나, 이것은 배제하고 저것만을 취한다던지 하는 문제일 수 없다. 나는 그래서 가장 마지막 챕터를 빼놓고 이 만화가 마무리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모두가 공평히 힘을 잃고, 다시 소중한 사람을 자신들만의 힘으로 되찾아 온 뒤에 그대로 막을 내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시코쿠에 있을 때 쓰다가 말아놓고 보니 쓸데없이 장황하고 이상한 얘기가 되어버렸다만, 쓴게 아깝다. 다음부턴 짧고 기억하기 쉽게 기록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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