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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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 버거의 이 기묘한 장편소설은, 책의 부제와 마찬가지로 ‘편지로 씌여진 소설‘이라 말할 수 있다. 존 버거는 책의 앞장에 등장해 A가 X에게 보낸 이 편지 뭉치들이 발견된 경위에 대해 자세히 밝힌다. 즉, 존 버거의 말에 의하면 어느 폐쇄된 교도소의 73호 감방에서 지낸 마지막 수감자의 편지 뭉치가 밝힐 수 없는 경로로 자신에게 입수되었는데, 시간 순서가 뒤엉킨 이 편지들을 소유자의 편집 순서 그대로 묶어 소설로 출판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총 세 뭉치로 나뉘어진 편지들은 존 버거가 편지뭉치 하나 씩을 열 때에 다시 등장해 편지를 감싼 천의 상태, 거기에 적힌 글씨의 번짐같은 것들을 설명하는 것을 제외하면 편집 없이 거의 그대로 이 소설의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이 기묘한 구성과 편집 방식은, 이 소설이 실화일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암시함과 동시에 현실과 가상의 모호한 경계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메타 픽션적인 성향이 있지만, 존 버거는 ‘이것은 픽션이며 가상의 이야기입니다‘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고 ‘이것은 제가 발견한 편지 뭉치들이며 그것을 소설로 편집하여 묶어낸 것입니다‘하는 자세를 취함과 동시에 ‘종종 제게 이 편지의 내용이 실화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의 실제 여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힘으로써 더욱 이 소설만의 독특한 지점을 창조해낸다. 사실 존 버거의 말처럼,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편지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소설을 모두 읽고 난 뒤에 우리는 A와 X라는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그들만의 특수한 사연들인 동시에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단일한 존재 저마다의 보편적인 이야기임을 알 수 있게 되니까. 그러니까, 결국엔 이것은 그리움의 기록인 동시에 사랑과 인내에 대한 노래이며 치밀하고 저돌적으로 진행되는 세계화-신자유주의-에 보내는 저항과 반동의 움직임인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를 전형적인 소설 작법이 아닌 내밀한 개인의 사적인 기록들, 그것도 일방적으로 한쪽에서 한쪽으로 전해진 편지들로만 구성하여 보여주었다는 점이 이 소설의 가장 탁월한 지점이다.

2.
(존 버거는 이 편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실명이 아님을 밝힌다) 편지의 작성자인 아이다는, 자신의 연인 사비에에게 대답을 들을 수 없는 편지들을 계속해서 써내려간다. 사비에는 사회운동을 하다 이중종신형을 선고받은 기술자로, 이 소설 속에서 사비에의 글은 아이다의 편지 뒷장 여백에 메모해둔 그의 짧은 낙서들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사비에가 아이다에게 보낸 편지들도 분명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들은 이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아이다가 사비에에게 보낸 편지들만이 이곳에 묶여져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중종신형은, 종신형을 두 번 중첩하여 집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감기간 중 한 번의 감형이 인정되더라도, 나머지 하나의 종신형이 남아있기에 그에게 주어진 희망의 두께는 종잇장처럼 얇은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아이다의 편지는, 내내 두터운 밀도의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만날 수 없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의 슬픔과 절망과 고통, 하지만 잃을 수 없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들이 편지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하지만 정말로 내게 가슴 저리게 다가온 것은, 이곳에 보여지지 않은 사비에의 감정들이다.

사비에가 아이다에게 보낸 편지는, 앞서 말했듯이 이곳에 수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비에는 아이다의 편지 뒷장에(아이다는 결코 양면으로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때그때 떠오른 짤막한 이야기들, 세계에서 들려오는 소식들, 자신이 기억해둔 격언들 등을 적어두었고, 그것은 존 버거에 의해 아이다의 편지들 뒤에 고딕체로 분간하여 따로 기록되었다. 그곳에서 사비에는, 아이다에 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하다. 아이다에게 보내는 이야기들은 모두 아이다에게 부쳐졌을 것이므로, 그곳에는 아이다와는 관련 없는 다른 이야기들이 적혀 있겠지. 하지만 그곳에 적힌 건조하고 담담한 문장들을 읽노라면, 어쩐지 감정 과잉의 아이다의 문장들에서보다 형체가 없기에 짐작조차 하기 힘든 사비에의 감정들이 선명히 읽히곤 하는 것이다.

조세희의 침묵에 뿌리에는, ‘감옥에 갇히는 것은 곧 사랑하는 모든 사람과 헤어져 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갇힌 사람에게는 하루가 50일 같다고 한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사비에가 출구 없는 이중종신형 수감자로서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 절망과 고통 같은 것들은 이 소설 전반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읽히는 것은, 사회운동가로서 그의 문제의식과 강철과도 같은 그의 의지력이다. 그의 글들에는 무력감이나 좌절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읽히는 것은 사회구조에 대한 분노와 의지를 관철시킬 강력한 신념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그 뒷편에 숨어있는 그리움. 그 그리움이 읽히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지,

˝탈 지역화. 단순히 노동력이 가장 싼 곳을 찾아 생산과 서비스가 이동하는 것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자리잡은 지역들을 파괴해 전 세계가 무의미한 곳, 즉 단 하나의 유동성 시장이 되게 하려는 계획을 뜻한다.˝

와 같은 문장들을 읽어도 사비에가 아이다에게 느끼는 그리움의 감정이 읽히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이 소설 전체에 독자들이 강하게 자신을 이입할 수 있도록 의도한 존 버거의 편집 덕분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내가 가장 가까웠던 어떤 소중한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사람의 이야기에서 역시 고통과 좌절의 시기를 겪은 한 사람의 기록이 등장한다. 그 기록에는 그의 감정에 대한 묘사는 전혀 없었고, 가계부와 같은 현실적인 기록들만 빼곡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 건조한 문장들 사이에서, 내게 소중했던 그이는 불가해한 깊은 슬픔을 느꼈다고. 때론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않을 때에 온전히 전해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지점에 문학의 본질이 있을지도.

3.
아이다가 보낸 소식들에는 다양한 사연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시간의 간극은 아무리 좁게 잡아도 2년을 초과한다.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아이다는 만날 수 없는 자신의 연인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쓴다. 그 안에는 ‘그들‘의 억압, 동료의 죽음, 연대와 죽음에의 초극같은 것들이 담겨 있는 동시에 지극한 그리움이 함께 담긴다. 하지만 그들이 저항하는 탈지역화-세계화에 대한 본질을 생각한다면, 아이다와 사비에가 겪은 슬픔이 결코 그들만의 특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동시에 특수한 사건들에 다름 아니며, 그들의 사랑 역시 내게도, 당신에게도 존재했던 내밀한 개인적 사건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들 사이에 인물들의 감정을 밀도있게 넣어두고, 시대에 대한 통찰과 문제의식을 고르게 전달하는 이 소설이 강력하게 마음을 울렸다. 좋아서 메모해둔 내용들은 책갈피라는 이름으로 따로 적어두었다. 앞으로도 내 핸드폰 속의 책갈피들을 따로 올려두려 한다. 좋은 책들은 책갈피가 빼곡하다. 이 소설이 그랬다.


+ 가장 슬픈 장면은, 아이다가 거대한 사건이 아닌 사소한 일에 절망했을 때에 등장한다. 부러진 의자를 혼자 힘으로 고쳐낸 뒤, 반듯하게 선 의자를 바라보며 갑자기 눈물을 터뜨린 자신의 이야기를 말한다.
˝ 왜 눈물이 났던 걸까. 의자를 고치는 건 이렇게 쉬운데 나머지 일들은 너무 어려워서? 아니면 이젠 의자 고치는 일 같든 걸 당신에게 부탁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당신에게!
우리를 두렵게 하는 건 작은 일이에요. 우리를 죽일 수도 있는 거대한 일은, 오히려 우리를 용감하게 만들어주죠.˝ ..91p
이 장면에서 깊이 공감되는 것은 내 의지가 통하지 않는 사소한 지점에서 드러나는 무력감과 절망감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좋아하는 드라마인 ‘연애시대‘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피클 뚜껑을 열려는 데 뻑뻑하여 열리지 않자 피클 병을 집어 던지며 울음을 터뜨리던 은호. 산산조각난 피클병와 터져나온 피클들 사이에서 눈물을 흘리며, 왜 이것 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느냐고 소리지르던 은호의 모습을 떠올린다. 우리 인생에도 그런 장면들이 있지. 엄청난 그리움이나 고통 속에서 의연하다가도, 우리를 손쉽게 무너트리는 사소하고 보잘 것 없는 아주 작은 사건들이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아주 무력하게 무너지기도 하는 것이다. 가장 슬픈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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