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사장의 책 ‘열한 계단‘은 자신을 일깨운 도서의 목록에서 출발한 자서전과 같은 책이다. 그 책에서 채사장은 자신을 일깨워 뒤흔드는 책들이 우리 인생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나에게 만일 그런 도서의 목록을 말하라면 얼마나 많은 계단을 올려 세울 수 있을까. 사실 책을 그리 많이 읽지 않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 스스로가 뒤흔들릴 정도의 충격을 준 책의 목록은 그리 길지 않을 것 같다.

다만 가장 최근의 계단을 말하자면 단연 조세희의 이 산문집, ‘침묵의 뿌리‘를 말해야 할 것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그의 다른 책을 읽어본 바 없었으나, 네시이십분 라디오에서 인상깊게 들었던 책이라 꼭 읽어보고 싶었다. 바로 책을 주문하려 찾아봤지만 절판이었고, 중고가는 원래 판본의 두 배가 넘게 형성되어 있었다. 결국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며칠에 걸쳐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책에 담겨있는 치열한 고민과 성찰의 흔적과는 다르게, 조세희는 아주 쉽고 다정한 문체로 글을 써내려갔으므로 읽기 어렵지 않다.

이 책은 조세희가 1980년대 초반, 강원도 정선에 있는 사북읍이라는 작은 마을을 수차례 방문하며 써내려간 수필과 그 기간에 탈고한 소설, 그리고 그와 관련되어 조세희가 청탁해 받은 몇 편의 원고를 함께 묶은 사진-산문집이다. 나는 사북이라는 곳에서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부끄럽게도 전혀 몰랐다. 1980년 사북에서는 어떤 사건이 있었다. 지금은 민주화 운동으로 복권된 그 사건은, 당시에는 폭동 내지는 난동으로 규정되어 관련자들이 형사입건되어 처벌받은 바 있다. 우리 역사에 무지한 나지만, 군사정권을 견디는 동안 숱한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다른 이름으로 호명되고 사법적인 무력에 의해 폭행당했던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북사태 역시 같은 맥락에서의 운동이었으며, 다르게 호명된 사건이었다.

조세희는 사북을 부러 찾아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을 기록하고 사진찍어 책으로 남기길 바랐다. 그리고 당시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깊은 고민이 이 책에 그들의 삶과 함께 치열하게 적혀 있다. 80년대를 맞으며 급속하게 발전했던 세계 기술사의 변천과, 우리 기술을 갖지 못한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의 아쉬움이 먼저 나열된다. 그는 자신이 과학기술에 무지하다고 자각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 현대 과학의 흐름과 기술발전에 대해 공부한 사실들을 덤덤히 말한다. 그리고 그런 기술 발전으로 인해 우리 경제가 나아지고 있지만, 수백 수천억을 들여 다른 나라의 기술을 사와야만 하는 나라의 기술력을 걱정한다. 하지만 더욱 고민하는 것은 기술과 경제발전과는 다르게 흘려가는 노동자의 삶에 대한 문제다. 기술은 발전하고 경제는 호황임에도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해진다. 가진자는 개인 소득을 일 년에 수백억을 번다고 지적하는 부분은, 그로부터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 읽으면 더욱 소름끼치지 아니할 수 없다. 조세희는 한 개인이 수백억을 벌어들인 부분에서 충격받았지만, 삼십 년 뒤에는 그런 개인이 그로부터 수십배의 더 큰 소득을 벌어들이는 시대가 되어버렸으므로. 그리고 그런 사실이 지금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우므로. 아무도(적어도 사회 자체는) 그 소득격차를 지적하지 않으며, 그 자본가의 이익이 정당하다고 믿는다. 조세희의 이 책으로부터 우리는 한치도 진보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를 지배하는 기득권의 사회구조는 더욱 치밀하고 교묘하게 작동 방식을 발전시켜왔다.

“어려운 나라의 지도 계층이 언제나 숨기려고 하는 것은 다수의 국민이 처해 있는 가난이다. 그들은 빛이 가득찬 세계만 보여준다. ..중략.. 당시의 미국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났다. 경제학자가 사진가를 동원했다. 자기 시대의 기분을 이해한 사진작가들이 비참한 국민생활을 기록하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나갔다. 내가 알기로, 어려운 저희 국민의 생활상을 찍어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거두어들인 세금을 쓴 나라는 당시의 미국밖에 없다. “(..28p)

인상적인 부분은, 감옥 간 조세희의 친구에 대한 이야기에 소설 어린왕자의 주인공을 출연시켜 연출한 에세이다. 감옥에 갇힌 조세희의 친구는 긴 독방 생활 끝에 결국 울었다. 어떤 이유에서 그가 감옥에 갔는지는 설명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그 어떤 누구라도 감옥에 갈 수 있었으므로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감옥에 간 그의 앞에 어린왕자가 등장해 그를 위로한다. 그는 자신이 감옥에 있으므로 형이 일해야만 하는데, 형은 일하다가 가슴에 큰 멍이 들어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감옥에 있는 동안 돌아가셨는데 찾아뵙지도 못했다. 형과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울고 있노라고 말한다. 어린왕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를 위로하며, 독방의 높은 창살 앞에서 인사하곤 사라진다. 그것은 분명 이치에 안 닿는 일이었지만, 그 일이 내 친구를 위로했고 친구는 다시는 울지 않았다고 조세희는 말한다.

나는 이 짧은 에세이가 다소 환상적으로 느껴져 좋았다. 누군가의 슬픔을, 그것도 자신이 아닌 타인의 슬픔을, 그 연유를 절절하게 설명하지 않고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지식인이면서도 소설을 쓰는 문학가의 입장에서 그는 그가 쓸 수 있는 방식으로 친구의 슬픔을 사회적 폭력과 연결시켜 다정하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그의 따듯한 마음이 전해져 오는 부분이다.

“감옥에 갇히는 것은 곧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헤어져 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갇힌 사람에게는 하루가 50일 같다고 한다. 독방에서의 하루는 100일 같다. 내 친구는 독방 생활을 하고 있었다.
독방 생활이 47일이나 계속되던 날, 내 친구는 외롭고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독방에서의 하루가 100일에 해당하니까 내 친구가 그 방에 갇혀 보낸 47일을 바깐 세상의 시간으로 바꾸어 놓으면 12년 10개월 6일이 된다. 인내에도 한계가 있어서 내 친구는 울었다. “(..33p)

가장 슬픈 부분은, 단연 사북의 한 광부의 집에서 며칠을 내리 조세희가 끌어안고 읽었다는 사북 어린이들의 수필집에서 발췌한 문장들이 등장할 때다. 나는 그것들을 읽어가며 울컥하는 슬픔과 아픔같은 것들을 견뎌야만 했다. 도저히 가만 앉아 볼 수가 없어 대학교의 햇빛 가득한 학생휴게실의 책상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읽었다. 마음이 뜨거웠다. 내가 모르는 세계, 내 시선과 발길이 닿지 않았던 풍경이 세대를 걸쳐 펼쳐진다. 나는 그 아픈 생채기와 흉터 앞에서 할 수 있는 가능한 일을 찾아보지만, 어느것도 여의치 않다. 조세희는 그런 감정에서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사진기를 들고 그 작은 마을로 나섰다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어린이들의 이야기가 지금에는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 사북의 어린이들은 이름을 바꾸고 고통의 형태를 바꿔 지금도 내 시선과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이런 문장들을 적어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향해본 적 없는 그 시선과 발길의 책임은 오로지 나에게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끄럽고 슬프다.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를 흔들어 일깨운 지식이라고 말하기엔, 내가 얻은 것이라곤 지식이 아니라 부끄러움과 황망한 죄책감 뿐이다. 이 책은 그런 죄책감, 그러니까 죄에 대한 에세이가 된다. 조세희가 느낀 부채감과 죄책감이 그를 움직여서 이 책을 낳게 만들었다. 그 산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사진기를 들고 어디를 가던지 언제나 죄를 느꼈다. 자신의 죄, 사회의 죄, 그리고 모두에게 그럴듯한 알리바이가 있지만 모두에게 있다고 해서 모두가 무죄인 것은 아니라는 명징한 사실에 대해 말한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그 땅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혹은 계속해서 이 자리 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다른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이 책으로부터 20년, 우리는 아마 역사상 가장 수다스러운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조세희가 말한 침묵의 뿌리는 여전히 단단히 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침묵하고 눈감은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슬픔들을 다시 전한다.


<좋은 하느님>
나는 어떤 때 매를 맞는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하늘을 보며 ˝나는 죽고 싶어요, 죽여주세요 하느님˝하며 운다. -5학년 도미숙 (..43p)

<우리집>
우리집은 방이 너무 좁다. 그래서 나는 잠을 편하게 못 잔다. 그리고 내 동생이 한 명 있는데, 내 동생은 잠을 아주 이상하게 잔다. 내 배에다가 다리를 올려 놓거나 아니면 우리 엄마 가슴 위에서 엎드려 잔다. 그래서 나는 아빠보고 방이 넓은 데로 이사를 가자고 그러면, 아빠는 자꾸 1년만 더 살고 가자고 하신다. 엄마한테도 그러면 엄마는 또 아빠하고 다르다. 엄마는 3년만 더 살고 가자고 하신다. -2학년 정혜영 (..44p)

<가장 슬픈 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며칠 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중풍에 걸려서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간경화증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와 할머니가 보고 싶다. -6학년 김은주 (..48p)

<아픈 이야기>
우리 어머니는 숨을 잘 못 쉰다. 그래서 내가 밥을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나왔다. 나는 어머니에게 ˝제가 할께요˝하고 말하였다. 어머니가 ˝그래, 그럼 자 해라˝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1학년 송미경 (..49p)

<하늘 나라>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너무 갑갑하다.
나는 하늘 나라에 가고 싶다.
하늘 나라는 어떻게 생겼을까. 하늘 나라에는 사람이 살고 있을까. 사람이 산다면 어떻게들 살고 있을까. -5학년 이순자(..55p)


마지막으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써둔다. 가슴을 둔중하게 때리는 책이다. 앞으로도 아껴가며 몇 번을 더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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