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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여행산문집
이병률 지음 / 달 / 2012년 7월
평점 :
좋아하는 이병률 작가의 여행산문집...
'끌림'에 이어 두번째 책이 나왔다.
풍부한 사진과 여행하면서 적어나간 글들...
작가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물씬 풍기는 글귀들이 많다.
여행이 미치도록 그립다...ㅡㅡ;;
4#......창문을 열면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 동네 사람들이 내는 소음, 금 간 창문 아래로 보이는 낮은 학교 담장, 자취생들이 널어놓은 것 같은 흰 빨래 위로 내려 앉던 햇살들, 그리고 소녀들의 합창 - 나는 이 장면을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기만 하여도 저절로 눈이 감겨지는 이 장면들을 나는 어쩌면 끝까지 가지고 가리라. 그렇게 나는 열일곱과 열여덟, 필름 같은 소년의 껍질을 벗고 있었다.
5#.....사람이 사람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건 사랑이 어디론가 숨어버려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걸 만지고 싶어서일 텐데. 그걸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그냥 만지고 싶은 걸 텐데. 갖자는 것도, 삼켜버리는 것도 아닌, 그냥 만지고 싶은 것.
10#.....사랑하기에는 조금 가난한 것이 낫고 사랑하기에는 오늘이 다 가기 전이 좋다.
35#.....정말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를, 어쩌면 그토록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버둥거립니다.
당신이 잘 지내고 있다면 나 지금부터라도 잘 지낼까 합니다. 그런데 나, 어떻게 잘 지낼 수 있을까요. 이렇게 못났고 마음도 엉망인데.
37#.....네가 떠난 창가 자리에, 누군가 젓가락 커버를 접어 학 한 마리를 올려놓았다. 그것은 듬직하게 너의 빈자리를 지켰다. 산 너머의 바다가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것 같았는데 실은 창밖에 흰 눈이 내리는 거였다. 눈은 내렸지만 내 가슴은 가시가 박혔는데도 터지지 않았다. 혹시 심장을 꺼내 볼 수 있다면 우리들 심장은 보라색이 아닐까? 우리들 가슴 안쪽에 든 멍이 모두 심장으로 몰려가서 보라가 되었다면.
사랑에 미쳐보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보라색을 볼 수 없을 거란 생각을 한다. 만약 누구든 그 찬란했던 기억을 보관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고체이든 액체이든 혹은 기체일지라도 그것은 보라빛일 거란 생각을 한다.
52#.....세상 끝 어딘가에 사랑이 있어 전속력으로 갔다가 사랑을 거두고 다시 세상의 끝으로 돌아오느라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 : 우리는 그것을 이별이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하나에 모든 힘을 다 소진했을 때 그것을 또한 사랑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