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망가져 있다 ㅣ 알면 잠 못 드는 위험한 인문학 2
다크모드 지음 / 모티브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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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검정 바탕에 형광에 가까운 파랑 하나로만 그려진 표지입니다. 머리를 감싸 쥔 사람, 쓰러진 술병, 알람시계, 유령, 위태롭게 쌓아 올린 머그잔, 알약, 3D 안경, 777이 걸린 슬롯머신. 어두운 소재를 다루는 책치고 디자인은 오히려 경쾌한 쪽으로 밀어붙였고, 그 온도차가 이 책의 태도를 먼저 알려주는 듯했어요. 아래쪽 띠지에는 "인류는 단 한 번도 완벽한 적이 없었다."라는 문장이 큼직하게 박혀 있습니다. 지식 유튜브 채널 〈다크모드〉의 두 번째 책 <알면 잠 못 드는 위험한 인문학 2 : 우리는 모두 망가져 있다>는 그 선언을 스무 편의 이야기로 밀고 나갑니다.


책을 펼치면 인상이 또 달라집니다. 각 장 앞에는 고전 문헌처럼 장식 선을 두른 속표지가 놓여 있고, 파트마다 색이 바뀝니다. 잠 파트는 회색, 기억 파트는 짙은 자주빛, 치료 파트는 먹빛에 가까운 청록. 겉은 팝하게, 속은 단정하게 눌러둔 설계라 읽는 리듬이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첫 파트에서 오래 붙들린 대목은 다섯 번째 장이었습니다. 시작이 정보가 아니라 장면이에요. 새벽 3시, 특별한 일도 없었는데 잠이 깹니다. 다시 자려고 눈을 감아보지만 정신은 점점 또렷해지고, 폰을 켜서 3시 12분을 확인하고, 알람까지 두 시간 남았다는 계산이 시작됩니다. 나 불면증인가, 이러다 내일 종일 피곤하겠지.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걱정이, 다시 잠드는 걸 막는다."


여기서부터 역사학자 로저 에키르치의 작업이 따라 나옵니다. 옛 일기와 법정 기록, 의학책, 호메로스와 초서, 디킨스의 소설에까지 '첫 잠'과 '둘째 잠'이라는 표현이 툭툭 등장하는데 누구도 그 뜻을 따로 설명하지 않더라는 겁니다. 20년에 걸쳐 모은 기록이 500건을 넘었고, 거기서 하나의 그림이 떠올랐어요. 해가 지고 두어 시간 뒤 첫 잠을 자고, 한밤중에 한두 시간 깨어 있다가, 다시 둘째 잠을 자고 동틀 무렵 일어나는 방식입니다. 중요한 건 그 중간의 시간을 사람들이 어떻게 여겼느냐인데, 아무도 그걸 곧장 불면증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하고, 옆에 누운 사람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이웃집에 다녀오기도 했다고 해요. 시계가 아니라 그날 할 일이 남았는지가 잠드는 때를 정했다는 문장에서, 잠이라는 게 관리 대상이 되기 전에는 이런 얼굴이었겠구나 싶었습니다.


가로등이 깔리고 밤에 문 여는 가게가 생기면서 밤은 어둠에 잠겨 보내는 시간이 아니게 됐고, 산업화가 겹치자 침대에 오래 누워 있는 일이 낭비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두 토막이던 잠이 하나로 압축됐다는 설명이 이어져요. 1990년대 토머스 웨어의 실험도 흥미롭습니다. 사람들을 매일 밤 14시간 어둠 속에 두자 4시간 자고 한두 시간 깨어 있다가 다시 4시간 자는 형태로 잠이 갈라졌고, 한밤중에 깨어 있는 그 시간에 사람들은 불안해하기는커녕 평온했다고 합니다.


이 장이 마음에 든 건 저자가 여기서 브레이크를 걸었기 때문입니다. 전기 없이 사는 일부 부족은 지금 우리처럼 한 번에 쭉 자기도 하니 두 번 자는 패턴을 인류 보편으로 볼 수는 없다고 스스로 못을 박아요. 남는 결론은 딱 하나, 8시간 통잠이 생각만큼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한밤중에 자꾸 깨는 사람에게 그게 자연스러운 패턴일 수도 있다고 알려주는 것만으로 불안이 줄어든다는 연구자들의 말로 장을 닫습니다. 고쳐야 할 고장이라 여기던 것을 그냥 밤의 한 부분으로 옮겨놓는 일. 지식으로 위로한다는 게 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어요.


2부를 닫는 자리에는 클라이브 웨어링의 이야기가 놓입니다. 1985년, 르네상스 음악을 연구하던 음악가이자 지휘자였던 그는 헤르페스 바이러스가 일으킨 뇌염으로 기억 관련 부위에 큰 손상을 입습니다. 그 뒤로 기억이 7초에서 30초밖에 이어지지 않았어요. 그는 매 순간 자신이 방금 혼수상태에서 처음 깨어났다고 믿었고, 일기에 몇 분 간격으로 처음으로 깨어났다고 적고 조금 뒤에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깨어났다고 다시 적었습니다. 몇 분 전 자신이 쓴 문장을 남이 써놓은 말처럼 보았다는 서술에서 숨이 조금 막혔습니다.


그런데 남은 것이 있었습니다. 아내 데버라는 알아봤어요. 그녀가 잠깐 방을 나갔다 몇 분 뒤 돌아와도 매번 크게 반가워하며 일어나 다가갔고, 오래 떨어져 있다 다시 만난 사람처럼 끌어안았다고 합니다. "조금 전에 같은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데버라가 낯선 사람은 아니었다." 다른 하나는 음악이었습니다. 음악을 들은 적도 없다고 말하던 사람이 피아노 앞에서는 망설이지 않았고, 복잡한 곡을 연주하고 악보를 읽고 합창을 지휘했습니다. 연주가 끝나면 자신이 방금 피아노를 쳤다는 사실은 잊었지만요. 기억이 무너져도 사람 안에 끝까지 버티는 층이 있다는 것, 그게 이 장이 남긴 이상한 안도였습니다.


마지막 장은 결이 다릅니다. 1840년대 빈의 병원에서 의사 병동의 산욕열 사망률이 산파 병동보다 훨씬 높았고, 산모들은 이미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제발 산파 병동에 넣어달라고 빌었고, 어떤 이들은 병원에서 낳느니 길에서 아이를 낳고 들어오는 쪽을 택했습니다. 이그나츠 제멜바이스가 알아낸 답은 의사들의 손이었어요. 부검을 마친 손으로 곧장 분만실에 들어가던 관행. 염화석회 물로 손을 씻자 10퍼센트를 넘던 사망률이 몇 달 사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의학계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저자가 그 거부를 악의로만 그리지 않는 점이 좋았어요. 제멜바이스가 발견을 제때 논문으로 정리하지 못했고 원리를 설명하지 못했으며 비판에 답하는 데 서툴렀다는 사실을 먼저 짚습니다. 그러고 나서 진짜 이유를 꺼내요. 손을 씻자는 제안을 받아들이는 일은 그동안 씻지 않은 손으로 산모들에게 병을 옮겼을 수 있다는 결론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는 것. 살리려던 사람들이 죽음의 통로가 되었을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요. 어떤 치료가 효과 없었다고 인정하는 것과 제가 환자를 해쳤을지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은 무게가 전혀 다르고, 후자는 자기 자신을 향한 판결처럼 느껴진다고 책은 말합니다. 그리고 "이건 몇몇 사람의 못난 성격이 아니다."라고 덧붙여요. 조직에서 오래 일해본 사람이라면 이 문장 앞에서 몇 장면쯤 떠올릴 겁니다. 제멜바이스는 마흔일곱에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2주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사례 하나하나의 힘이 워낙 세다 보니, 몇몇 장에서는 마무리의 위로가 조금 급하게 붙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인간은 불완전하니 자신을 너무 몰아세우지 말자는 결론이 반복되면서, 정작 그 불완전함을 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독자에게 공을 넘기는 쪽에 가깝습니다. 유튜브 콘텐츠를 확장한 책이라는 태생상 어쩔 수 없는 호흡이겠지만, 서너 편쯤은 더 밀고 들어가도 좋았겠다 싶었습니다. 물론 그 짧은 호흡 덕에 잠들기 전 한 편씩 읽어 나가기에는 최적이기도 하고요.


이번 책은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받았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권을 읽다 보면 좋은 문장을 모으는 일에 익숙해지는데, 이 도서는 좀 달랐어요. 밑줄보다 확인에 가까웠습니다. 잘 자지 못하는 것도, 기억이 흐릿해지는 것도, 잘못을 인정하기 어려워하는 것도 제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이 오래 안고 온 조건이라는 확인.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흔한 위로보다, 애초에 완벽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사례로 들이미는 방식이 훨씬 든든하게 다가왔습니다.


열대야가 이어지는 계절입니다. 새벽에 눈이 떠져 다시 잠들지 못하는 밤이 유난히 많아지는 때죠. 그런 밤에 이 책의 첫 파트를 읽으면, 뒤척이는 시간을 조금 덜 미워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읽기 좋은 책이 잠에 관한 책이라는 게 이 여름의 작은 아이러니 같습니다.


인간의 오작동을 낱낱이 꺼내 보이면서, 결국 스스로를 덜 미워하게 만드는 위험하고 다정한 교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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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법정 스님의 무소유 잠언집 - 스페셜 아포리즘, 법정 스님이 옮긴 <진리의 말씀> 법구 108경 수록
김세중 편저 / 스타북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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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받고 나서 가장 오래 들여다본 건 표지 아래쪽 사진이었습니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스님이 한 손을 살짝 들어 무언가를 설명하시는 중인데, 정면을 응시하는 근엄한 초상이었다면 책장을 열기 전부터 마음이 조금 굳었을 것 같아요. 말씀을 건네는 도중에 찍힌 얼굴이라 그런지 옆에 앉아 들어보고 싶어집니다. 위쪽을 채운 연둣빛 세로 줄무늬는 절집 창호에 아침 빛이 스민 것처럼 보이고요. 요란한 장식 없이 제목 글자만 굵게 세워둔 구성도 책의 주제와 어긋나지 않습니다.



<성철·법정 스님의 무소유 잠언집>은 김세중 편저로 스타북스에서 나온 완전개정증보판입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성철 스님의 무심을 두 축으로 삼고, 무소유·인연·침묵·명상·마음·지혜·자유·사랑·행복·무소유의 삶이라는 열 갈래 주제 아래 짧은 글들을 묶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가는 책이라기보다 아무 데나 펼쳐 한 편씩 읽으라고 만든 책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읽었고, 그 방식이 이 도서에는 잘 맞았습니다.

인연을 다룬 장에 '만남은 스침과 다릅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대단한 인연이라는 말을 우리가 얼마나 가볍게 쓰는지 짚으면서, 정작 출퇴근길에 어깨가 부딪히면 표정부터 굳어지고 먼저 고개 숙여 사과하는 사람을 보기 어려워졌다고 적어두었더군요. 스침의 값어치를 먼지처럼 날려 보내면서도, 사적인 끈이 하나 이어지는 순간 태도가 확 달라지는 우리 모습을 꽤 정확하게 그려냅니다. 이어서 길상사 개원 법회에 김수환 추기경을 모셔 축사를 청했던 일과, 명동성당에 법정 스님이 특별 강사로 서셨던 일이 나란히 놓입니다.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도 이렇게 한자리에 놓고 보니 다시 마음이 조용해집니다.



이 장에서 남는 그림은 성문입니다. 제 잣대로 섣불리 선을 그으면 마음의 성문이 닫히고, 굳게 닫힌 성채 안에는 귀한 손님이 들어올 수 없으며 고독의 먼지만 쌓인다고 써두었어요. 문을 열어두면 손해를 볼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맑은 바람이 오가며 탁한 공기를 씻어낸다는 대목까지 읽고 나면, 관계를 정리하는 일에 익숙해진 나이라는 게 어떤 뜻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장 앞머리에는 절대적인 선연도 절대적인 악연도 없다는 경전 구절이 놓여 있는데, 이 한 줄이 뒤따르는 글 전체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침묵을 다룬 장은 결이 다릅니다. 소중한 생각일수록 값싼 말로 꺼내지 말라면서 "침묵의 봉인 속에 가두어 두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합니다"라고 적어놓았어요. 진실의 힘은 구걸하듯 설명하지 않아도 언젠가 상대에게 가닿는 필연성에 있다는 이야기도 함께 나옵니다. 하루의 대부분을 설명하고 해명하고 설득하는 데 쓰는 사람에게는 방향이 반대로 놓인 문장입니다. 이 장 앞머리에 실린 경전 구절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남에게 충고할 때 때를 가려 말할 것, 진심으로 하되 거짓되게 하지 말 것, 부드러운 말씨를 쓸 것, 의미 있는 일에 대해서만 말할 것, 인자한 마음으로 말할 것. 말을 아예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조건을 갖춘 말만 하라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같은 장 앞부분에서 걸리는 대목이 하나 있었어요. 말썽을 부린 아이에게 부모가 아무 말 없이 서글픈 눈빛으로 침묵을 지키면 아이가 매를 맞을 때보다 훨씬 큰 불안을 느낀다며 이를 침묵의 교육 효과로 소개하는 부분입니다. 침묵이 아이를 위축시키는 방식으로 쓰이면 그건 다른 종류의 벌이 되고, 요즘 양육 상담에서도 권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부모의 침묵이 힘을 갖는 순간은 아이가 두려울 때가 아니라 이미 신뢰가 쌓여 있을 때겠지요. 앞머리의 경전 구절이 말하는 인자한 마음과도 결이 조금 어긋나 보였습니다. 침묵의 미덕과 침묵의 위력을 같은 것으로 묶어 설명한 셈인데, 이 둘은 나누어 읽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혜를 다룬 장에서는 성철 스님 쪽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옵니다. 제자들에게 목숨 걸고 지키라 하셨다는 다섯 계율이 실려 있는데, 그중 머리 지식으로 남을 속이려 드는 조사어록이나 책을 함부로 보지 말라는 항목 앞에서는 책을 읽고 감상을 적는 처지가 조금 머쓱해지더군요. 백련암을 찾아온 이들에게 삼천배를 하고 오라 하셨다는 일화도, 권위를 세우려는 뜻이 아니라 남이 대신 져줄 수 없는 짐을 제 땀으로 덜어내게 하려는 방편이었다고 풀어냅니다. 장 앞머리에 놓인 법구경 구절은 "멀리 있어도 높은 산의 눈처럼 도를 가까이하면 이름이 나타나고 가까이 있어도 밤에 쏜 화살처럼 도를 멀리하면 나타나지 않나니"인데,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라는 뜻으로 읽혔습니다.



다만 이 장에서 억울함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제시한 두 가지 경우의 수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었습니다. 겉보기에 노력이 같아 보여도 상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애썼거나, 아직 결과가 드러날 때가 오지 않았거나. 두 갈래로 정리하면서 평가 자체가 공정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열어두지 않아요. 인사권자가 숨은 내공을 정확히 알아본 것이라는 전제도 조직에서 늘 성립하지는 않습니다. 이 구도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부당한 결과 앞에서도 원인을 자기 안에서만 찾게 되는데, 그건 겸손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일 겁니다. 마음을 다스리라는 권유와 상황을 정확히 보라는 요구는 나란히 갈 수 있으니까요.

세 장을 이어 읽다 보면 재미있는 배치가 보입니다. 인연을 말하는 자리에서는 성문을 열라 하고, 침묵을 말하는 자리에서는 입을 닫으라 하고, 지혜를 말하는 자리에서는 다시 귀를 열라 합니다. 열고 닫는 지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 이 책이 말하는 비움의 실제 모양에 가깝지 싶어요. 무조건 놓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놓고 어디를 붙들지 가려내는 일이겠지요.

책 끝자락에는 법정 스님이 옮긴 진리의 말씀 가운데 백여덟 편을 골라 실은 스페셜 아포리즘이 붙어 있습니다. 앞쪽 본문이 설명을 넉넉하게 붙인 문장들이라면 이쪽은 군더더기가 거의 없어서, 호흡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이번 개정증보판에서 가장 값진 자리라고 느꼈어요. 문장이 짧아지니 읽는 속도가 저절로 느려지더군요.



이 책은 북유럽 카페를 통해 서평단으로 받았습니다. 서평단으로 받는 책들은 대개 마감이 있고 그래서 읽는 속도에 어느 정도 압박이 붙기 마련인데, 이 도서는 그렇게 읽으면 손해라는 걸 며칠 만에 알았습니다. 밑줄을 긋고 정리하려 들수록 문장이 미끄러졌고, 아침에 한 편 저녁에 한 편 정도로 속도를 줄이니 비로소 자리를 잡았어요. 서평단 활동을 이어오면서 읽는 방식 자체를 바꾸게 한 책은 흔치 않았습니다.

문장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편저자의 서술이 전반적으로 수식이 강합니다. 위대한, 거룩한, 찬란한 같은 형용사가 자주 등장해서 담백한 잠언집을 기대하고 펼치면 톤이 다르게 느껴질 수 있어요. 반대로 말하면 두 스님의 말씀만 덩그러니 놓고 읽기 부담스러운 사람에게는 안내자 역할을 해주는 셈입니다.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걸리는 지점이 거의 없고, 요즘 흔한 비움이나 미니멀리즘 이야기가 정리 정돈의 기술로만 소비되는 게 아쉬웠다면 이 한 권이 그 말의 뿌리를 짚어줄 겁니다. 종교의 벽을 넘어선 만남들이 여러 대목에 실려 있는 것도 이 책을 넉넉하게 만들어주고요.

장마가 물러가고 매미 소리가 하루 종일 이어지는 계절입니다. 더울수록 짐은 줄여야 하는데 마음에 얹힌 것들은 계절과 상관없이 그대로 남아 있지요. 이 책을 읽는 동안 무언가를 크게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무엇을 붙들고 있었는지 정도는 알아차렸어요. 여름이 다 가기 전에 그중 하나쯤은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우라고 다그치지 않고, 무엇을 붙들고 있었는지부터 알아차리게 해주는 잠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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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겠는가 ㅣ 고전부적 1
이방원 지음 / 흑막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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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책등이 얇길래 가볍게 훑고 말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가 문제였어요. 얇은 두께에 비해 남은 무게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겠는가>는 조선 제3대 국왕 태종 이방원의 통치 철학을 오늘의 언어로 옮겨온 책입니다. 손바닥에 들어오는 판형이라 어디서든 펼치기 좋았고, 문장은 짧고 단단해서 진도는 수월하게 나갔습니다.


표지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네요. 노란 바탕 위에 붉은 선으로 그려진 임금의 얼굴, 곤룡포 가슴을 감아 도는 용 문양, 그리고 '古典符籍'이라는 시리즈명. 부적이라는 발상이 재미있었습니다. 예로부터 부적은 불안한 사람이 품에 지니는 물건이었으니까요. 흔들리는 사람더러 이 책을 부적처럼 지녀보라는 뜻으로 읽혔습니다.


솔직히 목차만 훑었을 때는 조금 세다 싶었습니다. 자비를 베어라, 관계를 숙청하라, 판을 엎어라 같은 말들이 줄지어 있어서요. 그런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면 결이 다릅니다. 이 책이 겨냥하는 건 남을 짓밟는 기술이 아니라, 자기 삶의 결정권을 남에게 넘기고 살아온 사람의 오래된 습관이었습니다. 말투는 서늘한데, 정작 겨누는 자리는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어요.


1장의 '좋은 사람이라는 가면이 나를 죽이고 있다'에서 오래 붙들렸습니다. 정몽주가 쓰러진 뒤 아버지 이성계에게 크게 꾸지람을 들으면서도 이방원은 변명하지 않았다고 하죠. 저자는 이 장면을 두고 좋은 아들, 좋은 신하로 기억되기를 그가 스스로 포기한 순간이라고 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적어둡니다. "그가 포기한 것은 평판이지 자신이 아니다." 평판이라는 거울만 들여다보는 사람은 정작 자기 얼굴을 못 보고 남이 기대하는 표정만 본다는 것이죠. 좋은 사람 소리를 지키려고 판단을 미루고 화를 삼키고 하고 싶은 말을 접어둔 시간이 누구에게나 적잖이 쌓여 있을 테니, 조직 생활을 오래 해온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이 장을 닫는 문장이 뜻밖이었어요. "그 작은 한 번의 정직함이 평생 쌓아온 가면의 균열이 된다. 균열은 무너짐이 아니라 시작이다." 다 뒤엎으라는 게 아니라 오늘 딱 한 번만 정직해 보라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낮은 다독임처럼 들렸습니다.


3장으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자리'로 옮겨갑니다. '남이 만들어준 자리에는 미래가 없다'는 제목 그대로예요. 형의 양위와 공신들의 추대로 얻은 옥좌를 이방원은 '받은 자리'로 냉정하게 규정합니다. 받은 자리에는 반드시 받게 해 준 사람이 있고, 그는 언젠가 그것을 거두어 갈 권리를 주장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병을 혁파해 형제와 공신, 아버지의 친위 병력까지 예외 없이 국가로 귀속시킨 일을, 저자는 받은 자리를 자기 손으로 다시 세운 의식으로 읽어냅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저자가 이 이야기를 남을 밟으라는 쪽으로 몰아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고마움은 간직하되 결정권은 넘기지 말라는 것, 도움은 받되 판단은 내가 내리라는 것. 부모나 선배가 놓아준 출발선 위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 구분이 꽤 묵직하게 다가올 겁니다. 지금 앉은 자리가 편안하다면, 그게 정말 내 것이어서인지 아니면 누군가 만들어준 편안함인지 되묻게 되니까요. 익숙한 자리는 대개 남의 자리이고 어색한 자리가 내 자리의 시작이라는 말이, 그래서 오래 남았습니다.


가장 위로가 됐던 건 4장의 '미움받기를 두려워하면 어떤 영토도 가질 수 없다'였습니다. 저자는 영토를 가진다는 게 선을 긋는 일이고, 선을 긋는다는 건 누군가에게 거절을 통보하는 일이라 결국 미움을 낳는다고 정리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켜낸 모든 경계는 누군가의 미움을 대가로 얻은 자리인 셈이죠. 그런데 정작 저를 붙든 건 이 문장이었어요. "대부분의 미움은 우리가 상상한 것의 절반도 되지 않는 크기로 존재한다." 오지도 않은 미움을 미리 겁내느라 해야 할 말을 삼키고 그어야 할 선을 못 긋는 마음, 그렇게 잃어버린 것들이 평생에 걸쳐 쌓인다는 지적이 오래 걸렸습니다. 다만 저자는 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일부러 무례해지는 것을 분명히 갈라둡니다. 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건 무례해지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결정을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선언일 뿐이라고요. 이 선이 있어서 책이 끝까지 거칠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쉬운 점도 솔직히 적어둡니다. 역사적 사실과 저자의 해석이 한 문장 안에 섞여 흐를 때가 있어서, 태종이라는 인물을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어디까지가 사료이고 어디부터가 재해석인지 헷갈릴 수 있겠더군요. 사병 혁파나 제도 정비 같은 큰 줄기는 실제 역사에 기대고 있지만, 그것을 전부 하나의 심리적 동기로 묶는 방식은 분명 저자의 시선입니다. 역사서로 기대하고 펼치면 이 지점에서 살짝 걸릴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럼에도 이 책은 결국 왕의 이야기라기보다 결정을 미뤄온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착한 사람 소리에 오래 갇혀 지낸 사람, 남이 마련해 준 자리에서 편안함과 답답함을 동시에 느껴온 사람, 미움이 두려워 하고 싶은 말을 늘 뒤로 미뤄온 사람이라면, 서늘한 문장들 사이에서 뜻밖의 위로를 만나게 될 겁니다. 강해지라고 몰아붙이는 책이 아니라, 이미 지쳐 있는 사람에게 네가 약해서가 아니라 방향을 남에게 맡겨왔을 뿐이라고 일러주는 쪽에 가까웠어요.


북유럽 카페 서평단을 통해 받아 든 책인데, 처음 표지를 마주했을 때의 강한 인상과 다 읽은 뒤의 잔잔한 여운이 꽤 달라서, 그 간극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여름의 한복판입니다. 매미 소리가 창을 두드리고 더위에 쉽게 지치는 계절인데, 이런 때일수록 밖으로 향하던 마음을 잠시 안으로 돌려 나는 지금 누구의 표정을 짓고 사는지 물어보기에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얇지만 오래 곁에 두고 여름을 나기 좋은 한 권이었습니다.


착한 사람으로 살아온 당신에게, 이제 당신 삶의 저자가 되어보라고 낮게 권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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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동안 조금씩 어른이 되었다
라비니야 지음 / 모티브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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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책을 처음 받아 든 날, 표지부터 오래 들여다봤습니다. 크림빛 위쪽과 짙은 초록이 나뉘어 있고, 그 위에 작은 십자무늬가 규칙적으로 놓여 있더군요. 부제에 '처방전'이라는 말이 있어서인지, 약봉지나 병원에서 건네받는 종이가 얼핏 겹쳐 보였어요. 요란하지 않은 색이라 오히려 마음이 놓였습니다. 무너진 마음을 다독인다는 책이 화려하게 굴었다면 좀 미덥지 않았을 텐데, 이 표지는 그러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라비니야 작가의 <쓰는 동안 조금씩 어른이 되었다>는 글쓰기를 재능이나 기술로 말하지 않습니다. 첫 장을 여는 문장부터가 '내가 글을 써도 될까'예요. 저는 이 제목 앞에서 조금 멈칫했습니다. 글이라는 걸 늘 남의 일로 여겨온 사람이라, 저 물음이 제 것처럼 읽혔거든요. 작가는 그림이나 악기와 달리 글쓰기는 노트와 펜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담담히 말합니다. 진입 장벽이 낮은데도 사람들이 선뜻 쓰지 못하는 건,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이 써도 되나 하는 마음의 문턱 때문이라는 거죠.


이 책이 좋았던 건 작가가 자기 밑바닥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시와 소설을 배웠지만 회사에 다니면서 글쓰기를 거의 체념했다고 해요. 재능은 미약하고 현실은 강퍅했다는 문장에서 괜히 마음이 서늘해졌습니다. 그러다 다시 펜을 든 계기가 신춘문예도 등단도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작은 발악"이었다는 부분이요. 회사에서 먹은 말라비틀어진 참치 샌드위치, 탕비실로 데려가 하소연을 늘어놓던 선임처럼 시시콜콜한 것들을 적었다는 얘기에서는 웃음이 났다가 이내 뭉클해졌습니다. 대단한 주제가 아니라 그렇게 사소한 걸 적으며 사람이 살아지는구나 싶었어요.


앞쪽에는 A라는 수강생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편의 사고로 어느 날 갑자기 가장이 된 40대 주부인데, 그 몇 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이 괜찮은 척뿐이었다고 해요. 안 괜찮으면 어쩔 거냐는 반문 뒤에 내놓을 답이 없어서, 불행 앞에 입을 다문 채 사는 게 습관이 되었다는 부분. 남 이야기 같지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괜찮은 척에 능숙해지고, 정작 자기가 얼마나 지쳤는지는 뒤늦게야 알아차리니까요. 작가는 이렇게 씁니다. "슬픔을 견디는 데 익숙해진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도 늦게 알아차린다." A가 수업 막바지에 처음으로 완결된 글을 가져온 뒤 건넨 말이 마음에 걸렸어요. "이제야 비로소 제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는 용기를 얻은 것 같아요."


책의 가운데를 지나면 '상처를 기록하면 소재가 된다'가 나옵니다. 제목만 보면 다소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읽어보면 그렇지 않아요. 나를 짓누르던 아픔도 글로 옮기고 나면 더는 나를 휘두르는 사건이 아니라 유연하게 다룰 수 있는 재료가 된다는 뜻이더군요. 작가는 이성복 시인의 "이야기된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라는 말을 자기 삶에서 실제로 겪었다고 적습니다. 여기서 <빨간 머리 앤>의 앤과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를 불러오는 것도 반가웠습니다. 고아원에서 스스로 '주디'라는 이름을 지어 붙이고 매일 편지를 쓰던 소녀를, 환경을 탓하는 대신 일상을 기록하며 마음의 균형을 붙든 사람으로 읽어내거든요. 어릴 적 넘기던 이야기가 이렇게 다시 와닿을 줄은 몰랐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심장은 '생존을 위한 기록'이 아닐까 싶어요. 작가는 자기 내면을 미로처럼 얽힌 배관에 빗댑니다. 두세 군데가 막혀 순환이 되지 않고, 그 막힌 것의 정체는 스스로 만든 열등감이거나 무언가를 잃고 싶지 않은 애착이었다고요. 이십 대에는 이루지 못한 꿈과 재능의 한계가 통로를 메웠다는 고백에서, 저는 제 지난 시간이 겹쳐 보였습니다. 5평 남짓한 고시텔에서 가슴이 답답해 주말마다 카페에서 시간을 죽였다는 시절, 그 숨 막힘이 실은 안이 막혀 있었기 때문이라는 깨달음. 그래서 무작정 쓰기 시작한 글이 "난 여기 있다, 아직 살아 있다"는 구조 신호였다는 부분. 살기 위한 선택처럼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자기 이야기를 썼다는 그 말이, 제게는 이 책 전체를 요약하는 한마디로 읽혔습니다.


요즘처럼 사진과 영상이 넘치고, AI가 발표문 한 편을 순식간에 만들어주는 시대에 굳이 글을 써야 하느냐는 물음에도 작가는 답을 내놓습니다. 사진과 영상은 멈춘 현재를 이미지 안에 가두지만, 글은 정리된 현재의 시선으로 미래의 나에게, 혹은 이름 모를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일이라고요. 흘러가는 시간과 경험을 헐거운 주머니에서 빠지는 동전처럼 잃지 않으려면 기록으로 붙들어야 한다는 비유가 특히 좋았습니다. 편리함이 미덕이 된 지금, 느리게 정제하는 이 일의 값을 다시 헤아리게 하더군요.


아쉬운 점을 굳이 꼽자면, 배관이나 파이프에 빗댄 표현이 여러 곳에 되풀이되는 게 조금 눈에 띄었습니다. 다만 그마저도 작가가 그만큼 자기 방식으로 세상을 오래 들여다봤다는 흔적처럼 읽혀서, 크게 걸리지는 않았어요.


이 책은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을 위한 안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속에 하지 못한 말이 쌓여 있는데 그걸 어디에 풀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 괜찮은 척에 익숙해져 자기 감정을 오래 들여다보지 못한 사람에게 조용히 스며들 책이라고 생각해요. 거창한 무언가를 시작하라고 등을 떠밀지 않고, 지금 쓴 한 줄이 막힌 통로를 여는 시작일 수 있다고 나직이 일러줍니다. 손바닥에 들어오는 작은 판형에 두껍지 않아 쥐기 가볍고, 부담 없이 넘기다 보면 어느새 자기 이야기가 하고 싶어지는 그런 책입니다.


한여름 열기가 한창인 요즘,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이 얇은 한 권을 천천히 넘겼습니다. 무언가를 이루라고 다그치는 대신 지친 마음을 가만히 받아주는 문장들이라, 더위에 눌린 마음이 조금 느슨해지더군요.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만난 책이지만, 읽는 내내 제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습니다.


무너진 마음을 다시 세우는 일은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오늘의 한 줄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이 책은 다정하게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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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유전자 - 선천적 지능을 압도하는 후천적 엘리트들의 환경 설계 법칙
다나트 지음 / 모티브 / 2026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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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살다 보면 결국 남는 건 재능이 아니라 곁에 둔 것들이더군요


표지를 처음 봤을 때는 자기계발서 특유의 뜨거운 구호를 예상했습니다. 막상 마주한 표지는 조용한 편이었어요. 홀로그램처럼 반짝이는 금속 곡면 위로 세로로 흐르는 'ELITE DNA' 글자가 이중나선을 닮아 있었고, 파랑과 은빛이 섞여 차분한 인상을 줬습니다. 감정을 밀어붙이는 대신 '설계'와 '시스템' 같은 단어를 먼저 내미는 표정이었죠. 성공을 유전자 탓으로 돌리는 책일까 싶었는데, 읽어 보니 딱 그 반대편에 서 있었습니다.


<엘리트 유전자>는 대학 캠퍼스를 소재로 삼지만, 실은 나이와 상관없이 통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저자 다나트는 전국 70여 개 대학을 직접 걸으며 상위 1% 학생들의 생활을 관찰했고, 그들을 특별하게 만든 힘이 타고난 머리가 아니라 매일 놓여 있던 환경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공간과 사람, 언어와 습관이 조용히 한 사람의 기준을 바꿔 놓는다는 이야기죠.


읽으며 자꾸 걸음을 늦추게 된 건 10장이었습니다. 관계를 다루는 장인데, 여기 이런 문장이 있어요.


"환경은 명령하지 않는다. 다만 반복된 장면으로 기준을 바꾼다."


저자는 좋은 습관이 전염되듯 회피도 똑같이 번진다고 말합니다. 처음엔 억지로 따라가던 것이 몇 달 뒤엔 그냥 몸에 붙은 루틴이 되고, 반대로 "오늘은 그냥 쉬자"는 말이 반복되면 어느새 미루는 게 기본값이 되어 버린다는 거죠. 정작 무서운 건, 그 변화가 워낙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자기 하루가 언제부터 흐트러졌는지 아무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는 대목이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제 기준이 어디서부터 낮아졌는지 저 역시 짚어내기 어렵다는 걸, 이 책이 조용히 일러 주더군요.


같은 장에서 저자는 관계를 두고 "관계는 운명이 아니라 동선이다"라고 정리합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는 게 전부가 아니라, 어디에 머물고 누구 곁에 시간을 쓰느냐가 관계의 방향을 정한다는 뜻이에요. 그러면서도 편한 사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친구, 시험 망친 날 같이 밥 먹어주는 친구도 필요하다고 분명히 짚어요. 다만 편한 관계로만 하루가 채워질 때 세계가 슬며시 좁아진다는 것, 그 기울기를 살펴보라고 말할 뿐입니다. 나를 혼내지 않으면서도 움직이게 하는 관계가 좋은 관계라는 저자의 정의는, 사람을 오래 겪어 본 사람일수록 고개를 끄덕일 대목입니다.


6장은 결이 다릅니다. 소속감과 자부심을 다루는데, 책에서 가장 온기가 도는 부분이에요. 저자는 애교심을 단순한 감정으로 보지 않습니다. "자기가 속한 곳을,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힘에 가깝다"고 표현하죠. 자기가 보낸 시간을 함부로 깎아내리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 나가서도 자기 배경을 덜 숨긴다는 흐름이었습니다. 학교 이야기로 읽히다가도, 어느새 제가 지금껏 지켜 온 자리와 관계들을 떠올리게 되더군요. 오래 몸담은 곳을 부정하지 않는 마음이 결국 자존감의 바닥을 만든다는 말은, 중년의 어느 지점에서 특히 묵직하게 들립니다.


책의 끝자락, 13장에서 저자는 예상되는 반론을 먼저 꺼냅니다. "결국 명문대에 가라는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결론은 정반대예요. 졸업장은 복제할 수 없어도 그 안에 담긴 시스템, 그러니까 공간과 사람과 언어와 기준과 루틴은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다는 겁니다. 집에서 공부가 안 되면 집에서 하지 않아도 된다, 침대와 소파가 놓인 방은 원래 사람을 눕게 만든다, 그러니 하루를 바꾸고 싶으면 먼저 머무는 공간부터 손보라는 조언은 담백하면서도 당장 시도해 볼 만한 것이었어요. 의지만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없고 누구나 장소의 압력을 받는다는 저자의 말은, 자기 게으름을 탓해 온 이들에게 건네는 조용한 위로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읽는 내내 마냥 끄덕이기만 한 건 아닙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다 보면, 개인의 의지나 선택은 어디쯤 남는 걸까 싶은 의문도 들었어요. 다만 저자도 그 점을 모르지 않는 듯, 환경을 바꾸는 첫 선택만큼은 결국 내가 해야 한다는 자리로 이야기를 되돌려 놓습니다. 그 균형 덕에 결정론으로 미끄러지지 않고 실천의 이야기로 남더군요.


아쉬운 점이라면 사례가 대학 캠퍼스에 몰려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를 한참 떠나온 독자라면 자기 상황으로 옮겨 읽는 수고를 조금 해야 해요. 그래도 저자의 관점이 워낙 보편적이라 그 번역이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학이라는 렌즈를 빌려, 사람이 자신이 머문 곳을 닮아간다는 오래된 명제를 새삼 실감했습니다.


판형은 손에 편하게 들어오는 보통 크기에 두께도 부담 없어서, 며칠에 걸쳐 천천히 읽기 좋았습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받은 책인데, 그동안 읽어 온 여러 권 가운데 이 도서는 '나 자신'보다 '내가 놓인 자리'를 돌아보게 만든 한 권이었어요. 성공 공식을 쥐여 주는 책이라기보다, 지금 내 하루가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지 조용히 물어오는 안내서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노력해도 잘 안 바뀐다는 자책에 지쳐 본 사람이라면 한 번 펼쳐 볼 만합니다. 문제의 원인을 의지의 부족에서 환경의 설계로 옮겨 놓아 주니까요. 자녀의 진로를 함께 고민 중인 부모에게도, 이제 와 새 습관 하나쯤 들여 보려는 사람에게도 각자의 자리에서 읽을 거리가 남을 겁니다.


여름의 한복판이라 하루가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에어컨 바람이 도는 조용한 자리에서 이 책을 펼쳐 두고, 매일 머무는 공간과 자주 마주하는 사람들을 한 번쯤 헤아려 보는 것도 이 계절을 지나는 괜찮은 방법일 것 같아요.


재능을 탓하기 전에, 매일 머무는 자리와 곁에 둔 사람부터 다시 살피게 만드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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