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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동안 조금씩 어른이 되었다
라비니야 지음 / 모티브 / 2026년 7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책을 처음 받아 든 날, 표지부터 오래 들여다봤습니다. 크림빛 위쪽과 짙은 초록이 나뉘어 있고, 그 위에 작은 십자무늬가 규칙적으로 놓여 있더군요. 부제에 '처방전'이라는 말이 있어서인지, 약봉지나 병원에서 건네받는 종이가 얼핏 겹쳐 보였어요. 요란하지 않은 색이라 오히려 마음이 놓였습니다. 무너진 마음을 다독인다는 책이 화려하게 굴었다면 좀 미덥지 않았을 텐데, 이 표지는 그러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라비니야 작가의 <쓰는 동안 조금씩 어른이 되었다>는 글쓰기를 재능이나 기술로 말하지 않습니다. 첫 장을 여는 문장부터가 '내가 글을 써도 될까'예요. 저는 이 제목 앞에서 조금 멈칫했습니다. 글이라는 걸 늘 남의 일로 여겨온 사람이라, 저 물음이 제 것처럼 읽혔거든요. 작가는 그림이나 악기와 달리 글쓰기는 노트와 펜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담담히 말합니다. 진입 장벽이 낮은데도 사람들이 선뜻 쓰지 못하는 건,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이 써도 되나 하는 마음의 문턱 때문이라는 거죠.

이 책이 좋았던 건 작가가 자기 밑바닥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시와 소설을 배웠지만 회사에 다니면서 글쓰기를 거의 체념했다고 해요. 재능은 미약하고 현실은 강퍅했다는 문장에서 괜히 마음이 서늘해졌습니다. 그러다 다시 펜을 든 계기가 신춘문예도 등단도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작은 발악"이었다는 부분이요. 회사에서 먹은 말라비틀어진 참치 샌드위치, 탕비실로 데려가 하소연을 늘어놓던 선임처럼 시시콜콜한 것들을 적었다는 얘기에서는 웃음이 났다가 이내 뭉클해졌습니다. 대단한 주제가 아니라 그렇게 사소한 걸 적으며 사람이 살아지는구나 싶었어요.

앞쪽에는 A라는 수강생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편의 사고로 어느 날 갑자기 가장이 된 40대 주부인데, 그 몇 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이 괜찮은 척뿐이었다고 해요. 안 괜찮으면 어쩔 거냐는 반문 뒤에 내놓을 답이 없어서, 불행 앞에 입을 다문 채 사는 게 습관이 되었다는 부분. 남 이야기 같지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괜찮은 척에 능숙해지고, 정작 자기가 얼마나 지쳤는지는 뒤늦게야 알아차리니까요. 작가는 이렇게 씁니다. "슬픔을 견디는 데 익숙해진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도 늦게 알아차린다." A가 수업 막바지에 처음으로 완결된 글을 가져온 뒤 건넨 말이 마음에 걸렸어요. "이제야 비로소 제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는 용기를 얻은 것 같아요."
책의 가운데를 지나면 '상처를 기록하면 소재가 된다'가 나옵니다. 제목만 보면 다소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읽어보면 그렇지 않아요. 나를 짓누르던 아픔도 글로 옮기고 나면 더는 나를 휘두르는 사건이 아니라 유연하게 다룰 수 있는 재료가 된다는 뜻이더군요. 작가는 이성복 시인의 "이야기된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라는 말을 자기 삶에서 실제로 겪었다고 적습니다. 여기서 <빨간 머리 앤>의 앤과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를 불러오는 것도 반가웠습니다. 고아원에서 스스로 '주디'라는 이름을 지어 붙이고 매일 편지를 쓰던 소녀를, 환경을 탓하는 대신 일상을 기록하며 마음의 균형을 붙든 사람으로 읽어내거든요. 어릴 적 넘기던 이야기가 이렇게 다시 와닿을 줄은 몰랐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심장은 '생존을 위한 기록'이 아닐까 싶어요. 작가는 자기 내면을 미로처럼 얽힌 배관에 빗댑니다. 두세 군데가 막혀 순환이 되지 않고, 그 막힌 것의 정체는 스스로 만든 열등감이거나 무언가를 잃고 싶지 않은 애착이었다고요. 이십 대에는 이루지 못한 꿈과 재능의 한계가 통로를 메웠다는 고백에서, 저는 제 지난 시간이 겹쳐 보였습니다. 5평 남짓한 고시텔에서 가슴이 답답해 주말마다 카페에서 시간을 죽였다는 시절, 그 숨 막힘이 실은 안이 막혀 있었기 때문이라는 깨달음. 그래서 무작정 쓰기 시작한 글이 "난 여기 있다, 아직 살아 있다"는 구조 신호였다는 부분. 살기 위한 선택처럼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자기 이야기를 썼다는 그 말이, 제게는 이 책 전체를 요약하는 한마디로 읽혔습니다.
요즘처럼 사진과 영상이 넘치고, AI가 발표문 한 편을 순식간에 만들어주는 시대에 굳이 글을 써야 하느냐는 물음에도 작가는 답을 내놓습니다. 사진과 영상은 멈춘 현재를 이미지 안에 가두지만, 글은 정리된 현재의 시선으로 미래의 나에게, 혹은 이름 모를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일이라고요. 흘러가는 시간과 경험을 헐거운 주머니에서 빠지는 동전처럼 잃지 않으려면 기록으로 붙들어야 한다는 비유가 특히 좋았습니다. 편리함이 미덕이 된 지금, 느리게 정제하는 이 일의 값을 다시 헤아리게 하더군요.

아쉬운 점을 굳이 꼽자면, 배관이나 파이프에 빗댄 표현이 여러 곳에 되풀이되는 게 조금 눈에 띄었습니다. 다만 그마저도 작가가 그만큼 자기 방식으로 세상을 오래 들여다봤다는 흔적처럼 읽혀서, 크게 걸리지는 않았어요.
이 책은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을 위한 안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속에 하지 못한 말이 쌓여 있는데 그걸 어디에 풀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 괜찮은 척에 익숙해져 자기 감정을 오래 들여다보지 못한 사람에게 조용히 스며들 책이라고 생각해요. 거창한 무언가를 시작하라고 등을 떠밀지 않고, 지금 쓴 한 줄이 막힌 통로를 여는 시작일 수 있다고 나직이 일러줍니다. 손바닥에 들어오는 작은 판형에 두껍지 않아 쥐기 가볍고, 부담 없이 넘기다 보면 어느새 자기 이야기가 하고 싶어지는 그런 책입니다.
한여름 열기가 한창인 요즘, 에어컨 바람 아래에서 이 얇은 한 권을 천천히 넘겼습니다. 무언가를 이루라고 다그치는 대신 지친 마음을 가만히 받아주는 문장들이라, 더위에 눌린 마음이 조금 느슨해지더군요.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만난 책이지만, 읽는 내내 제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습니다.
무너진 마음을 다시 세우는 일은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오늘의 한 줄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이 책은 다정하게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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