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직전, 맹자를 만났다 - 흔들리는 인생 앞에서 답을 찾는 53가지 지혜
판덩 지음, 유연지 옮김 / 이든서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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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손에 쥐어 보니 판형도 두께도 부담 없는 정도라, 마음먹고 자리를 잡지 않아도 될 것 같더군요.


표지를 먼저 오래 봤습니다. 회색과 흰색 계단이 사선으로 화면을 가르고, 주황색 상의를 입은 인물이 그 사이에 서 있어요. 눈을 감고 웃는 얼굴인데 계단을 오르는 중인지 잠시 멈춘 것인지는 분명치 않게 그려 두었습니다. 번아웃이라는 단어를 달아 놓고 지친 표정 대신 힘을 뺀 사람을 올려 둔 셈이라, 제목과 그림이 서로를 살짝 비껴갑니다. 그 어긋남이 오히려 이 책의 태도 같았어요. 아래 노란 띠지에는 "나는 왜 이렇게 쉽게 흔들리고, 작은 실패에도 마음이 꺾이는 걸까?"라는 물음이 적혀 있고요.


지은이 판덩은 중국의 독서 플랫폼 판덩독서를 이끄는 사람입니다. <맹자>에서 쉰세 개 구절을 골라 초심, 순리, 선택, 교우, 반성, 선한 마음, 성장의 방향이라는 일곱 갈래로 묶었어요. 눈에 띄는 건 사심(死心)이라는 말을 오늘의 번아웃 자리에 데려다 놓은 대목입니다. 의지를 잃고 스스로를 놓아 버린 상태, 마음이 죽은 상태. 이천 년 전 표현이 요즘 진료실에서 쓰는 말과 겹쳐지는 장면이 묘하게 설득력 있었습니다.


가장 오래 붙들려 있던 곳은 2장의 한 꼭지였어요. 이루 상 편에서 가져온 구절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사람들은 도가 가까운 곳에 있음에도 먼 곳에서 찾으려 하고, 해야 할 일이 쉬운 곳에 있는데도 어려운 곳에서 찾으려고 한다." 저자는 여기에 <채근담>의 한 대목을 겹칩니다. 양동이만 한 연못과 주먹만 한 돌 사이에도 산과 강의 기세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예요. 그러면서 요즘 부모들이 아이에게 인생 로드맵을 그려 주고 계획을 얹느라 양쪽 다 지쳐 가는 풍경을 예로 듭니다. 현실은 보지 않고 먼 앞날만 좇기 때문에 힘든 것이라는 진단이 뒤따르는데, 소진의 원인을 노력의 부족이 아닌 조준점의 거리에서 찾는 시선이 반가웠습니다. 애쓰는 방향이 너무 멀리 잡혀 있어서 지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니까요.


6장에서는 호연지기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솔직히 이 단어는 한문 시간이나 액자 속 글귀로 먼저 만난 말이라 저에게는 좀 딱딱했는데, 저자가 끌어온 소식의 시구가 그 인상을 조금 바꿔 놓았어요. 심중에 호연지기만 있어도 천 리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다는 구절입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 저자는 호연지기를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엇으로 봅니다. 식물이 돌멩이와 다른 지점, 동물이 식물과 다른 지점처럼 이름 붙이기 어려워도 있다고는 말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고요. 소설 <백록원>의 백가헌이 늘 허리를 곧게 펴고 다니고, 산적이 되어 돌아온 이가 굳이 그 허리를 꺾으려 했다는 대목도 여기서 인용됩니다. 이미지 하나로 개념 하나를 대신한 셈인데 이런 방식이 이 책 전체의 강점이에요.


7장의 자포자와 자기자 이야기는 결이 조금 더 매섭습니다. 스스로를 해치는 사람과 스스로를 버리는 사람을 나눠 놓고, 저자는 코비의 영향권과 관심권 개념을 겹쳐 읽습니다.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범위가 있고, 아무리 마음을 써도 실제로는 바뀌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구분이지요. 매일 불안해하고 자책하고 변명하면서 정작 움직이지 않는다면 자신을 후자에 가둬 두는 셈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판덩 본인이 방송국에서 맡은 프로그램이 잘 풀리지 않던 시절에 <논어>를 펼치며 버텼다는 회고가 이 대목의 무게를 받쳐 줍니다.


다만 이 장에서 걸리는 부분도 있었어요. 저자는 "책을 좀 읽어 보라"는 권유에 늘 힘들다고만 답하는 사람을 두고, 그런 이를 이끌 방법은 없으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사람을 골라 사귀라는 조언으로 읽으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표지에 번아웃을 내건 책에서 나오기에는 조금 서늘합니다. 정말로 소진된 사람은 이 문장을 읽으며 자기 자신을 멀리해야 할 사람 자리에 앉히기 쉬우니까요. 마음이 꺾인 상태와 애초에 마음을 쓰지 않는 태도는 겉모습이 비슷해도 다른 것인데, 그 경계를 조금 더 세심하게 갈라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다단계 판매원을 의욕 낭비의 대표 사례로 든 대목도 표본이 너무 멀어서, 평범한 직장인이 자기 이야기로 옮겨 놓기에는 거리가 있었고요.


그럼에도 이 책이 건네는 위로의 방식은 꽤 단정합니다. 힘을 더 내라고 등을 떠밀지 않고, 지금 쓰고 있는 힘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먼저 보게 하거든요. 자신을 일으켜 세울 힘과 책임감은 결국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도, 운명이 어디에 던져 놓든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마무리도 요란하지 않아 좋았습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위로를 앞세운 문장에 무뎌질 때가 있는데, 이 한 권은 이천 년 묵은 문장을 빌려 오느라 오히려 유행하는 위로의 말투를 피해 갔어요.


한 꼭지가 짧고 구절마다 독립되어 있어서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지 않아도 됩니다. 목차를 훑다가 그날 마음이 가는 제목을 펼치는 방식이 이 책에는 더 어울릴 것 같아요. 고전이 어렵게 느껴져 <맹자>를 미뤄 두었던 사람이라면 입구로 삼기 좋고, 요즘 하는 일에 회의가 든다면 7장부터 거꾸로 읽어도 괜찮겠습니다.


늦더위가 아직 남았지만 아침저녁 공기는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여름 내내 어딘가 소진된 채로 버텨 왔다면, 계절이 바뀌는 이 며칠이 마음의 조준점을 가까운 데로 당겨 놓기 좋은 때가 아닐까 싶어요. 멀리 있는 답을 찾느라 발밑을 보지 못했던 시간을 잠깐 멈춰 세우는 데 이 도서가 도움이 될 겁니다.


답은 먼 데 있지 않다는 맹자의 말을 빌려, 지친 마음이 다시 힘을 어디에 쓸지 일러 주는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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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뿐인 내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한창욱 지음 / 정민미디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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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를 먼저 한참 봤습니다. 위쪽은 맑은 하늘색이었다가 아래로 내려올수록 색이 옅어지고, 분홍빛 능선 아래 백사장에 사람 하나가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어요. 새 세 마리가 높은 곳에 떠 있고 나머지는 전부 여백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큰 물음을 얹은 표지치고는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없더군요. 아래쪽에 비워둔 밑줄 두 칸을 보고서야, 답을 내주는 대신 적어보라고 건네는 책이겠구나 짐작했습니다.


판형은 손에 쥐기 좋은 크기고 두께도 부담 없는 편이라, 한 번에 몰아 읽기보다 며칠에 걸쳐 몇 꼭지씩 넘기기에 알맞았어요. 실제로 서른아홉 개 꼭지가 고르게 짧습니다. 생명과 시간과 자아를 묻는 1장에서 출발해 마음의 습관, 실행의 습관을 지나 관계로 닫히는 구성이고요. 문학에서 질문을 길어 올린 뒤 철학과 심리학, 뇌과학으로 근거를 대는 방식이 꼭지마다 반복되는데, 이 리듬이 익숙해지면 읽는 속도가 붙습니다.


가장 오래 붙들었던 곳은 폭풍우를 이야기하는 대목이었어요. 스무 해 남짓 살아온 디자이너가 사고로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고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시기가 길게 그려집니다. 그를 돌려세운 건 대단한 결심이 아니었습니다. 화가가 된 친구가 안고 온 작은 화분, 며칠을 방치했다가 무심코 만져본 마른 흙, 그리고 물을 주는 일의 반복이었어요. 싹이 오르고 초여름에 빨간 백일홍이 피자 대학 시절 꽃밭에서 그림을 그리던 기억이 따라옵니다. 창고에 넣어둔 이젤을 꺼내고, 시선이 부담스러워 되돌아갈까 망설이면서도 바퀴를 굴려 공원까지 나가고요. 회복이 이렇게 굼뜨고 사소한 순서로 온다는 점이 오히려 신뢰가 갔습니다. 뒤에 전시회 이야기가 나오면서 그가 이렇게 답하는 장면이 있어요. "내 생이 꽃처럼 아름답게 반짝일 때." 시기를 정하지 않고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거리가, 앞서 읽은 네 쪽 안에 다 들어 있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걸리는 지점도 있었어요. 이 챕터의 인물도, 뒤에 나오는 대기업 과장도 삶의 방향이 바뀌기까지 상당히 큰 사건을 겪습니다. 한쪽은 사고였고 한쪽은 회의실에서 쓰러진 과로였죠. 그런데 대다수는 그만한 충격 없이 그냥 조금씩 지칩니다. 특별히 무너진 적도 없고 크게 아픈 적도 없는데 어느 순간 마음이 헐거워져 있는 쪽이요. 사례가 선명할수록 그 사이에 놓인 사람들은 어디서 실마리를 잡아야 하나 싶더군요. 저자가 그 질문에 답을 안 한 건 아닙니다. 다만 답이 사례만큼 극적이지 않아서, 조금 더 조용히 읽어야 눈에 들어옵니다.


그 조용한 답이 모여 있는 곳이 행복을 다루는 꼭지였어요. 성실하다는 평판 하나로 달려온 사람이 병실에서 아내가 건넨 찻잔을 받아 들고서야 계절이 바뀐 걸 알아차립니다. 바람에 단풍잎 몇 장이 떠올랐다 내려앉는 걸 보면서 이 정도면 충분하구나 하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고 나오고요. 퇴원 뒤의 변화가 거창하지 않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완벽을 고집하지 않으니 퇴근이 빨라지고, 주말에는 아이들과 이불 속에서 만화책을 봅니다. 공원에서 딸아이가 개미 행렬을 가리키며 부르는 장면에서, 사진을 찍으려 휴대폰을 꺼내다 말고 손을 멈추고 아이 옆에 나란히 앉는 대목이 나옵니다. 기록을 남기는 대신 그 자리에 함께 있기를 고른 동작 하나가 이 꼭지의 주제를 전부 대신하고 있었어요.


뒤이어 나오는 네 가지 제안은 담백합니다. 하루 일 분이라도 멈춰 서기, 비교를 줄이고 자기만의 즐거움을 찾기, 만족의 기준을 낮추기, 매일 보는 것을 낯설게 바라보기. 이 대목에서 인용된 벤담의 문장이 오래 남습니다. "별을 따려고 손을 뻗는 사람은 자기 발밑의 꽃을 잊어버린다." 행복이 선물이라면 그 선물은 발견할 준비가 된 사람에게 간다는 말도 이 근처에 놓여 있어요. 준비라는 단어가 노력보다 태도에 가깝게 쓰였다는 게 이 책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책은 관계로 닫힙니다. 마지막 꼭지에 팔 년을 만난 연인이 카페에서 다투는 장면이 길게 나와요.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두고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느냐고 되받는 순간, 쌓아 올린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집니다. 화가 가라앉은 뒤 그녀가 먼저 연락하지만 보름이 지나도록 읽히지 않고, 그 침묵이 그 자체로 가장 확실한 대답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죠. 저자는 이 사례에서 관계를 훼손하는 다섯 가지를 뽑아냅니다. 무시나 냉소, 지난 실수의 반복적인 소환, 사적 영역 침범, 감사에 대한 무반응, 그리고 긴 침묵. 앞 장면을 다시 펼쳐보게 만드는 정리였어요.


관계를 살리는 쪽으로 넘어가면 여섯 가지가 이어지는데, 공감을 다루는 마지막 항목이 특히 정확했습니다.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저도 그런 적 있다며 화제를 가져오거나 네가 예민한 거라고 판단을 앞세우면 공감은 그 자리에서 훈수로 바뀐다는 지적이요. 진짜 공감은 해결책을 내놓기보다 상대의 감정이 스스로 흘러갈 자리를 마련해 주는 데서 시작된다고 하고, 그랬구나 많이 힘들었겠다는 짧은 한마디가 백 마디 조언보다 위로가 되는 이유를 여기서 찾습니다. 앞서 카페 장면에서 실제로 오갔던 말들이 반례로 고스란히 회수되는 구조라 설득력이 있었어요.


삼백 쪽이 넘는 책의 마지막 문장이 독자에게 건네는 실천 하나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오늘은 잊지 말고 가까운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보자면서 놓아둔 그 한 줄, "당신은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표지 아래 비워둔 밑줄과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마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받아 읽어왔지만, 이 한 권은 다 읽고 나서 책장에 바로 꽂지 않고 손 닿는 자리에 두게 되네요. 통독보다 필요할 때 한 꼭지씩 펼쳐 읽는 쓰임에 더 맞는 도서 같아서요. 인생의 답을 정리해주는 안내서를 기대하면 조금 밋밋할 수 있고, 대신 스스로 답을 적어볼 자리를 원한다면 서른아홉 개 물음이 꽤 성실하게 놓여 있습니다. 자기 삶을 한 번쯤 되짚어보려는 분들, 성취 쪽으로만 기울어 있던 무게중심을 조금 옮겨보고 싶은 분들이 읽으면 남는 게 있을 겁니다.


여름 끝자락입니다. 매미 소리가 하루가 다르게 얇아지고 저녁 공기에 서늘한 기운이 섞이기 시작했어요. 책 속 인물이 병실 창밖으로 계절이 바뀐 걸 알아차리던 장면이 지금과 겹칩니다. 표지의 그 사람처럼 잠시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기에 나쁘지 않은 때고요. 발밑에 무엇이 피어 있는지 확인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이 한 권이 남긴 건 그 정도의 담백한 사실입니다.


인생의 정답을 쥐여주는 대신, 답을 적어 넣을 서른아홉 개의 빈칸을 건네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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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를 읽는 관전의 기술
김양희 지음 / 메이트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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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포장을 열자 초록이 먼저 왔습니다. 형광에 가까운, 아주 선명한 초록이에요. 표지 가운데 다이아몬드 라인만 옅게 그어져 있고 나머지는 전부 잔디 색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야구장 통로를 지나 관중석으로 올라섰을 때 눈앞에 확 펼쳐지는 그 색을 그대로 인쇄해 둔 것 같았어요.


위쪽에는 "야구는 '왜'를 묻는 순간 시작된다", 아래 띠지에는 "야구는 '왜'를 읽는 스포츠다!"가 적혀 있습니다. 같은 말을 위아래로 두 번 눌러 놓은 셈이죠. 처음엔 조금 과하다 싶었는데 다 읽고 나니 이해가 갔습니다. 이 한 권이 하고 싶은 말이 정확히 그것뿐이거든요.


<야구를 읽는 관전의 기술>은 25년 넘게 프로야구 현장을 취재해온 김양희 기자가 쓴 책입니다. 지금은 한겨레 스포츠 팀장으로 일하고 계시고요. 판형도 두께도 부담스럽지 않아서, 잡고 있으면 한 챕터씩 끊어 읽기가 좋았습니다. 각 장이 짧게 끝나는 구성이라 중간에 멈춰도 흐름을 놓치지 않아요.


가장 오래 붙잡고 있었던 대목은 수비를 다룬 장이었습니다. 챕터 머리에 이런 문장이 걸려 있어요.


"화려한 공격은 한 경기를 빛낸다. 안정된 수비는 한 시즌을 지탱한다."


저자는 야구계 오랜 격언인 "타격에는 슬럼프가 있지만 수비에는 슬럼프가 없다"를 먼저 꺼내놓고, 곧바로 스스로 반론을 답니다. 수비도 심리와 컨디션의 영향을 받으니 문자 그대로 맞는 말은 아니라고요. 그러면서도 이 격언이 계속 회자되는 이유를 반복 재현성에서 찾습니다. 타구 판단, 첫 발, 포구 자세, 송구 메커니즘. 몸에 익을수록 흔들림이 줄어드는 영역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감독들은 방망이가 식은 선수라도 수비가 안정적이면 쉽게 라인업에서 빼지 않는다고 해요.


한화 이글스의 숫자 대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팀 순위 꼴찌였던 해에는 수비율이 최하위에 실책도 리그에서 가장 많았는데, 정규리그 2위로 올라선 시즌에는 수비율 전체 1위에 실책 수가 가장 적었다고 하죠. 성적이 좋아서 수비가 안정된 건지 수비가 안정돼서 성적이 따라온 건지, 저자는 후자 쪽에 무게를 둡니다.


같은 챕터에 염경엽 LG 감독의 말이 실려 있어요. 수비가 몸에 배면 저절로 몸이 간다고, 현역 시절 공 오는 쪽으로 몸을 날리다 보니 지금도 왼쪽 배 윗부분이 까맣다고 했답니다. 살이 계속 까지다 보니 그렇게 됐는데 습관이 되면 안 할 수가 없다는 대목에서 잠깐 멈췄습니다. 티가 안 나는 자리에서 같은 동작을 몇 년씩 반복해온 사람의 몸에 남는 흔적이니까요. 회사든 어디든, 조직을 실제로 버티게 하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혔습니다.


투수 이야기를 다룬 장에서는 결이 조금 달랐어요. 완투가 미덕이던 시절에서 여럿이 나눠 지는 시대로 넘어온 과정을 의학과 데이터 양쪽으로 설명하는데, 75구에서 80구를 넘어서면 인대와 근육을 지탱하는 힘이 급격히 떨어지고 릴리스 포인트가 흔들린다고 합니다. 선발이 같은 타자를 세 번째 상대할 때 피안타율이 크게 오른다는 지표도 함께 나오고요. 100구 이후의 에이스보다 갓 올라온 불펜 투수가 실점을 막을 확률이 높을 수 있다는 문장이 이 장의 요약입니다.


이 장 끝에 붙은 짧은 박스 글이 책 전체에서 가장 진하게 남았습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 선수가 롯데의 4승을 혼자 책임진 기록을 날짜순으로 따라가는 글이에요. 열흘 동안 다섯 경기에 나서 40이닝을 던졌고, 공은 610개였다고 합니다. 팀 전체 이닝의 3분의 2였다죠. 그리고 이렇게 닫습니다.


"투혼으로 포장된 혹사로 최동원은 결국 9시즌(1983~1990년)밖에 뛰지 못했다. 최동원의 어깨도 '인간'의 어깨였던 것이다."


전설로 부르던 기록의 뒷면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이렇게 담담하게 적어두니 오히려 더 오래 남더군요. 버티는 것 자체를 훈장으로 여기던 시절의 기준이 지금은 관리해야 할 위험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저자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기록으로만 보여줍니다. 바로 앞에서 100구 제한을 두고 에이스가 10년, 15년 건강하게 마운드를 지키게 하려는 경영학적 선택에 가깝다고 설명해 둔 터라 이 배치가 더 효과적이었어요.


숫자를 다룬 7장도 좋았습니다. 기록지 위에서 안타는 전부 똑같이 1로 적힙니다. 리그 최고 투수에게 뽑아낸 안타든 지친 불펜 상대로 빗맞은 안타든 구분이 없고, 9회 1점 차 승부에서 나온 안타와 10대 0으로 기울어진 경기에서 나온 안타가 타율에서 정확히 같은 무게를 갖는다고 해요. 그래서 상대 에이스가 선발인 날에는 몸이 안 좋다며 라인업에서 빠졌다가 후반에 약한 불펜이 올라오면 대타로 나서겠다는 타자도 실제로 있답니다. 개인 타율 관리를 위해서요. 평가 지표 하나가 사람의 행동을 어디까지 비틀어 놓는지 보여주는 예라, 야구 밖에서도 짚이는 데가 있었습니다.


팬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해결하는 타자를 두고 영양가 있는 안타를 친다고 말하잖아요. 저자는 그게 감정적인 표현이 아니라 야구의 본질에 가까운 직관적 이해라고 씁니다. 현장의 언어가 데이터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는 얘기죠. 이 대목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만 아쉬운 곳도 있었어요. 1장에 '1점이 결정짓는 승부와 패자의 서사'라는 챕터가 있습니다. 1점 차에서 간절함이 조급함으로 바뀌는 과정, 무사 1·3루에서 감독의 철학이 갈리는 순간을 촘촘하게 풀어놓아서 읽는 재미가 큽니다. 강팀 감독일수록 이 순간 더 냉정하다는 관찰도 좋았고요. 한 점을 막으려다 대량 실점의 문을 여는 쪽이 더 치명적임을 알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야구장 밖에서도 통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제목에 걸어둔 '패자의 서사'는 끝까지 정면으로 다뤄지지 않아요. 두 팀 모두 안전한 선택을 포기하고 도박을 강요받는다는 대목이 그나마 가깝지만, 진 쪽에 남는 이야기를 따로 펼쳐주지는 않습니다. 제목이 기대하게 만든 만큼 한 챕터쯤 더 있었어도 좋았겠다 싶었어요. 챕터 끝을 닫을 때마다 한 뼘씩 세게 밀어붙이는 문장 습관도 눈에 띄는데, 타율을 두고 유용한 지표라고 인정해놓고 결론에서 숫자의 오류라고 못박는 식입니다. 읽는 맛은 살지만 앞뒤가 살짝 어긋나 보이기도 했고요.


그래도 이 책의 미덕은 분명합니다. 규칙을 외우게 하는 대신 장면의 앞뒤를 붙여서 보게 만들어요. 불펜이 서너 명으로 구성되니 다음에 누가 올라올지 미리 짚어보는 것도 재밌는 관전법이라고 권하는 대목처럼, 당장 오늘 중계를 볼 때 써먹을 수 있는 제안이 곳곳에 있습니다. 정우영 캐스터가 추천사에서 술술 읽히는데 쉽지 않다고 미리 일러둔 이유도 알겠더라고요. 문장은 편하지만 담긴 정보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야구를 오래 봤다고 자부하는 분일수록 새로 알게 되는 게 많을 겁니다. 반대로 올해 처음 야구장에 다녀왔거나 중계를 틀어놓고도 왜 저 타이밍에 투수를 바꾸는지 몰라 답답했던 경우라면, 1장과 5장만 먼저 읽어도 다음 경기가 달라 보일 거예요. 아이와 함께 야구장에 가는 분들께도 권할 만합니다. 설명해 줄 말이 늘어나거든요.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다 보면 읽고 나서 오래 남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갈리는데, 이 한 권은 야구를 보는 방식 자체를 조금 바꿔놓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값을 했다고 생각해요.


늦더위가 아직 안 물러난 8월 말입니다. 순위 싸움이 슬슬 조여드는 시기고, 저녁 무렵 중계를 틀어놓기에도 좋은 계절이죠. 남은 경기들을 보면서 이 책이 알려준 것들을 하나씩 찾아볼 생각입니다. 투구 직전 야수들의 발끝이 어디로 향하는지, 감독이 전화기를 언제 드는지, 그리고 오늘 나온 그 안타 하나가 기록지 한 줄로 남을 것인지 흐름을 바꿀 것인지.


같은 경기를 봐도 다르게 보이는 이유를 알려주는 책. 야구를 이미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큰 선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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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정리하는 아이 - 잔소리 없이 아이를 자라게 하는 정리 육아법
강민영.유진아.정다은 지음 / msjn(엠에스제이엔)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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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정리를 다룬 책이라고 하면 각 잡힌 수납장 사진부터 떠올리게 됩니다. 북유럽 카페를 통해 받은 이 도서는 처음부터 다른 곳을 겨눕니다. 아이 방이 어질러진 이유를 게으름으로 정리하지 않아요. 아직 자라는 중인 힘을 어떻게 꺼내 줄지 묻는 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구성은 공간과 시간과 관계라는 세 축으로 짜였습니다. 수학 과외로 십 년을 보낸 분, 정리수납 현장을 팔 년 넘게 지킨 분들이 각자 맡은 자리에서 겪은 사례를 나눠 실었어요. 그래서 논리를 세우는 문장보다 현장에서 건져 올린 장면이 훨씬 많습니다. 이론이 궁금한 독자에게는 다소 얇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당장 오늘 저녁에 써 볼 것을 찾는 독자에게는 이쪽이 더 반가울 것 같아요.


첫 장은 진단으로 시작합니다. 흐트러진 속마음이 흐트러진 공간으로 드러나고 그것이 다시 공부를 흔든다는 관찰이 출발점입니다. 물건이 많아 생긴 구조의 문제인지, 스트레스나 불안에서 온 문제인지 먼저 갈라 보라는 조언이 이어져요. 아픈 아이에게 운동을 권하는 격이라는 비유가 나오는데, 읽으면서 조금 뜨끔했습니다. 이어 등장하는 클린스팟은 방 전체를 손대는 큰 계획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직접 고른 한 칸이면 충분하다고 해요. 부모가 자리를 지정해 준 선반은 두 주 만에 원래대로 돌아갔고, 아이가 스스로 고른 책상 상판은 석 달을 버텼다는 기록이 나란히 실려 있습니다.


실행 방법으로 제시된 3P도 간결합니다. 꺼내서 고르고 자리를 정한 뒤 제자리에 넣는 흐름이 전부예요. "정리의 시작은 눈이 아니라 손"이라는 문장이 이 장의 성격을 압축합니다. 계획을 세우느라 보낸 저녁보다 손을 댄 오 분이 낫다는 이야기인데, 미루는 버릇이 몸에 밴 어른에게도 그대로 옮겨 붙는 조언이었습니다.


습관을 다루는 절에서 잠시 속도를 늦추게 됐어요. 신호와 행동과 보상이 맞물려 돌아가는 원리를 설명한 다음, 성공률 팔 할이면 충분하고 일주일에 닷새면 훌륭하다고 적어 둡니다. 습관이 자리 잡기까지 평균 두 달쯤 걸린다는 연구도 곁들이고요. 완벽을 목표로 세우지 말라는 이 문장이 정리를 가르치는 책에서 나온 것이라 더 오래 남았습니다. 물건 버리기를 아까워하는 아이에게 사진으로 남기자고 권하며 "물건은 비워도 기억은 남기자"라고 말하는 장면도 좋았어요.


시간을 다루는 장은 아이에게 시간이 투명하게 느껴진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약속을 못 지키는 까닭이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간 감각이 아직 자라는 중이기 때문이라고 읽어 내는 시선이 다정했어요. 그래서 처방도 시계 읽기 훈련으로 가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만화 한 편이 이십 분, 양치 모래시계가 삼 분이라는 식으로 아이가 이미 아는 단위에 시간을 걸어 둡니다. 이십오 분 집중에 오 분 휴식을 붙이되 저학년은 이십 분, 고학년은 삼십 분으로 조정하고 쉬는 시간이 오 분을 넘기지 않게 한다는 기준도 구체적입니다. 끝이 보일 때 집중이 살아난다는 설명에는 어른도 고개를 끄덕이게 될 거예요.


후반부로 갈수록 시선이 아이에게서 부모 쪽으로 옮겨 갑니다. 관계를 다룬 장에서는 에너지를 어디에 쓸지 구역을 나눠 보라고 권해요. 가족과 소수의 진솔한 사이에는 온전히 쏟고, 학교나 업무 관련 창구는 확인만 하고 알림을 꺼 두고, 들여다볼수록 지치기만 하는 곳은 비우라는 제안입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못을 박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 하면 내 마음의 용량은 결국 바닥나고 맙니다." 직장맘은 시간이 모자라 죄책감을 안고 전업맘은 경계가 없어 소진된다는 진단도 인상 깊었어요. 개인의 사정을 탓하는 자리에서 물러나 정리되지 않은 공동체 문화를 지목하는 지점에서 이 한 권의 시야가 한 뼘 넓어집니다.


아쉬운 곳도 있었습니다. 관계 파트의 주어가 거의 내내 엄마예요. 공간과 시간을 이야기할 때는 부모 전반을 향하던 문장이 여기서만 한쪽으로 기웁니다. 거절을 연습하고 단톡방을 줄이는 일이 왜 엄마의 몫으로 배치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끝까지 나오지 않아요. 아빠나 조부모, 다른 양육자가 이 과정에 어떻게 들어오는지 다룬 한 절이 있었다면 훨씬 단단했을 것 같습니다. 속을 먼저 살피라고 강조해 놓고 곧바로 투명 수납함과 라벨과 타이머 게임이 따라 나오는 흐름도 조금 급하게 느껴졌고요.


그래도 읽고 나서 손에 쥐게 되는 것이 분명한 안내서입니다. 아이 방 문을 열 때마다 한숨부터 나오는 분에게는 한 칸에서 출발하라는 제안이 실제로 힘이 될 거예요. 아이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정작 제 책상과 제 휴대폰 알림 목록을 돌아보게 만드는 문장이 적지 않았고, 어쩌면 그 순서가 이 책이 노린 설계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가 먼저 정돈될 때 아이도 따라 정돈된다는 결론은 익숙한 말이지만, 사례를 하나씩 따라 읽고 나면 그 익숙한 말이 다르게 들려요.


아이 방 한 칸을 정돈하는 일에서 시작해 부모의 관계와 마음까지 닿는 실전 정리 교육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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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맛있는 고기 요리 레시피 55 - 프렌치 셰프가 알려주는
후카자와 아야 지음, 최선아 옮김 / 시그마북스 / 2026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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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굽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문을 여는 요리책은 처음이었습니다. <매일 맛있는 고기 요리 레시피 55>의 첫 레시피가 그렇습니다. "굽지 않고 전기밥솥에 1시간 30분 동안 그대로 넣어 두기만 하면 입에서 녹아내리는 로스트포크가 완성됩니다." 준비물은 돼지 목살 한 덩이와 소금, 설탕, 마른 허브 조금, 월계수 잎 한 장. 밑간해서 랩으로 감싸고 지퍼백의 공기를 뺀 다음, 뜨거운 물을 부은 내솥에 잠기도록 넣고 보온 버튼을 누르면 됩니다. 프렌치 셰프가 알려주는 고기 요리라고 해서 조금 긴장했는데, 첫 장부터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어요.



표지도 그 태도를 미리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이끼빛 도자기 접시에 로스트비프가 담겨 있고, 겉면은 진하게 익었는데 안쪽은 곱게 분홍입니다. 크레송 몇 줄기 말고는 장식이랄 게 없고 나머지는 흰 여백이에요. 아래쪽 띠에 놓인 네 컷이 재미있습니다. 얼음 띄운 오차즈케, 치즈가 흘러내리는 핫샌드위치, 냉파스타, 스프링롤. 고기 요리책의 얼굴에 밥과 빵과 면이 나란히 올라와 있는 셈인데, 목차를 펼치면 그게 편집자의 취향이 아니라 이 책의 구조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이 도서는 북유럽 카페 서평단을 통해 받았습니다.


로스트포크 한 덩이는 세 갈래로 흩어집니다. 두껍게 썰어 홀그레인 머스터드와 치즈를 얹고 겉에 버터를 발라 약한 불로 천천히 구우면 핫샌드위치가 되고, 막대 모양으로 잘라 시소잎과 오이, 당근과 함께 라이스페이퍼에 말면 스프링롤이 됩니다. 세 번째가 인상적이었어요. 식은 밥에 얇게 썬 고기를 올리고 차게 식힌 다시마 육수를 붓는 것으로 끝나는 오차즈케입니다. 조리 단계가 두 줄이에요. 우메보시와 양하, 와사비, 얼음 몇 조각을 곁들이라는 말이 붙어 있고, 사진 속 초록 그릇에 얼음이 떠 있는 장면이 이 책에서 가장 시원한 컷입니다.


밑간에 설탕이 소금과 같은 분량으로 들어가는 게 처음엔 의아했는데, 단맛을 내려는 게 아니라 고기가 수분을 붙들게 하려는 장치더군요. 그리고 저자가 여러 레시피에서 반복해 권하는 습관이 하나 있습니다. 냉장고에서 하룻밤 재워 두라는 것. 특별한 기술은 거의 요구하지 않으면서 기다림만은 양보하지 않는 셈입니다.


닭 근위 콩피도 같은 방식입니다. 정통 콩피는 재료가 잠기도록 기름을 붓고 아주 오래 익히는 프랑스식 보존 조리법인데, 가정에서 그대로 하기는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적은 기름으로 20분, 이름도 '콩피 스타일'이라고 붙였습니다. 흉내 낼 수 있는 데까지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솔직하게 비워 둔 태도가 제목에 그대로 드러나요. 근위의 질긴 막을 칼로 저며 내는 손질 사진이 실려 있는 것도 고마웠습니다. 손이 잘 가지 않던 재료라 그 한 컷이 실제로는 가장 큰 도움이 될 것 같더군요.


버리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콩피에 썼던 기름은 감자를 굽는 데 다시 쓰이고, 마무리로 살짝 데워 샐러드 위에 두르는 것까지 이어집니다. 소고기 자투리살은 리예트가 되었다가 감자와 섞여 크로켓 속으로 들어가고요. 레시피마다 냉장 보관 며칠이라고 작은 상자에 적어 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처음부터 남기고 다시 꺼내 먹는 걸 전제로 짜인 책이라는 뜻이니까요.


가장 마음에 남은 페이지는 뜻밖에도 프렌치와 거리가 먼 쪽이었습니다. 소고기 우엉 생강 조림. 우엉을 연필 깎듯 얇게 어슷썰라는 설명이 붙어 있고, 소개 문장에는 만든 다음 날 맛이 더 배어들고 식어도 맛있으니 도시락으로도 좋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이 책 전체의 성격을 대신 말해 주는 것 같았어요. 다음 날 더 맛있어지는 음식을 알려주는 요리책은 결국 오늘 저녁 한 끼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그 조림에 지단 채와 밥을 섞어 삼각형으로 뭉치면 다음 날 주먹밥이 됩니다.


다만 크로켓 페이지에서는 한 번 멈칫했습니다. 제목은 구운 크로켓인데 마지막 단계에는 튀김기름에서 노릇해질 때까지 튀긴다고 되어 있어요. 빵가루를 미리 볶아 쓰는 오븐식 조리와 튀김 조리 사이 어디쯤인 것 같은데, 원서 표기의 문제인지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차이인지는 알기 어려웠습니다. 사소한 대목이지만 요리책은 문장 한 줄이 곧 동선이 되는 책이라, 이런 부분은 조금 더 또렷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았어요.


리예트 챕터에는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차갑게 잘 식히면 버터가 굳으면서, 폭신하게 완성됩니다." 왜 이 음식이 식혀야 하는 음식인지를 길게 늘어놓지 않고 한 줄로 정리해 버립니다. 프라이팬 하나로 10분이면 된다는 리예트가 덩어리 고기 책 한복판에 놓여 있는 것도 저자 나름의 배려로 읽혔습니다.


사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네요. 완성된 접시가 페이지마다 큼직하게 들어가 있고, 손질하고 끓이는 중간 과정도 사진으로 이어집니다. 글자만 따라가는 책이 아니라 넘기는 재미가 있어요. 오래 들여다보게 되는 컷이 여럿이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밥상에 바라는 게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가짓수를 늘리기보다 하나를 제대로 익혀 접시에 담아 내고 싶어지는 쪽으로요. 이 책이 위로가 되는 지점도 거기 있었습니다. 재우고, 넣어 두고, 그다음은 도구에 맡기라고 말해 주니까요. 서평단으로 여러 책을 만나 왔지만 읽고 나서 냉장고 문을 한 번 열어 보게 만드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이 한 권이 그랬습니다.


불 조절에 몇 번 실패한 뒤로 큰 고깃덩이를 슬며시 피해 온 분이라면 얻어 갈 게 많을 겁니다. 손님상 메뉴가 늘 비슷해서 고민이라면 응용 레시피 쪽만 훑어도 실마리가 잡힐 거예요. 이미 수비드 장비를 갖추고 저온 조리에 익숙한 분에게는 새로운 정보가 그리 많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처서가 지나면서 저녁 공기가 슬쩍 달라졌습니다. 아직 한낮은 덥지만 곧 주방에 오래 서 있어도 견딜 만한 계절이 올 테고, 그 전까지는 차가운 오차즈케 쪽이 어울리겠지요. 여름 끝과 가을 초입을 한 권 안에서 오갈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은 지금 꺼내 보기 좋은 도서입니다.


밥솥에 맡기고 하룻밤 기다리면 되는, 다음 날 더 맛있어지는 고기 요리 55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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