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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타는 미술관 - 그림과 연애하듯 살아가다, 감상X데이트코스X아트테크
김용임 지음 / 책이라는신화 / 2026년 5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표지를 먼저 봤습니다. 연분홍 바탕에 파스텔톤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고, 그 앞을 검은 옷차림의 남녀가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지나갑니다. 도시는 납작한 일러스트인데 두 사람만 유화 질감으로 얹혀 있어서 눈이 자꾸 그쪽으로 갑니다. <썸타는 미술관>이라는 가벼운 제목과 정통 회화가 한 화면에 놓인 셈인데, 이 조합이 책의 성격을 미리 일러주더군요. 미술관을 우러러보게 만드는 대신 걸어 들어가 볼 만한 거리로 낮춰 놓겠다는 뜻으로 읽혔습니다.
지은이는 아트디렉터 김용임 씨입니다. 기업 비서실에서 최연소 팀장으로 일하다 그림 한 점을 만난 뒤 인생의 방향을 튼 분이라고 해요. 목차부터 미술관 구조를 그대로 빌려 왔습니다. 상설관에서 긴장을 풀어주고, 제1관에서 감정으로 그림을 만나고, 제2관에서 혼자 서는 시간을 다루고, 제4관과 제5관에서 예술가의 사랑과 명화 속 관계를 살핍니다. 뒤쪽 특별관은 국내 미술관 데이트 코스, 별관은 아트테크 정보로 방향을 틀고요. 판형과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아서 며칠에 걸쳐 편하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가장 오래 붙들려 있던 곳은 제2관이었어요. 도입에서 중국 경극의 변검을 끌어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을 바꿔 쓰며 산다는 이야기인데, 회사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친구와 가족 앞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범위를 넓히더군요. 돈 잘 버는 아빠, 다정한 엄마, 말 잘 듣는 자녀 같은 기대를 예로 들면서 저자 스스로 상투적인 표현이라고 먼저 인정하고 들어갑니다. 그 솔직함 덕에 방어하지 않고 읽을 수 있었어요. 이어지는 문장이 이랬습니다.
"나에게 가장 무심한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일 때가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몰라서라는 말이 뒤에 붙습니다. 마흔 후반쯤 되면 자기 관리라는 말을 건강검진 결과지로만 이해하게 되는데, 이 대목은 다른 쪽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저자는 외로움과 고독을 갈라놓습니다. 외로움은 연결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 결핍이고, 고독은 스스로 고른 관계의 거리두기라는 겁니다. 앞엣것은 타율적이고 뒤엣것은 자율적이라고 정리한 뒤, 고독이 필요할 때 미술관이 최적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말해요. 감춰진 나와 만나고 싶을 때 그곳으로 가라는 문장으로 챕터가 닫히는데, 함께 실린 워터하우스의 그림에서 프시케가 여는 황금 상자와 겹쳐 놓으니 뜻이 분명해집니다.

같은 관 뒤쪽에는 김환기의 점화가 나옵니다. 이 챕터는 저자가 겪은 두 번의 이별을 먼저 꺼내 놓아요. 오랜 이웃이자 인생 선배였던 분의 부고를 받고, 퇴원하면 콩국수를 사드리려 했는데 그날은 오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개인전에 못 갔다고 송구해하는 저자에게 인연이 될 때 만나면 된다고 답했던 화가와도 그렇게 헤어졌고요. 시간 날 때 보지요, 라는 흔한 인사가 이렇게 무거워질 수 있다는 걸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 다음 검은 화면 위를 지나가는 선들을 두고, 평행하던 선이 다른 선과 만났다가 제 갈 길을 가는 그 스침과 헤어짐이 격조 있는 질서를 만든다고 읽어냅니다. 마지막 두 문장이 오래 남았어요.
"애도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는 아직이다."

제5관에서는 호퍼의 <룸 인 뉴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거실에 앉은 남녀가 나오는데 남자는 신문에 붙어 있고 여자는 건반에 손가락만 얹고 있어요. 저자는 이 장면을 두고 침묵에 여러 얼굴이 있다고 말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편안한 친밀함일 때가 있고, 생각을 정리하려는 잠깐의 고요일 때가 있으며, 상대가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는 자존심일 때도 있다는 겁니다. 최악은 무관심이나 단절로 대화를 접어버린 상태고요. 이 분류가 이 책에서 제일 쓸모 있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조금 아쉬웠어요. 침묵의 층위를 그렇게 세심하게 나눠 놓고서도 결론은 냉각된 관계 쪽으로 비교적 빠르게 되돌아갑니다. 저자 본인도 두 사람이 외출을 앞두고 잠시 앉아 있는 것일 수 있다고 열어 놓았으면서 말이죠. 오래 산 사이의 침묵에는 편안한 쪽도 분명히 있는데, 그 얼굴 앞에 조금 더 머물러 줬다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물론 이건 화가의 의도와는 별개로 읽는 사람의 사정이 개입한 감상일 겁니다.

이어지는 곤살레스-토레스의 <제목 없음, 완벽한 연인>이 그 아쉬움을 얼마간 메워줬어요. 똑같이 맞춰 놓은 벽시계 두 개를 나란히 걸어둔 작품입니다. 처음엔 같은 시간을 가리키지만 하나가 빨라지고 하나가 느려지면서 결국 어긋나요. 저자는 사랑이 차이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 차이를 받아들이고 같은 방향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씁니다. 완벽한 연인이라는 제목이 역설이라는 설명도 덧붙이고요. 도판 속 두 시계는 아직 거의 같은 자리에 있는데, 오른쪽 초침만 아주 조금 앞서 있습니다. 사진은 한 순간에 멈춰 있으니 어긋나는 과정 자체는 실물 앞에서만 볼 수 있겠더군요.
뒤쪽 별관은 결이 확 달라집니다. 아트테크 기본 상식을 다루는데, 시장 흐름을 태동기와 폭발기, 조정기로 나눈 뒤 지금을 재편기라 부르며 진짜들만 남은 생존자 리그라고 표현해요. 열풍이 지나간 자리를 냉정하게 보는 시선이라 믿음이 갔습니다. 그런데 인기 배경을 설명하는 대목에 미술품은 가치가 내려가는 일이 없다는 문장이 슬쩍 들어가 있어요. 바로 앞에서 경기침체로 구조 조정을 겪었다고 써놓고, 몇 줄 아래 리스크 항목에서는 잘못 접근하면 자금이 묶이거나 손실이 난다고 하는데, 그 사이에 낀 이 단정만 홀로 붕 떠 있습니다. 투자 이야기는 제 몫이 아니라 판단은 접어두더라도, 나머지 서술이 워낙 조심스러워서 이 한 줄이 더 눈에 걸렸어요. 초보 컬렉터를 향한 마지막 조언이 숫자만 보면 피로해진다는 말이었던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애정이 곧 정보력이라는 문장 쪽이 이 책의 본심에 가까울 겁니다.

읽는 동안 미술 지식이 늘었다기보다 미술관이라는 장소가 다시 보였다는 쪽이 정직한 소감이에요. 다만 혼잡을 피해 평일 오전에 가라는 조언은 두 군데에서 반복되는데, 주중에 묶여 있는 처지에서는 실행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폐장 한두 시간 전이라는 대안이 함께 적혀 있어서 그 문장을 접어 두었습니다. 미술이 낯설어 입구에서 망설여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첫 장부터 편하게 들어갈 수 있을 테고, 오래 함께 산 사람과 말수가 줄었다고 느끼는 이에게는 호퍼와 두 시계 이야기가 다르게 읽힐 겁니다.
입추이자 8월의 한복판입니다. 밖에 십 분만 서 있어도 셔츠가 젖는 날씨인데, 이런 때야말로 서늘하게 관리되는 전시장이 고마운 계절이지요. 더위가 물러갈 즈음 가까운 미술관 한 곳쯤 다녀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자여도 괜찮고, 오래된 사람과 나란히 걸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표지 속 두 사람처럼 우산 하나 나눠 쓰고 말이죠.
그림 앞에서 어색했던 마음을 풀어주고, 혼자와 함께 사이의 거리를 다시 재보게 하는 미술관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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