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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마키아벨리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어나니머스 옮김 / RISE(떠오름) / 2026년 7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지난주에 받아 두고 여태 붙들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일 마키아벨리>가 그렇습니다. 두께 때문은 아니었어요. 한 절이 두어 쪽으로 끝나고, 설명이나 사례도 거의 붙지 않습니다. 결론만 남긴 짧은 글 백스무 개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구성이라 마음먹으면 하루에도 다 넘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너 절을 지나면 속도가 저절로 떨어집니다.

먼저 아쉬웠던 점부터 적어 두겠습니다. 모든 절이 단정문의 연속으로 쌓이다 보니, 여러 편을 이어서 읽으면 리듬이 비슷하게 들립니다. 힘은 세지만 예외를 품을 여백은 좁아요. 사람이 늘 계산으로만 움직이지는 않고, 뒤늦게 도착한 마음이 그래도 고마웠던 기억이 저에게는 분명히 있거든요. 원전을 오늘의 말로 다시 쓴 책이어서 어디까지가 마키아벨리의 생각이고 어디부터가 옮긴 이의 해석인지 궁금해지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절 제목 아래에 출발이 된 원전의 장과 절이 작게 표기돼 있어 확인할 길은 열려 있지만, 그 확인을 하고 싶어진다는 것 자체가 이 도서의 성격을 말해 주는 듯합니다.
표지 이야기도 해야겠네요. 흰 바탕에 먹으로 그은 옆얼굴, 이마 자리에 삼각형 하나, 그 안에 눈이 뜨여 있습니다. 색이라고는 검정과 흙빛뿐이에요. 그림 속 시선이 정면을 향하지 않고 비스듬한 곳에 걸려 있다는 점이 한동안 눈에 밟혔습니다. 사람을 마주 보는 눈이라기에는 각도가 어긋나 있고, 사람을 읽어내는 눈이라기에는 표정이 담담합니다.
<위버멘쉬>를 쓴 어나니머스의 두 번째 고전 재해석입니다. <군주론> 한 권에 기대지 않고 <로마사 논고>와 <피렌체사>까지 함께 읽어, 여러 저작에 흩어져 있던 사유를 하나의 흐름으로 엮었다고 해요. 인간 본성, 권력의 법칙, 생존 전략, 운명과 성공. 네 개의 장에 서른 절씩 담겨 있습니다.

제1장 앞쪽, 늦은 선의를 다룬 절에서 걸음이 멈췄습니다.
"인간은 호의의 크기보다 타이밍을 믿는다."
평소 거리를 두던 사람이 궁지에 몰린 뒤에 손을 내밀면 받는 쪽은 감사보다 의심을 먼저 꺼낸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도움이라도 도착한 시각이 다르면 성격이 달라진다는 것이죠. 이어지는 대목은 더 서늘합니다. 신뢰는 위기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위기가 오기 훨씬 전에 만들어진다는 것. 한 번의 선물이 오래된 무관심을 지우지 못한다는 표현 앞에서는 제 지난 몇 해를 셈해 보게 됐습니다.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마음이 언제 도착했는지까지가 관계의 실체더군요.
제2장에서는 곁에 둔 사람이 지도자를 증명한다는 절을 따로 표시해 뒀습니다.
"잘못된 인사는 운명이 아니라 판단의 실패다."

무능한 사람이 중요한 자리에 있다면 그의 무능보다 그를 앉힌 사람의 무능이 먼저 드러난다는 진단입니다. 뒤이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하나로 압축해요. 그가 누구의 이익을 먼저 계산하는가. 자기 이익부터 셈하는 사람은 이미 다른 주인을 섬기고 있다는 말이 뒤따릅니다. 여기까지는 위정자의 이야기로 읽히지만, 보상이 부족하면 불만이 자라고 권한이 지나치면 야망이 자란다는 대목에 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연차가 쌓이면 누구나 사람을 고르고 배치하는 자리에 서게 되고, 그 선택은 결국 자기 실력의 기록으로 남습니다. 조직은 바깥의 적보다 안에서 잘못 앉힌 사람 때문에 먼저 흔들린다는 문장으로 절이 닫히는데, 이 자리에서는 위로보다 경고 쪽이 컸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가장 위험한 적이 된다는 절은 제목만 보면 냉소에 가깝습니다. 실제 내용은 조금 다릅니다. 배신의 뿌리를 미움에서 찾지 않고 욕망에서 찾거든요.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신뢰와 함께 바람도 자란다는 것. 은혜가 배신을 막아 주지 못하는 이유도 담담하게 설명합니다. 사람은 받은 것을 기억하기보다 아직 갖지 못한 것을 바라보니까요. 다만 저자는 배신이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지는 않는다고 덧붙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등을 돌리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가장 어리석은 쪽은 배신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배신할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놓고도 끝내 그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절을 닫습니다.

뒤쪽 두 장으로 갈수록 화살의 방향이 바뀝니다. 멈춰야 할 순간을 아는 것이 진짜 실력이라는 절에서는, 사람들이 실패해서 무너지기보다 성공한 뒤에 멈추지 못해 무너진다고 말합니다. 승리가 사람을 대담하게 만들고 그 대담함이 손쉽게 오만으로 바뀐다는 것. 한 번 맞은 판단이 다음에도 맞으리라 믿는 순간 성공이 함정으로 변한다는 흐름입니다. 긴장이 풀리고 경계가 사라질 때 운이 조용히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는 구절은 이 책에서 보기 드물게 부드러운 표현이었어요.
바로 뒤에 놓인 절도 결이 같습니다. 큰 사람은 자리가 아니라 역할을 선택한다는 이야기요. 로마에서는 어제 최고 권한을 쥐었던 사람이 오늘 다른 이를 돕는 일을 굴욕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가 앞에 서느냐보다 가장 필요한 곳에 적합한 사람이 서는 일이 중요했으니까요.
"현실은 직책보다 역할을 먼저 요구한다."
앞에 설 줄만 아는 사람은 절반만 성장한 사람이라는 진단이 이어집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직함이 하나둘 붙었다가 언젠가는 떼어지기도 하는데, 그 과정을 실패의 목록으로 읽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는 대목이었습니다.
차가운 책이라는 인상으로 펼쳤다가 다 읽고 나니 그렇게만 부르기는 어려웠습니다. 이 도서의 위로는 등을 쓸어 주는 종류가 아닙니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해서 덜 다치게 하는 쪽입니다. 호의를 베풀고도 오해받아 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제1장 앞쪽에서 자주 멈추게 될 거예요. 조직 안에서 사람을 뽑고 맡기는 일을 하고 있다면 제2장이 유난히 따갑게 읽힐 테고요. 다만 따뜻한 문장으로 마음을 데우려고 펼친 독자에게는 결이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북유럽 카페 서평단으로 받아 읽었습니다. 서평단 활동을 하다 보면 순하게 흘러가는 책을 주로 만나게 되는데, 이번처럼 읽는 사람의 판단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안내서를 만나면 자세가 달라지더군요. 밑줄을 긋는 대신 여백에 제 생각을 적어 두게 됐습니다.
입추가 코앞인데 더위는 아직 물러날 기미가 없습니다. 매미 소리가 하루 종일 이어지고 해가 길어 저녁이 늦게 옵니다. 이런 계절에는 마음이 풀어지기 쉬운데, 이 한 권은 그렇게 풀린 마음을 조금 붙잡아 줍니다. 짧은 글 한두 편 읽고 덮어 두었다가 며칠 뒤 다시 펼치기에 알맞아요.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바뀌는 때까지 곁에 두고 천천히 갈 생각입니다.
믿음을 거두게 하는 대신, 그 믿음이 무엇 위에 서 있었는지 확인하게 만드는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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