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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의 품격 - 판단의 품격을 높여주는 아홉 번의 생각 수업
투리 문테 지음, 이영래 옮김 / 21세기북스 / 2026년 9월
평점 :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땅콩버터 취향에 정치가 묻어난다고요? <사고의 품격> 서평

부드러운 땅콩버터를 좋아하세요, 알갱이가 씹히는 쪽을 좋아하세요?
싱거운 질문 같지만, 이 대답에 정치 성향이 묻어난다고 하면 다들 고개를 갸웃하실 거예요. 그런데 <사고의 품격>에 진짜로 그런 데이터가 나옵니다. 누가 올렸는지도 모를 '부드러운(알갱이가 없는) 땅콩버터가 최고다'라는 의견을 정치 성향별로 나눠 봤더니, 왼쪽으로 한 칸씩 갈수록 반대가 늘었다고 해요. 극좌에서는 44퍼센트가 반대했는데 극우로 가면 16퍼센트까지 떨어지더군요.
저자는 이 순간을 '반(反)유레카 순간'이라고 부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다는 깨달음이라는 뜻이래요.
이 표현에서 피식 웃음이 났어요.
10월 첫 화요일이에요. 아침저녁 공기가 제법 서늘해지니 책 생각이 더 나는 계절이 온 거 같습니다. 예전엔 퇴근하면 유튜브만 틀어 놓다 잠들곤 했는데, 서평단 활동을 하면서부터는 새 책 오는 날이 은근히 기다려지더라고요. 이번 책은 21세기북스에서 나온 투리 문테의 <사고의 품격>이고, 이영래 님이 옮겼어요. 보통 교양서보다 제법 두툼하고 손에 들면 묵직한 편이라 처음엔 살짝 긴장했는데, 막상 펼치니 이야기가 술술 넘어가는 쪽이었습니다.

표지를 보면 갈색 격자 칸칸이 DNA, 신전, 유인원, 모래시계 그림이 들어가 있어요. 책을 펼쳐 보면 그 그림들이 왜 거기 있는지 금방 알게 됩니다. 기후와 지리, 문화, 몸, 유전자, 감정, 집단까지, 내 생각이 어디서 흘러들어 왔는지를 아홉 번의 수업으로 나눠 따라가는 구성이거든요.
책은 카를 융의 문장으로 문을 엽니다. "사람은 생각의 주인이 아니다.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는 주인이다." 첫 장부터 내 생각이 정말 내 것이 맞느냐고 묻는 거죠.
머리말의 저자 이야기가 꽤 독특해요. 투리 문테는 수피교 스승 '아가'를 따르는 공동체에서 자랐대요. 여름이면 스페인 남부의 거대한 캠핑장에서 전 세계에서 온 2,000명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지냈다고 하고요. 심리학자, 소프트웨어 개발자, 무용수, 카펫 제작자가 한데 모여 밤늦도록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열 살 무렵부터 의심이 싹텄고, 대학교 1학년 무렵 "만약 문제가 내가 아니라면?" 하는 전환을 겪어요.

여기까지는 흔한 성장담 같지만 그다음이 재밌습니다. 20년쯤 전에 부모님도 똑같은 전환을 겪었는데, 방향이 정반대였다는 거예요. 아들이 믿음 밖으로 걸어 나올 때 부모는 믿음 안으로 걸어 들어간 셈이죠. 지금도 신을 믿느냐고 여쭤보면 두 분은 융의 말로 답한대요. "믿을 필요가 없다.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한 집, 같은 스승, 정반대의 결론.
저자는 누구 진실이 맞는지 따지는 대신 "왜 나와 부모님은 다르게 생각하는가"를 묻기 시작합니다. 이 질문 하나가 책 전체를 끌고 가는 엔진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 질문을 붙들고 저자는 2019년에 '의견의 백과사전' 팔리아를 만들어요. '식물은 의식이 있는가'부터 호날두가 메시보다 뛰어난가까지, 1,000개가 넘는 질문을 정리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 야심 찬 프로젝트가 잘 안 풀렸대요. 찾아오는 사람은 대부분 숙제 자료를 찾는 고등학생이었고, 사이트를 두 번이나 갈아엎고 뉴스레터에 의견 지도까지 내봤지만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러다 마지막 실험으로 '투표' 버튼 하나를 달았더니 첫 6개월 만에 투표가 100만 번을 넘었답니다. 기획안 몇 번 엎어 본 직장인이라면 이 대목에서 웃음 반 한숨 반이 나오실 거예요. 공들인 건 조용하고 버튼 하나가 대박 나는 일, 회사에서도 심심찮게 보니까요.

그렇게 모인 데이터에서 이상한 상관관계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별은 두 개뿐이다'에 동의하는 비율은 남성이 67퍼센트, 여성이 45퍼센트였대요. '외계인은 존재한다'는 믿음은 세대가 내려갈수록 강해지고요. 저자는 결국 이런 의문까지 갑니다. "우리가 진보나 보수 또는 중도로 기우는 이유는 그저 그것이 맞다고 '느껴지기' 때문은 아닐까?"
1부 첫 수업에서는 싱가포르가 나와요. 1965년 독립 무렵엔 우간다와 비슷한 수준이던 나라가, 지금은 지표만 보면 북유럽 국가처럼 보일 정도로 잘사는 나라가 됐대요. 그런데 껌이 영토 전역에서 금지이고, 남의 눈에 띌 수 있으면 집 안에서도 알몸으로 다니면 안 된다고 합니다. 이 낯선 조합을 두고 저자는 "하지만 얼마간은 날씨도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며 몽테스키외를 불러와요. 몽테스키외는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같은 오페라를 봤는데 관객 반응이 너무 달라서, 양의 혀를 얼려 보고는 추운 나라 사람들은 감각이 둔하다고 결론 내렸다고 하네요.
그 결론은 틀렸지만 저자는 방향을 살짝 틀어요. 덥고 습한 곳은 병원체가 번성하는 곳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행동적 면역체계'를 키워 왔다는 거죠. 코로나 때 마스크 쓰고 손 소독제 바르던 게 바로 그 면역체계가 본격적으로 돌아간 결과였대요. 곰팡이 핀 음식을 버리는 것도 같은 맥락인데, 괄호 안에 "치즈 같은 특정 음식을 제외하면"이라고 슬쩍 붙여 둔 게 재밌었어요.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태도나 엄격한 규범도 이렇게 몸을 지키려던 습관이 생각으로 굳은 거라고 보더군요.
이 이야기가 Class 4에서 다시 이어지는 게 신기했습니다. 혀에 있는 미뢰가 많은 사람일수록 우파에 투표하는 경향이 있대요. 몽테스키외가 혀를 들여다본 건 아주 엉뚱한 짓은 아니었던 셈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강한 맛에 민감한 것도 큰 소리에 더 놀라는 것과 같은 결이라고 해요. 위협이 눈앞에 있든 입 안에 있든 말이에요.

음식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더 하면, 중도는 와인보다 맥주를 좋아하는 편이래요. 저자가 그 이유를 짐작하다가 수제 맥주 양조장이 "중산층 중년 중도 성향 아버지들" 사이에서 유행해서일까 하는 대목에서는 좀 뜨끔했습니다. 세 단어 중 두 개는 확실히 저한테 해당하거든요. 나머지 하나는 비밀로 하겠습니다.
표정이 애매한 얼굴 사진을 보여 주면 보수 성향은 위협적으로, 진보 성향은 좋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는 실험도 있어요. 회의 중에 상사 표정 하나 읽느라 진땀 빼 본 사람이라면 남 일 같지 않으실 거예요.
혐오 민감성 대목은 가볍게 넘기기 어려웠어요. 코를 찡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는 반응은 원래 감염원에서 몸을 지키려고 생긴 거래요. 그런데 이게 집단 전체로 번지면 특정한 사람들을 '불결하다'고 몰아세우는 데까지 간다는 이야기거든요. 역사 속 사례까지 이어지다 보니 읽는 속도가 저절로 느려졌습니다.
솔직히 1부 초반에는 날씨가 생각을 정한다는 말이 좀 세게 들렸어요. 덥고 습하면 권위적이고 춥고 건조하면 관대하다니, 지도만 펼쳐 놓으면 사람 속을 다 안다는 얘기처럼 들려서요. 그런데 저자가 혹한의 아이슬란드도, 덥고 습한 태국도 진보적이라는 예외를 먼저 꺼내 놓더군요. 기후가 태도에 미치는 유일한 영향은 아니라면서요. 땅콩버터 패턴도 끝내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여론 분석이 과학보다 소설에 가깝게 느껴질 때가 있다고 털어놓습니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는 쪽이 오히려 믿음이 가는 거 같아요.
다른 페이지보다 천천히 정독하듯 읽었던 부분은 2부에 나오는 이 질문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나 '나는 항상 X가 맞다고 믿어왔는데, 그것이 타당한지 다시 확인해봐야겠다'라고 생각한 날이 있었는가? 아마 손에 꼽을 것이다."
40대 후반이 되니 이 문장이 꽤 아프게 찔렀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생각을 다시 확인하는 일보다 지키는 일에 더 힘을 쓰게 되잖아요. 회의에서 반대 의견이 나오면 듣기도 전에 방어 논리부터 세우게 되고요. 저자는 반박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우리는 자기 생각 속 모순을 거의 고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동의하지 않는 생각과 마주하는 일이 스스로를 의심하는 법을 배우는 유일한 길이라는 거예요.
여기서 1부의 '행동적 면역체계'가 2부에서 '지적 면역체계'로 짝을 이루는데, 저는 이 연결이 <사고의 품격>만의 묘미 같았어요. 남의 말을 덥석 믿지 않는 확증편향이 사실은 속지 않으려는 방어 장치라는 거죠. 혼자 있을 땐 결함인데, 둘이 부딪치면 쓸모가 생긴대요.
예시로 영화 (아담스 패밀리)의 모티시아와 고메즈 부부가 나오는데 이게 참 재밌습니다. 결혼기념일 저녁, 모티시아는 지배인이 마음에 드는 프랑스 식당 에스카르고에 가고 싶어 하고, 고메즈는 늘 가던 식당만 고집해요. '매력적인 지배인'은 남편을 설득하는 데 하등 쓸모가 없으니 모티시아는 다른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백조 내장 요리가 이 도시 최고라든가, 소믈리에가 드라큘라 백작의 직계 후손이라든가 하는 이유요. 저자는 이걸 이렇게 표현해요. "이런 고집과 사후 합리화의 난투극 속에서 기적이 피어난다." 결혼기념일 식당 하나 고르는 일도 협상이라는 걸 아는 중년 남편이라면 웃음이 나실 대목이에요.
추론을 떠올릴 때 혼자 턱을 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말고,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떠올리라는 말도 좋았어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다들 시끌벅적하게 논쟁하는 그림이요. 파인만의 이 말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첫 번째 원칙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가장 속이기 쉬운 사람이다."
뒤로 갈수록 데이터가 든든하게 받쳐 줘요. 까다로운 카드 문제에서 똑똑한 사람들도 85퍼센트가 틀렸는데, 평범한 학생들이 소그룹으로 모여 풀었더니 80퍼센트가 맞혔대요. 저자 말로는 단거리 선수를 100미터 2.5초에 뛰게 만드는 수준이랍니다. 위키백과에서도 편집자들 의견이 극도로 갈린 주제의 문서일수록 품질이 최상위권이었다고 하고요. 다른 분야 사람들이 함께 일할 때 획기적인 발견이 자주 나왔다는 케빈 던바의 연구를 읽으면서는 다른 부서 사람이 한 명 끼면 꽉 막혔던 회의가 풀리던 순간들이 떠올랐어요.
감사의 말까지 꼭 읽어 보시길 권하고 싶어요. 집필에 3개월이면 된다던 사람에게 실제로는 3년이 걸렸다며, 그에 대한 감사가 "저주를 겨우 넘어선다"고 써 놨거든요. 3개월짜리 일정이 3년으로 늘어나는 건 회사나 출판이나 똑같은가 봅니다. 저자는 그 끝에 이렇게 덧붙여요. "결국 이 책은 대화의 기적에 관한 책입니다."
누가 맞는지 끝장을 보는 대화에 지친 분이라면 특히 반가우실 책이에요. <사고의 품격>은 상대를 이기는 기술 대신, 내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부터 들여다보게 해 줍니다. 한 번 읽고 꽂아 두기엔 아깝고, 생각이 꽉 막혔다 싶을 때 다시 꺼내 보면 좋을 거 같아요. 읽는 내내 재미있었고, 덮고 나니 조금은 겸손해진 기분이더라고요.
은행잎이 하나둘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10월이에요. 올가을엔 생각이 다른 사람 말에 귀를 조금 더 열어 보려고 합니다. 좋은 책 만나서 마음이 든든한 화요일이네요. 다들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
내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 알면 다른 생각과도 웃으며 대화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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