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바로 이 시대의 키워드였다. 루터나 칼뱅 같은 종교개혁가들도 기본적으로는 "그게 그리스도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물음을출발점으로 삼아, 사명 달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길을 떠났다.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 제안‘을 못박아 내걸고 로마 교황청을 비난한루터도, 제네바를 독재적인 교회 도시로 만들고 예배 의식과 제도에서부터 시민의 일상생활까지 구석구석 규제하고 반대파를 모조리 추방하고 결국에는 화형까지 감행한 장 칼뱅도 이 키워드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정치 공동체가 어떻게 그런 인연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이해하기란쉽지 않다. 우리는 말하고, 다른 이를 대신해서 말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 그러나 타자와 나 자신의 차이를 붕괴시킬 만한 방법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라고 말할 때 우리는 바로 그 문제들을 가리키는 것 외에 다른 어느 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다. 아마 그 문제해결 불가능할 것이고 또 해결 불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이렇듯 우리 스스로를 우리 밖에 배치하는 일은 신체적 삶으로부터, 신체의 취약성과 신체의 노출로부터 결과하는 것같다.
그러나 우리는 개념과, 개념이 파악하고자 하는 것을 구별해야만 한다. 플라톤이 목적지에 도달한 인식을 직관, 즉 직접적인 인식으로 표현할 때, 그는 이러한 구별을 언급한다. 또한 그는 이것을 향연편에서뿐만 아니라, 국가론에 나타난 "동굴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고 최고의 철학적 인식을 "존재의 관조"(TOUOUTOS Éa 248b)라고 묘사하고 있는 파이드로스편에서도 설명하고 있다.
개성의 상실과 집단주의 경향이 온갖 파괴력을 발휘하며 성행하고 있는 시대에 개성화를 둘러싼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며 심지어위험스러운 문제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의 서구 문명사회가 양자택일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를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독재 국가의 국민들이 개인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또한 정치적으로 그렇게 된 위협을 받고 있으며 전혀 그것을 방어할 적절한 수단이 없다는 것 또한사실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물음이 시급히 제기된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박탈당하도록 내버려 두려는가? 그것이 박탈당하는것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완벽하게 무릎 꿇고 나서야 나는 정말로 겸손해진다는 게 어떤건지를 알았기에, 신의 분노나 경멸을 받더라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온화한 목소리로 "이제 우리, 시작할 수 있겠지?"라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그 지점에 이를 때까지 나는 내 사랑의로부터 달아났고, 그만큼 내 삶을 거부했다. 사랑으로 되돌아가는건 삶이라는 모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것은 당신의 본래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