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슈타인과 같이 명석하며 지적이며 섬세한 성격의 독일 군인들에게닥친 비극은 그들의 영도자인 히틀러의 목표와 수단에 대해 못마땅해하면서도 조국을 위해 성실히 복종하여야 한다는 딜레마였다

히틀러는 가히 거의 절대적인 직관과 본능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절대 멈추지 않고 진행될 그리고 혹자가 빛나는 사건들의 연속이라고 표현한 연이은 성공은 우리를 패배감(Downfall)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었다.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이 전쟁 없이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왜 이번 폴란드 문제에서는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를보자면, 히틀러가 1938년 군대의 진주를 통해 위협을 가했음에도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 그러나현재의 정세는 매우 미묘했으며 히틀러가 의도한 협상, 기만과 위협을 통한 행보는 매우 위험해 보였기에 마치 어린 아이를 우물가에 놓아둔(Taking the pitcher to the well)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시점에서 위기가 발생한다면 폴란드에 대한 영국의 보장협약이 이행될 것이 확실했으나 우리는1914년 독일의 지도자들이 그러했던 것과 달리, ‘본인은 동부와 서부에서 양면전선을 촉발시키는 경솔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히틀러의 단언을 떠올렸다. 그러한 언급은 비록 그가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부족할지 몰라도, 최소한의 현실 감각은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군부 내의 측근에게본인이 단치히(Danzig)와 폴란드 회랑(Poland Corridor)을 얻기 위해 세계대전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미숙하게 행동할 만큼 어리석지 않음을 소리 높여 명백히 확인해 주었다.

만일 폴란드 피우수트스키 원수의 영향력이 감소하거나(Pilsudski‘s voice was silent), 수많은 민족주의 그룹이 폴란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게 된다면 동프로이센 또는 상부 슐레지엔으로 폴란드가 침공할 것이라는 점은 예전에 폴란드가 빌나(Vilna)에 진공했던 것처럼 가능한 일이었다. 이와 같은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군부는 심사숙고 끝에 정치적인 해결책을 찾아냈다. 만일폴란드가 침략자임이 증명되고 우리가 공격을 맞받아칠 수 있다면, 독일은 정치적인 지지와 당위성을 통해 불합리한 국경선의 문제를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모든 군부의 지휘관들은 국경선의 회복과 폴란드와의 정치적 관계에 대해서 현실적이고도 냉철한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러시아와 프랑스의 군사적 성장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협약 사항들을 쉽게 버릴 수있는 그들은 여전히 과거와 동일하게 적대감을 갖고 우리와 맞서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독일 배후에서 동맹국을 찾았으며, 폴란드가 사라질 운명에 처한다면 현재의 완충국으로서의 폴란드보다 더위험하고 강력한 러시아와 프랑스가 동맹국이 될 터였다.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등의 완충 국가의 소멸은 당연하게도 독일과 러시아라는 두 강대국의 세력이 충돌하게 되는 문제 발생을 의미했다. 폴란드와 접하고 있는 국경선을 변경하는 것은 상호 간에 관심이 있는 일이긴 하겠지만, 폴란드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전체적인 국제 정세에 비추어 본다면 독일에게 이득이 없었다.

그러나 운명의 굴레는 다시 한번 구르게 되었다. 히틀러가 전면에 나타나자 폴란드와 독일의 모든관계가 변해버린 것이다. 독일은 동쪽의 인접국들과 불가침조약과 우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폴란드가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악몽에서 벗어났다. 폴란드의 위협이 사라짐과 동시에 독일과 러시아와의관계는 냉각기에 접어들었으며, 우리의 새로운 영도자는 공식 석상에서 볼셰비키 체제(BoishekSystem)에 대한 적개심을 언급하였다. 폴란드와는 이러한 일련의 새로운 환경 변화로 인하여 정치적긴장이 완화되었으며, 우리에게 폴란드는 더 이상 위험 국가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히틀러가 행한 독일의 재무장과 대외적인 외교 정책들의 연속된 성공들은 폴란드가 얻은 새로운 행동의 자유를 독일의 이익에 반하여 이용하는 것을 불가능하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폴란드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독일과함께 분할하고자 할 때에도, 우리는 독일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국경선 문제에 대해 논의할 수있었다. 1939년 봄까지 육군총사령부는 폴란드에 대한 어떠한 공격 계획도 갖고 있지 않았다. 동부전선에 배치된 모든 독일군의 조치는 순수하게 방어적인 성격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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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꺼리고 황폐화를 피해 자신을 순수하게 보존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견뎌내고 죽음 안에서 자신을 보존하는 삶이 정신의 삶이다. 절대적 파열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 정신은 비로소 자신의 진실을 얻는다. (…) 정신은 부정적인 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그놈의 곁에 오래 머무름으로써만 이런 위력이다.

노력하는 한에서, 인간은 헤매기 마련이다"라는 괴테의 말마따나, 사람은 부정하는자, 안주하지 못하는 자, 끝없이 헤매는 자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안쓰럽기 그지없죠. 니체의 초인과 스피노자의 현자가 평범한 인간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한편으로 납득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그 인간적인 헤맴이 곧 진실의 움직임이라고 가르치는 철학자가 있으니, 바로 헤겔입니다. 헤겔의 진실은 한없이 멀고고요한 수평선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거세게 출렁거리는 파도입니다. 

또한 저자가 보기에 자신의 철학 작품이 동일한 대상을 다루는다른 시도들과 어떤 관계인지 규정하면, 낯선 구경꾼의 관심을 끌어들이더라도 정작 진실을 아는 데 관건이 되는 무언가는 어둠 속에 묻힌다. 참과 거짓이 맞선다는 생각을 확고히 품은 사람은기존 철학 시스템에 대한 찬성이나 반박을 기대하고 그런 시스템에 대한 설명에서 찬성과 반박 중에 오직 하나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런 사람은 철학 시스템들의 차이를 진실이 진보하여 펼쳐지는 과정으로 개념화하기보다는 그 차이에서 오직 모순만 본다. 

 마찬가지로 차이는 오히려 사태의 경계 경계는 사태가 끝나는 곳에 있다. 바꿔 말해 경계는 사태가 아닌 놈이다. 따라서 목적이나 결론들, 아울러 차이들과 이것저것에 대한평가를 제시하는 작업은 겉보기보다 더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런 작업은 사태를 다루는 대신에 항상 사태를 넘어서 있으며, 그런 삶은 사태 안에 오래 머물며 자신을 잊는 대신에 항상 다른 놈을 향해 손을 뻗기 때문이다. 그런 앎은 사태 곁에서 자신을 사태에 내주는 대신에 오히려 자기 곁에 머문다 가장 쉬운 일은 내용과 견실성을 갖춘 놈을 평가하는 것이요. 더 어려운 일은 그놈을파악하는 것이고, 가장 어려운 일은 이 둘을 결합하여 그놈의 표현을 끌어내는 것이다.

진실이 실존하는 참된 모습은 진실을 다루는 학문 시 수에 없다. 철학이 학문의 형태에 삶을 향한 사람이라는 이름리고 진정한 앞으로 되는 목표에 더 접근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것이 내가 추구하는 바다. 이 학문이어야 할 내적 필연성은앞의 본성에 있고, 이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은 오로지 절차 자체의 서술뿐이다. 한편, 이 학문이어야 할 외적 필연성은과 개별 동기들의 우연성을 제쳐놓고 그 필연성을 일반적으로 파악한다면, 내적 필연성과 동일한데, 다만 그 모습은 그 내서 발견성의 계기들의 현존재를 시대가 제시할 때의 모습이다. 따라서 지금은 철학이 학문으로 격상할 때임을 보여주는 것이 그 객상을 목적으로 가진 시도들을 정당화하는 유일하게 참된 걸릴 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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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패스 상대의 표정에 따라 작전을 바꿉니다. 상대의 표정을읽어 내지 못하면 게임을 편집할 수 없어요."
이런 의미로 쓰이는 ‘편집‘이라는 말은 참으로 신선하다. 종래의
‘편집‘이라는 말에서의 느낌보다 훨씬 더 다이내믹하고 연속적인 변화의 힘이 풍부하다.

한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나 우메사오 다다오 관장이 중시하는 ‘편집‘이라는 말은 창작이나 역사, 문화의 본질과 관련이 있다.
"영화의 본질은 편집이다."라는 말은 영화 제작의 마지막 공정에서필름을 자르거나 붙이는 편집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할 뿐 아니라영화 자체가 편집적인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신문기사는 기자가 쓴다. 그러나 평균적으로 볼 때 기자가 쓸 수있는 것은 사실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신문마다표현도 다르다. 그 기사의 헤드라인(표제)도 기자와 데스크가 붙인다. ‘터널 사고‘라고 쓰느냐, ‘터널에서 참사‘라고 쓰느냐에 따라 뉘앙스가 전혀 달라진다. 똑같은 기사에 ‘수상, 고뇌의 결단‘이라고 불이느냐, 수상, 마침내 결단‘이라고 붙이느냐에 따라 정보의 표정이달라진다. 객관적 사실을 그대로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거꾸로 각 신문이 이 부분에서 수완을 발휘하기도 한다.

텔레비전 뉴스에도 엄청난 편집을 가한다.
언뜻 보면 보도해야 할 사실만을 전하는 것 같지만 텔레비전 방송국의 편집 현장을 한 번이라도 보면 알게 되듯이 10배에서 50배의 소재 영상을 이리저리 잘라내고 새로 잇는 한편 내레이션이나 아나운서의 원고, 뉴스캐스터의 말도 덧붙인다.

그래도 텔레비전 카메라는 진실을 전하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시위 현장에서 할머니가 쓰러진 화면 뒤에 기동대원이 곤봉을 치켜들고 있는 화면이이어지면 가혹하다‘는 의미가 전달된다. 이것이 시청자가 텔레비전방송국의 편집 방식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헤드라인은 내용 그 자체가 아니다. 그에 적합한 내용의 특징을이끌어 내는 깃발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 깃발 밑에 ‘이러한 정보가있다‘는 표지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시부야의 맛있는 음식 정보‘나 ‘주름살을제거하는 화장품을 알려 드립니다‘라는 글귀에 끌려 잡지와 주간지를 산다 해도 거기에 반드시 자신이 찾는 맛있는 음식 정보나 미용 정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정보라는 것이 가게 사진과 두세 가지의 요리 사진에 지나지 않아 깊이 있는 정보를 전혀 얻을 수없는 경우도 있다. 독자들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깃발(표지) 밑에 있는 정보 파일을 열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즉 배신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사전에 이미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저, 즉 사용자에게는 그것이 먼저 타이틀로, 그리고 헤드라인으로 눈에 들어온다. 그래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으면 흔히 스포츠 신문이 그러하듯이 타이틀이나 헤드라인을 어이없이 숨기거나 패러디식 조어를 사용해 눈길을 끌려고 한다.

신문이나 잡지, 텔레비전 등의 미디어 세계에서만 편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이나 만화, 드라마는 물론, 기획서나 영업 보고서, 이벤트나 도시 계획, 정책에도 딱 들어맞는다. 오히려 바로 이런 영역에서 편집 기법이 활용되어야 한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보고서나 제안서는 ‘편집력이 부족한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편집력은 기자나 편집자, 텔레비전 디렉터 등이 지니고 있는 능력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영화 감독이든, 럭비팀 감독이든, 영업부장이든, 기술 개발 부장이든, 요리사들,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이든 누구나 다 지니고 있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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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회가 바야흐로 근대화를 시작하려는 즈음 개인과 사회의 ‘접점‘
(接點, conjunction)을 전통적 윤리를 바탕으로 천착하려 했던 전형적인 눈과정신을 박수근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위대한 작가의 진실이 미술시장에서치솟는 경매가격과는 반대로 아직 이론적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박수근은 근대화 여명기의 개인과 사회가 최후의 접점을 이루었던 시기의한국미술의 이론을 논의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이러한 평가가지금까지 부진했던 것은 우리의 현대미술이론의 부재 때문인 것은 말할 것도없지만, 좀더 직접적인 이유는 그의 작품에 내재해 있는 근대화 여명기의 전형으로서 그의 눈과 정신을 읽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회화로서의 평면성과 화면의 지지체를 일체화하고자 했다는 것이다그는 그리고자 하는 사물의 실제보다는 화면이라는 일차적 필요충분조건을 것해서 실재에 대해 사유하고 제한했다. 둘째는 평면상에서의 실재의 존재을 정의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평면이라는 조건과 실재의 조건을 다룸에 있어서 그는 일관된 행보를 보여주었다. 그의 눈은 사물에서 촉발되는 존재의 근원을 진솔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정신을 통해서 평면으로 정리하고자 했다.

그는 사물의 존재의 신비를 그 자신만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자신과 사회를 잇는 접점에 설정하고자 했다. 그는 선한 세계라는 ‘초개인적 · 윤리적 수준에 접점을 설정하고 이 지점에서 작가 자신의 눈과 마음이사회의 하나라는 것을 확인시켰다. 이러한 태도는 1970년대 중반 이후 근대화전성기의 도래와 더불어 개인과 사회의 접점이 해체되기 이전의, 한국 근대화의 여명기가 갖는 눈과 정신이 무엇인지를 확인시킨다.

그의 작품들을 대하면 먼저 그의 화면에서 방사하는 특이한 ‘세계‘를 볼 수있다. 그의 세계에는 무엇보다 고목과 아낙이 있다. 싱싱한 나무가 아니라, 겨우 몇 개의 가지와 잎사귀를 간직한 고목이 있고, 절구질을 하거나 텅 빈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여인이 있다. 주제의 품목들은 모두 그가 살았던 시절의 주변세계의 이모저모이지만, 작품을 보는 순간 이러한 사실은 망각된다. 그 대신그가 그리는 주제들은 박수근의 ‘세계‘ 안에서 특유한 비전과 독자적인 생명을 갖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투명하도록 해맑은, 그러나 불투명한 대기 속에서 영적 사물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한결같이평면에 응결되거나 잠입하거나 무시간적 절대의 안식 속에서 휴식하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하나의 의문이 일어난다. 박수근의 회화 이미지를 그 최전선에서 받치고 있는 소재들은 어떻게 고목과 아낙, 나아가서는 초가와 절구질, 빨래터와 시장같은 가난의 품목으로 일관되고 있는가? 바꾸어 말하면, 작가는 왜 건강한 젊은이와 잘 차려입은 여인, 싱싱한 나무와 숲, 도시와 빌딩을 묘사하지 않는가?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이미지가 드러내는 정신적인 면과 지향성이다. 다시 말해, 그가 보고 생각하는 이상세계다. 그가 그리는 ‘세계‘란 그가 세상을 살면서 체험한 인생살이의 전부만은 아니다. 그의 이미지에는 그의 삶의이모저모가 용해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응축되어 있는 장소로서의 구실을 한다. 이름 없는 아낙과 형상조차 갖추지 못한고목은 철없는 손자와 놀고 있는 황혼기의 촌로와 대구(對句)를 이룬다. 이것들은 그가 그리고자 하는 세계의 메신저들임에 틀림없지만, 한결같이 그의 이미지들에 지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이를테면 선한 세계의 품목들이다.

‘선한 세계의 품목‘이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것들은 사실상 그의 세계를 이해시키는 매개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을 통해서 박수근이 그리는 이미지에서 선한 세계의 표정을 읽는다. 선은 이미지가 아니지만 작가는 그가 그리는 세계가 선을 지향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가 그리는 세계란 선을위해서 마련한 처소이다.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그의 평생의 종교적 이해와함께 성(聖)과 진리의 격률率)이 그의 이미지에 함의되어 있다. 그가 보여주는 선한 세계의 이미지는 ‘마음의 가난은 선의 표정이므로 아름답다‘는 의미를 내재한다.

청빈한 세계는 곧 선함을 밝히는 세계다. 그가 그리는 선한 세계의 속성인가냘픔, 연약, 노경 그리고 청빈은 물리적 · 생리적 · 경제적 약점이나 결핍을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지고의 세계가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어야 할 근본상을 뜻한다. 박수근은 이것들을 드러냄으로써 그의 세계를 참답게 나타낼수 있다는 신념을 보인다.

이를 다룰 수 있는 단서 하나가 있다. 박수근의 이미지는 ‘지각‘에 의거하지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미지들은 지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바깥의 세계를세세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하나하나의 이미지들은 선조 색채 베리나에이션에 의해 겨우 차별화된다. 그의 이미지는 지가보다는 기억심상이나 직관심상에 더 근접해 있다. 그의 기억은 우리에게 이미지를 단순화해서 무엇인가를 환기한다. 그가 시도하는 이미지의 단순화는 작가의 정신과 세계를 연관시킴으로써만 그 연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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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란, 방법은 항상 마루 밑에 숨어 있고 대개는 주제나 주인공이 전면에 나서는 법이다. 나는 주제나 논점보다는 주제를 지탱하는 방법과 논점이 보여지는 모습에 줄곧 관심을 쏟아왔다. 많은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나는 마이너리티였다.

그것은 방법이라는 것을 찾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고,
방법의 차이 같은 건 대수롭지 않다고 여겨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이 부분부터 독자가 적극적으로 사고하기를 바란다. 21세기는 방법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쓰면 꼭 결론 같은데, 편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새로운 사실과 사태, 현상을 따로따로 떼어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사이에 숨어 있는 관계를 발견하는 것에 있다. 그리고 그 관계를 신중하게 연결해보는 것에 있다.

이런 식으로 사물이나 사건을 보는 것을 편집공학에서는 ‘관계의 발견‘ 혹은 ‘새로운 대각선의 발견‘이라고 한다. 나는 바로 이런방법이야말로 앞으로 인간의 인지나 인식의 짜임에서도, 산업계나교육계에서도, 또 자신의 창발적인 능력을 개척하기 위해서도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나는 이 책에서 ‘방법이야말로 세상의 알맹이 그 자체 라는 걸 전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놀이에서 흥미진진한 것들을 많이 보게 된다.
하지만 흥미진진한 것은 어른의 놀이가 아니라 어린이의 놀이다.
어른의 놀이는 전쟁이나 불륜, 도박으로 상징되듯 이미 놀이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어린이의 놀이가 흥미진진한 것은 그것이 어른의 놀이에 비해 어린이답고 순진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어린이의 놀이에 어른의 놀이가 원형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어린이의 놀이는 전 세계적으로 매우 흡사하다. 규칙도 아주 비슷하며 벌칙을 주는 방법도 닮았다. 술래를 정하는 방법, 술래가 돌아가는 방법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편을 짜는 방법, 놀이의 복잡한 정도도 공통되는 점이 많다. 다른 점이라곤 지역에 따라 이름이나 부르는 방법이 다른 정도이다. 이름 붙이는 방법에는 그 지역의 문화 특질이 여실히 반영되기 때문에 아시아와 유럽은 비슷한 놀이라도 부르는 방법이 많이 다르다. 하지만그 밖의 것들은 매우 비슷하다.

이런 식으로 세상의 놀이를 여러 방면에서 관찰해보면 놀이가암시하는 여러 가지 짜임을 찾아낼 수 있다. 분명히 어린이의 놀이에는 어린이가 잘 알 수 있을 만한 정보량의 정도나 편집도의 상태라고 표현할 수 있는 무엇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의놀이를 분류하고 거기에서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정보의 정도를 정리해 놀이의 편집 정도를 조사해보았다.
이것저것 검토해보니 어린이의 놀이에 몇 가지 기본형이 보이기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편집술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놀이는 해방인 것 같으면서도 속박이고, 속박인 것 같으면서도해방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 두 가지가 없다면 놀이가 될 수 없다.

그리고 혼자 노는 놀이와 둘이 노는 놀이와 여럿이 노는 놀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아이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둘이나 여럿이 해서 재밌었던 놀이를 나중에 혼자 재연할때, 아이는 그 차이를 의식하면서 ‘일인 다역‘ 이라는 방법을 습득하게 된다. 역할의 내재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재밌었던놀이를 혼자서 재연하기 위해서는 체험의 ‘정보화 작업이 필요하게 된다. 재밌었던 기억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몸으로 체험한 놀이가 머릿속으로 전해진다. 이것이 정보화다. 

그런 다음 정보화된 체험을 혼자서 하는 놀이로 연출한다. 여기에는 간략한 시나리오와 무대 설정과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 여럿이 놀았던 체험을 혼자 하는 놀이로 바꾸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궁리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편집화‘이다. 편집술은 이렇게 놀이나 게임처럼 발단과 결말이 있는 정보의 흐름을 몇 개의 장면으로나누고 새로 짜는 것에서 시작한다. 먼저 ‘정보화‘하고 다음에 편집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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