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사고는 무지의 안개가 걷히는 순간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지혜는 생존을 위한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위해 강아지가 이빨을, 고양이가 손톱을 사용하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상황을 재구성함으로써 숨겨진 놀라운 가능성을 발견하는법을 배웠다. 그리고 그 지혜를 이용해 실제로 위기를 극복해낸생존자로서, 그들은 그 방법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자신들의성공을 자축했다.

불가능성은 일시적인 조건일 뿐이다. 이 진리를 아는 사람은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만큼 창조와 직관을 활발하게 가동시켜주는 연료는 없다. 확실한 가능성(해결책은서둘러 흰 수건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게임을 지속하기로 결정하는 사람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

1. 드러난 세계의 드러난 영역(제1영역 : 정보의 차원)
2. 드러난 세계의 숨겨진 영역(제2영역 : 상징의 차원)
3. 숨겨진 세계의 드러난 영역(제3영역 : 직관의 차원)
4. 숨겨진 세계의 숨겨진 영역(제4영역 : 무한한 가능성의 차원)

드러난 세계의 드러난 영역(이하 제1영역)‘은 엄청난 양의정보가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보이는 가운데, 단 한 가지사실만이 감춰져 있는 차원이다. 매우 밝은 빛 속에는 어둠이 있을 수 없듯이, 이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명확하게 뚜렷한 결과를향해가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예정된 순간과 공간과 지점을 향해시간이 흘러갈 뿐인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제1영역이 현실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다시 말해, 사람의 마음은 제1영역만을 검토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이 영역 속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보지 못한 사람은보지 못한 것에 대한 지식이 없다. 반대로, 본 사람은 자신이 본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서로 유사한 방식으로 사고한다는 사실을발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돈을 잃었을 때 즉각적으로 얼마 전에 어디선가 얻었던 큰 이득을 기억해낸다. 그리고는 그 이득에비해서 지금의 손실은 별것 아니라고 계산해버린다. 

그러나 현실을 평면적으로 파악하는 데만 집착할 때, 우리는현실의 새로운 측면을 창출하거나 소년은 사과를 반값에 샀다), 의문을 품거나 소년은 사과를 분실했는가, 먹었는가, 도둑맞았는가?), 새롭게 해석하는 사과는 분실된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갔다) 등의 통찰, 즉 기본적인 조건 너머에 있는 정보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인생은 우리의 해석력이 문자적인 차원을 넘어선 더 높은 이해로써 이 세상에 대처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기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물론 제1영역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유대 전통의 위대한 스승 중 하나인 라시Rashi‘는 《성서》를 해석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그러나 그는 지혜롭게도 이런 단순한 산수 문제에 습관적으로 "네 개"라고 답하는 태도가 빚어낼지도 모르는 무서운 결과를알고 있었고,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현실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신중하라! 그 길로 계속 간다면, 너는 십중팔구 그곳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유대의 이 격언은 그저 식상하고 빤한 말이 아니다. 어떤 문장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 문장 자체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사실부터 깨달아야 한다. 한 문장은 단지 현실을 구성하는 하나의요소로서, 그 의미를 뚜렷하게 만들어주는 문맥 속에서만 두드러져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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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을 발휘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강력한 개인주의에기반을 둔 독립적 사고 및 행동 능력이다. 그런데 아시아는 전통 농업사회로부터 벗어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아 전통사회의 가치관이 아직까지도 우리의 피와 집단의식 속에 선명하게 흐르고 있다. 또한 우리는아직 전통적인 집단의 가치가 개인의 권리나 표현의 자유보다 우위에있는 현실에 더 익숙하다. 빠르게 변화하는 소비사회에서, 고정관념에대한 개인의 동화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창의성을 말살해버렸다.

사회의 기성 가치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이러한 생활 태도는 현대인의 가장 큰 비애이자 창의성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다. 누군가가 그렇게 규정하지 않아도, 우리는 늘 자신의 시선을 타인이 만들어놓은 한계 속에 가두어둔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한계선을 넓히거나 심지어는 무너뜨릴 수 있는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세상에는 그 어떤 한계도 없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지않는다.

아시아의 고대 문명이 낳은 위대한 발명과 문화 예술의 창의적 계승 4자라 자처하는 타이완이 최근 들어 창의성 분야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화와 TV시장은 할리우드에이어 가까운 이웃인 한국과 중국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고, 대중음악 시장의 침체는 창의성 지수의 침체를 반영한다. 우리 모두의 창의성은 제품을 둘러싼 포장, 마케팅과 홍보에 억눌려 있다. 이런 외적인 방면으로는 타이완도 꽤 실력을 갖춘 듯하지만, 수영장 옆에서 응급 처치법은배웠으며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언제부턴가 우리는 창의적 제품 자체를 창조하는 법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그렇기에 내가 창의성을 습득한 과정도 대부분의 창의적인 사람과마찬가지로 암흑 속에서 끊임없이 헤매고 탐색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무엇을 써야 하는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 새로운 작품을 집필하는 고통을 거듭 겪고 오랜 세월 발버둥친 끝에 언제부턴가 나는 그신비로운 과정을 점차 이해하게 되었고, 창작에 대해 약간의 깨달음을얻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나 창의성은자신이 직접 헤매고 탐색해야 습득할 수 있는 것이며, 그 누구도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이라 자연스레 깨달았다.

이 안타까운 상황을 보완해보고자 최근 몇 년간 나는 학생들에게 나의 창작 과정을 자주 참관하게 하였다. 학생들이 집중해서 관찰한다면,
신비로운 창작의 순간, 연극의 한 신scene 혹은 작품 전체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결정과 형태를 이루는 그 찰나를 포착할 수 있으리라는믿음에서였다.

나 자신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오랜 기간에 걸친 학습 과정을 통해내 안의 어떤 창의적 에너지가 작동하기 시작하여 밖으로 배출되고 실용적인 형태를 갖춘 것 같다. 이 점만 보더라도 창의성은 습득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는 것이며, 누구나 작동 가능한 잠재적 창의성 인자를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높음을 알 수 있다.

창의성은 신비롭고 복잡하다는 특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울수 없는 것은 아니다. 관건은 우리가 창의적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창의적 과정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진다면, 창의성을 분석하고 습득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창의성은 신비롭다. 이 신비성은 창의성 자체를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욕망과 욕망이 불러일으켜진 후 어떻게 그 욕망을 구체적 형태로 만들어낼 것인가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뉠 수 있다. 이 두 가지 신비로운 측면은 각각 앞서 언급한 ‘구상‘과 ‘실행‘ 에 상응하는 개념이며,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창의성의 신비로운 2부곡‘ 이다.

창의성은 일종의 초월적 표현이자, 우주 만물의 일원인 인류가 가지고 있는 초능력의 발현이다. 태초부터 인류는 창의성의 광활함과 신비로움을 끊임없이 찬양해왔다. 창의적인 사람은 무에서유를창조하고,
복잡하고 유기적이며 완전한 생명력을 지닌 작품을 생산해냈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고 창의적 과정이 생명과 마찬가지로 신비롭고 위대한 것임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의 창의성 교육은 대부분 후자, 즉 ‘방법‘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화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그림을 배우고, 작가가 되고 싶은사람은 글쓰기를,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사람은 영화를, 작곡을 하고싶은 사람은 음악을, 안무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무용을 배운다. 언뜻듣기에는 지극히 당연한 얘기인 것 같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방식인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문제는, 이러한 교육이 나머지 절반을 통째로 빼먹고 있다는 점이다. ‘방법‘에 대응되는 나머지 절반, 즉
‘지혜‘ 는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현대의 교육 시스템은 이 문제에 대해논의하지 않는다. 마치 ‘지혜‘ 는 개인이 알아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기저에 깔려 있는 듯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창의성 교육의 절반을 통째로 날려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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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연령기의 위기는 발달상 위기의 경로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이-K) 매끄럽다는점에서 위기를 발견하기 어렵다면, 이행적 연령기의 위기에 대해서는 반대의 상황에 마주친다고 할 수 있다. 안정적 연령기를 넘쳐흐르는 빠르고 예리한 위기가 출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린이의 이행적 연령, 위기적 연령에 관해서 수많은 지침서들이 흔히 전체 이행적 연령기에 대한 이론을 위기에 대한 것인 양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두 부분에서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첫째, 진정한 의미에서의 위기는 그것을 경험적으로 관찰한 사람에게라면, 성적 성숙에선행하는 제한되고 특정 시기에 집중된 것일 수 없다. 이로부터 이행적연령기의 부정적 국면에 대한 이론이 나타났다. 

둘째, 전체 성적 성숙시기에 내재하는 위기성의 특징은 본질적으로, 이행적 연령기 과정 전체는 어린이 상태로부터 성숙 상태로의 이행이라는 사실에 비추어서만이해되어야 한다.

 어제 우리가 말한 이행적 연령기는 그 자체로는 협소한 의미에서의 위기적 연령기가 아니다. 여러분이 기억한다면, 우리는 위기적 연증기의 기본적 징후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이 징후는 발달의 위기적 시기에 어린이 인격 구조에서 일련의 결정적 변화와 괴리가 짧은 기간 동안 보통 1년이나 그보다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른 저자들 특히 미국인들은 위기적 연령기에 대해 국면이아니라 일종의 시대, 즉 하나의 완성된 연령기로 확장되는 어떤 큰 시기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간주한다. 내가 보기에, 일반적 연령기 구분의 관점에 이것은 맞지 않다. 따라서 부정적 국면은 성적 성숙에 선행하는 위기적 연령기의 의미로 말하기는 어렵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여러 저자들은 부정적 국면을 서로 다르게 칭하기 때문이다. 

독일인들은 이것을 다른 연령기와 구분하는 것은 어린이가 어떤 긍정적인 것을취한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이 연령기에 어린이 발달에서 청소년 연령기로 이행하면서 갖는 부정적 특성이라고 말한다. 이 새로운 것이 과학적원칙과 양립할 수 없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른 이들은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부정적 국면에 대해, 역발달 과정이 전체 발달 경로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위기에 특별히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이는 발달 과정 자체의 본질이 되는 내용은 결코 아니다. 

 연구자 중 한 명의 표현에 따르면 이 국면을 부정적이라고 칭하는 것은 치아 교체의 국면을 치아 상실의 국면이라고 부르는것과 같은 오류일 것이다. 물론 젖니의 상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발달의 역사는 하나를 잃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오직 하나의 상실로만, 오직 부정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아니다.

연구자 중 한명은 인격의 발달과 구조는 나무의 성장과 나이테의 증가와 같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각 발달의 시기마다인격의 구조에 특정한 형성이 생겨난다. 이는 아주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가 안정적인 주요 연령기의 신형성에 대해 말할 때 이것은 인격의 구조에 비축되어 어린이가 전체 삶에 걸쳐 자신의 인격 구조에 보존하는그러한 신형성인 것이다. 예컨대 초기 유년기 어린이는 말을 습득하고이를 일생 동안 간직하며 말은 인격 구조의 기본적 부분이 된다.

이행적 연령기의 신형성은 다른 문제이다. 이것은 이행적 형성물이며 우리는 이를 이행적 유형의 신형성이라고 부른다. 그 예는 더이른 연령기로부터도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자율적 말이라든가 3세 위기 어린이의 하이포불리아적 의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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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로스는 신화적인 인물이 아니다. 산타클로스의 기원과 역할을 설명해주는 신화가 없기 때문이다. 산타클로스와관련된 반역사적인 이야기도 없기 때문에 전설 속의 인물도 아니다. 그렇지만 초자연적이고 변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존재이고, 항상형태가 일정하며 정해진 기간에 되돌아와서 전유적 역할을 하는 존재로 정의되는 산타클로스는 신적인 존재에 속한다. 

산타클로스는 우리 사회에서 일정한 연령대(산타클로스의 존재를믿는다고 여겨지는 연령대)에게 신이다. 산타클로스와 진정한 신의 차이가 있다면, 어른들이 아이들에게는 산타클로스를 믿으라고 부추기며온갖 속임수를 동원해 그 믿음을 지켜가라고 애쓰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산타클로스는 어린이에게 청소년이나 성인과는 다른 사회적 지위를 갖는다는 증거이다. 이런 점에서 산타클로스는 민족학자들이 대부분의 사회에서 연구한 관습과 믿음, 다시 말하면 통과의례와 입문의례의 총체와 관계가 있다. 

오늘날 벌을 주는 ‘카치나‘가 금지되자,
잊힌실증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산타클로스를 다른 단역들처럼 망각의 늪에 집어 던져야 했겠지만, 똑같은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며 산타클로스의 너그러운 면을 부각시켰다는 사실이 무척 의미심장하다. 이런 점에서 교육은 합리적이지 않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매질하는 할아버지만큼이나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이런 점에서는 교회의 대응이 옳다). 오히려 이제 우리는 신화의 세계로 옮겨간다.
따라서 이런 현상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통과의례와 그에 관련된 신화가 인간 사회에서 실질적인 기능을하는 것은 분명하다. 어른들은 통과의례의 그 신화를 이용해 어린아이들에게 질서와 순종을 요구한다. 1년 내내 산타클로스가 찾아올거라고 말하며, 아이들에게 얼마나 말을 잘 듣느냐에 따라 산타클로스의 선물이 달라짐을 기억시킨다.

산타클로스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에게 기분 좋게 가하는 ‘속임수‘만이 아니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대체로 그 믿음은 두 세대 모두에게 상당히 부담스런 거래의 산물이다. 크리스마스라는 관습 전체와, 우리가 집 장식에 사용하는 푸른 식물-전나무와 호랑가시나무, 담쟁이덩굴과 겨우살이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에는 단순한 장식물인 푸른 식물들이 옛날에는 적어도몇몇 지역에서는 두 사회집단이 ‘교환‘하는 물건이었다. 

다시 말하면 어린아이들이 바로 카치나이기 때문이다. 카치나 의식이란 속임수는 현실과의 타협이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이 그현실 자체이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은 그 속임수에서 배제될 수밖에없다. 어린아이들의 공간은 다른 곳에 있다. 가면과 살아 있는 사람이있는 곳이 아니라, 신과 죽은 사람이 있는 곳이다. 신은 죽은 사람이며, 죽은 사람은 어린아이이다.

 입문 의식을 거친 사람과 입문 의식을 거치지 않은 사람 사이의관계는 긍정적인 성격을 띤다. 죽은 사람들을 대신하는 집단과 살아있는 사람을 대신하는 집단, 두 집단 간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다. 게다가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역할이 흔히 몇 번이고 뒤바뀐다. 양면성이 관점의 상호성을 유도하고, 거울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경우처럼관점의 상호성이 무한히 반복되기 때문이다. 

 입문 의식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죽은 사람이라면 입문 의식을 초월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흔히 그렇듯이, 입문 의식을 거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겁주기 위해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구현한다면, 의식의 후반부에서 그유령을 물리치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막는 것은 입문 의식을 거치지 않은 사람의 몫이다. 

산타클로스와 관련된 풍습과 믿음이 입문 의식의 사회학에 속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런 풍습과 믿음을 통해어린이와 성인 간의 대립 뒤에 감추어진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간의 대립이 명백히 드러난다는 것을 인지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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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어렵사리남긴 자취는 제거해야 할 핏자국으로 간주된다. 닳고 헤어져서수리해야 할 것으로 상당한 비용을 들여 감각상각 처리를 해야할 것으로 취급한다. 

 아이들은 살아가는 곳으로서의 거주 공간을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채 자라나서 죽는다. 거주 능력은 퇴거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되었다.

사람들은 실재하는 것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릴 때는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이미지를만들 때 상상력을 발휘한다. 

현대의 도시 거주자들이 ‘실체로서의 공간을 감각하는 것은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공간을 ‘질료‘로 감지할 수가 없다.
그것을 냄새 맡거나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따라서 플라톤이 "명확한 말로 이런 질료[공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지난한 일이겠지만"이라고 한 것도 다소 위안이 되기는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오면, 공간은 더이상 질료‘로 이해되지 않는다. 플라톤의 ‘그릇‘(hypdechomene)은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존재의 네 가지 원인 가운데 하나인 물질적 재료(myle)로 바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중에 서구의 공간의식을 형성하게 되는 공간 관념을 처음으로 정초한 사람이다.
그는 공간을 수용적인 것이 아니라 확장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이데아적 도시‘는 차츰 법적인 허구에불과한 것이 되기 시작한다.

 BC 146년에 끝난 제3차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는 카르타고를 무인지경으로 만들었음에도 결코 그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했다. 카르타고를 갈아엎은‘ 뒤에야 비로소 그 도시를 없앨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 스키피오는 신성한고랑의 흔적을 지워야 했다. 창건 의례에서 세심하게 흙덩이를쌓아서 구분한 안쪽을 다시 바깥으로 돌려야 했다. 고랑을 갈아앞으라고 명령을 내렸을 때, 스키피오는 아마도 전의 흔적을 ‘청소‘ (ustrare)하기 위해 헥토르의 시신을 끌고 트로이 성벽을 세 바퀴 돌았던 아킬레우스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트로이는 사라졌다. 도시의 영혼이 완전히 꺼져야만 그것에 헌신하려는 마음도 불식되고, 야생이 그 장소를 삼킬 수 있는 법이다.

오늘날의 불도저는 고대의 로마군단이 했던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을 제거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시멘트는 그것을 뭉가버릴 수 있다. 그 장소에 주차장이나 공공주택이 들어서면 불법점유자들은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 고대인들은 의례적 공간을 취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런 공간들이 사회적 창조물임을 알고 있었다." 

반면 오늘날의 건축가들은 그것을 비난하고시멘트로 묻어버릴 줄만 안다. 세상이 이렇게 시멘트로 뒤덮이면 거주 공간은 소멸한다. 오직 갈라진 곳과 틈새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

거주 공간은 나름의독특한 거주 활동에 따라 달라지는 질료이다. 반면에 안팎이 구분되지 않는 공간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면적 단위로사람들을 채우도록 할당한 공간이다. 

 내부와 외부, 오른쪽과 왼쪽,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사이의 비대칭적 상보성은 근원적 경험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이런 구분을 초월하는 균질적 공간이란 역사적으로 전혀 새로운 경험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형태적으로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연속체를 구성한다. 내부도 외부도 없고 좌우도 없는 연속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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