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어렵사리남긴 자취는 제거해야 할 핏자국으로 간주된다. 닳고 헤어져서수리해야 할 것으로 상당한 비용을 들여 감각상각 처리를 해야할 것으로 취급한다. 

 아이들은 살아가는 곳으로서의 거주 공간을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채 자라나서 죽는다. 거주 능력은 퇴거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 되었다.

사람들은 실재하는 것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릴 때는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이미지를만들 때 상상력을 발휘한다. 

현대의 도시 거주자들이 ‘실체로서의 공간을 감각하는 것은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공간을 ‘질료‘로 감지할 수가 없다.
그것을 냄새 맡거나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못한다. 따라서 플라톤이 "명확한 말로 이런 질료[공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지난한 일이겠지만"이라고 한 것도 다소 위안이 되기는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오면, 공간은 더이상 질료‘로 이해되지 않는다. 플라톤의 ‘그릇‘(hypdechomene)은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존재의 네 가지 원인 가운데 하나인 물질적 재료(myle)로 바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중에 서구의 공간의식을 형성하게 되는 공간 관념을 처음으로 정초한 사람이다.
그는 공간을 수용적인 것이 아니라 확장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이데아적 도시‘는 차츰 법적인 허구에불과한 것이 되기 시작한다.

 BC 146년에 끝난 제3차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는 카르타고를 무인지경으로 만들었음에도 결코 그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했다. 카르타고를 갈아엎은‘ 뒤에야 비로소 그 도시를 없앨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 스키피오는 신성한고랑의 흔적을 지워야 했다. 창건 의례에서 세심하게 흙덩이를쌓아서 구분한 안쪽을 다시 바깥으로 돌려야 했다. 고랑을 갈아앞으라고 명령을 내렸을 때, 스키피오는 아마도 전의 흔적을 ‘청소‘ (ustrare)하기 위해 헥토르의 시신을 끌고 트로이 성벽을 세 바퀴 돌았던 아킬레우스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트로이는 사라졌다. 도시의 영혼이 완전히 꺼져야만 그것에 헌신하려는 마음도 불식되고, 야생이 그 장소를 삼킬 수 있는 법이다.

오늘날의 불도저는 고대의 로마군단이 했던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을 제거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시멘트는 그것을 뭉가버릴 수 있다. 그 장소에 주차장이나 공공주택이 들어서면 불법점유자들은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 고대인들은 의례적 공간을 취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런 공간들이 사회적 창조물임을 알고 있었다." 

반면 오늘날의 건축가들은 그것을 비난하고시멘트로 묻어버릴 줄만 안다. 세상이 이렇게 시멘트로 뒤덮이면 거주 공간은 소멸한다. 오직 갈라진 곳과 틈새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다.

거주 공간은 나름의독특한 거주 활동에 따라 달라지는 질료이다. 반면에 안팎이 구분되지 않는 공간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면적 단위로사람들을 채우도록 할당한 공간이다. 

 내부와 외부, 오른쪽과 왼쪽,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사이의 비대칭적 상보성은 근원적 경험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이런 구분을 초월하는 균질적 공간이란 역사적으로 전혀 새로운 경험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형태적으로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연속체를 구성한다. 내부도 외부도 없고 좌우도 없는 연속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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