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을 발휘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강력한 개인주의에기반을 둔 독립적 사고 및 행동 능력이다. 그런데 아시아는 전통 농업사회로부터 벗어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아 전통사회의 가치관이 아직까지도 우리의 피와 집단의식 속에 선명하게 흐르고 있다. 또한 우리는아직 전통적인 집단의 가치가 개인의 권리나 표현의 자유보다 우위에있는 현실에 더 익숙하다. 빠르게 변화하는 소비사회에서, 고정관념에대한 개인의 동화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창의성을 말살해버렸다.

사회의 기성 가치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이러한 생활 태도는 현대인의 가장 큰 비애이자 창의성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다. 누군가가 그렇게 규정하지 않아도, 우리는 늘 자신의 시선을 타인이 만들어놓은 한계 속에 가두어둔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한계선을 넓히거나 심지어는 무너뜨릴 수 있는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세상에는 그 어떤 한계도 없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지않는다.

아시아의 고대 문명이 낳은 위대한 발명과 문화 예술의 창의적 계승 4자라 자처하는 타이완이 최근 들어 창의성 분야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화와 TV시장은 할리우드에이어 가까운 이웃인 한국과 중국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고, 대중음악 시장의 침체는 창의성 지수의 침체를 반영한다. 우리 모두의 창의성은 제품을 둘러싼 포장, 마케팅과 홍보에 억눌려 있다. 이런 외적인 방면으로는 타이완도 꽤 실력을 갖춘 듯하지만, 수영장 옆에서 응급 처치법은배웠으며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언제부턴가 우리는 창의적 제품 자체를 창조하는 법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그렇기에 내가 창의성을 습득한 과정도 대부분의 창의적인 사람과마찬가지로 암흑 속에서 끊임없이 헤매고 탐색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무엇을 써야 하는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 새로운 작품을 집필하는 고통을 거듭 겪고 오랜 세월 발버둥친 끝에 언제부턴가 나는 그신비로운 과정을 점차 이해하게 되었고, 창작에 대해 약간의 깨달음을얻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나 창의성은자신이 직접 헤매고 탐색해야 습득할 수 있는 것이며, 그 누구도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이라 자연스레 깨달았다.

이 안타까운 상황을 보완해보고자 최근 몇 년간 나는 학생들에게 나의 창작 과정을 자주 참관하게 하였다. 학생들이 집중해서 관찰한다면,
신비로운 창작의 순간, 연극의 한 신scene 혹은 작품 전체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결정과 형태를 이루는 그 찰나를 포착할 수 있으리라는믿음에서였다.

나 자신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오랜 기간에 걸친 학습 과정을 통해내 안의 어떤 창의적 에너지가 작동하기 시작하여 밖으로 배출되고 실용적인 형태를 갖춘 것 같다. 이 점만 보더라도 창의성은 습득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는 것이며, 누구나 작동 가능한 잠재적 창의성 인자를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높음을 알 수 있다.

창의성은 신비롭고 복잡하다는 특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울수 없는 것은 아니다. 관건은 우리가 창의적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창의적 과정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진다면, 창의성을 분석하고 습득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창의성은 신비롭다. 이 신비성은 창의성 자체를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욕망과 욕망이 불러일으켜진 후 어떻게 그 욕망을 구체적 형태로 만들어낼 것인가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뉠 수 있다. 이 두 가지 신비로운 측면은 각각 앞서 언급한 ‘구상‘과 ‘실행‘ 에 상응하는 개념이며,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창의성의 신비로운 2부곡‘ 이다.

창의성은 일종의 초월적 표현이자, 우주 만물의 일원인 인류가 가지고 있는 초능력의 발현이다. 태초부터 인류는 창의성의 광활함과 신비로움을 끊임없이 찬양해왔다. 창의적인 사람은 무에서유를창조하고,
복잡하고 유기적이며 완전한 생명력을 지닌 작품을 생산해냈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고 창의적 과정이 생명과 마찬가지로 신비롭고 위대한 것임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의 창의성 교육은 대부분 후자, 즉 ‘방법‘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화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그림을 배우고, 작가가 되고 싶은사람은 글쓰기를,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사람은 영화를, 작곡을 하고싶은 사람은 음악을, 안무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무용을 배운다. 언뜻듣기에는 지극히 당연한 얘기인 것 같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방식인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문제는, 이러한 교육이 나머지 절반을 통째로 빼먹고 있다는 점이다. ‘방법‘에 대응되는 나머지 절반, 즉
‘지혜‘ 는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현대의 교육 시스템은 이 문제에 대해논의하지 않는다. 마치 ‘지혜‘ 는 개인이 알아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기저에 깔려 있는 듯하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창의성 교육의 절반을 통째로 날려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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