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성이란 우리의 출신배경, 언어, 국적이 타자의 존재로부터 자주우리에게 보호막이 되어줌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얻게 되는 확실성에안주하지 않고 이를 넘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편성은 또한 대외 정책이나 사회 정책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인간적행위에 대한 단일한 규준을 찾아내고 이를 유지하고자 노력해야 함을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정당한 이유 없이 야기된 적의 침략에 대해비난한다면, 우리는 또한 우리 정부가 더 약한 집단을 침략할 때 똑같이비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식인은 자신의 언행을 규정하는 어떠한법칙도 알지 못한다. 세속적 지식인들에게는 확고한 인도자로서 경배하고숭배해야 할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이전 어느때보다도 많은 여러 전문가와 조언가로 가득 차 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세계는 자신들의 노동으로 거대한 이윤을 획득하면서 동시에 권위를제공하는 것을 주요한 역할로 삼는 지식인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윌프레드 오언이 말했듯이, "글 쓰는 이들은 모든 사람들을 꾸짖으면서국가에 대한 충성을 부르짖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내 관점에서지식인의 책무는 그러한 여러 압력들로부터 상대적인 독립성을 찾아내는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지식인은 추방자, 주변인, 아마추어, 권력을 향해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언어의 설계자로 그려진다.

그람시가 살아온 과정은 그 자체로 자신이 제시한 지식인의역할을 잘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는 언어학자이자 이탈리아 노동운동의조직가였으며, 언론활동을 통해서 사회 분석가로서의 면모를 매우의식적으로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사회 분석가로서 그의 목적은사회운동을 조직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운동과 연관시켜 전반적인문화를 새롭게 구성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람시는 사회에서 지식인의 기능을 수행하는 이들이 다음의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는 점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교사, 성직자,
행정가들과 같은 전통적인 지식인들로, 이들은 대를 이어서 동일한업무를 수행해냅니다. 둘째로 유기적 지식인들이 있는데, 그람시에 따르면이들은 여러 계급이나 기업 조직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이러한조직들은 이윤 획득 과정을 체계화하고 더 많은 권력과 통제력을 얻기위해 지식인들을 활용합니다. 

방다가 제시하는 사례들은 그가 지식인을 난해하고초자연적이기까지 한 주제들에 사적으로 깊이 빠져드는 철저히 자유롭고탈속적인 상아탑 속 사변가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을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형이상적 열정에 의해, 그리고 이해타산에서벗어난 정의와 진리의 원칙에 의해 움직이면서 부패를 비판하고 약자를보호하며, 불완전하거나 억압적인 권위에 저항할 때에 가장 지식인다운것입니다. 방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페늘롱과 마시용* 이 루이14세가 벌인 전쟁들에 대해서 어떻게 비난했는지 굳이 상기시킬 필요가있을까? 팔라틴 백작령을 파괴한 데 대해 볼테르가 얼마나 저주했는지,
르낭이 나폴레옹의 폭력성을 어떻게 비난했는지, 버클이 프랑스 혁명에대한 영국의 불관용을 우리 시대에 니체가 프랑스에 대한 독일의야만성을 어떻게 비난했는지에 대해서도 바다에 따르면 오늘날의문제는 그가 "집단적 열정의 조직화"라는 선견지명적인 문구로 일컬었던분파주의, 대중 감정, 민족주의적 호전성, 계급적 이해와 같은 것들에지식인들이 자신들의 도덕적 권위를 실어주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날 지식 생산과 유통의 어느 쪽이라도 관련된 분야에서 일하는이들이라면 그람시적 의미에서 지식인입니다. 

지식인의 형상이나 이미지가 가득 쌓인 세부사항들 속으로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그리하여 지식인이 사회적 흐름에 실려 가는 또한명의 전문가나 인물에 그칠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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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하기 위해서는 고쳐 나가야 한다.
자손은 조상의 일을 고쳐 나가야 한다.
"3년 동안 아버지의 가르침을 거스르지 않으면효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은 틀린 말이며퇴보의 근원이다. 만일 고대의 단세포 동물이이 교훈을 지켰더라면 아마 영원히분열 번식하지 못했을 것이며세상에는 인류가 생기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아버지 노릇을 할 것인가」에서)

사람들은 흔히 신화 속의 프로메테우스를혁명가에게 비유하곤 하는데.
그는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죄로 하늘의 벌을 받았다.
그러나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런 박애의 정신과인고의 정신이 혁명가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내가 다른 나라에서 불을 훔쳐온 본래 목적은나의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데 있다.
<딱딱한 번역과 문학의 계급성에서>

『외침』
"사람을 잡아먹어본 적이 없는 아이가11혹시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구하라・・・・・츄사작

가령 말이야, 쇠로 만든 방이 있다 치자구.
창문은 하나도 없고 부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야.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데,
머지않아 모두 숨이 막혀 죽을 거야. 하지만 혼수 상태에서죽어가는 거니까 죽음의 비애는 조금도 느끼지 않지.
지금 자네가 큰소리를 질러서 비교적 정신이 있는 사람 몇 명을 깨운다면 말야.
그 불행한 소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임종의 고통을 주게 될 텐데,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어?"
"하지만 몇 사람이 일어난 이상, 그 쇠로 만든 방을 부술 희망이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외침』 서문에서)

근래의 혁명 문학가들은 대체로 유난히 어둠을 두려워하고어둠을 은폐하지만, 시민들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자신을 표현한다.
전자의 정교한 영리함이 후자의 둔중한 마비에 부딪히면,
혁명 문학가들은 감히 사회 현상을 정시하지 못하고, 까치는 환영하고올빼미는 싫어하는 할멈으로 변해가지고 약간의 길조를 긁어 모아자기 도취에 빠지게 되고, 그리하여 시대를 초월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민중에 대한 두 편의 글」에서)

이 작품(아Q정전」이 『외침』에 실린 뒤에도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누구와 누구를 욕한 거죠? 나는 슬프고 화가 났으며,
나 자신을 그렇게까지 천박하게 보이게끔 한 데 대해스스로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아Q정전」은 어떻게 씌어졌는가」에서)

다만 하나 더 기억나는 것은, 열이 날 때,
서양인들이 임종시에 다른 사람들에게용서를 빌고 자신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주는의식을 치르곤 한다는 이야기에 대해생각해보았다는 것이다. 나의 적은 많다고할 수 있다. 만일 신식 사람이 내게 묻는다면어떻게 대답할까? 나는 생각해보고이렇게 결정했다. 계속 그대로 원망하시라,
나 또한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을 테니.
(「죽음」에서)

무릇 오늘날 이루어진 것은 모두 이전 사람들이 남긴 것을 계승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문명 역시 반드시 시대와 함께 변천하는 것이다. 또한 이전의 큰 조류에 저항하여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문명 또한 편향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갑자기 나타나거나 갑자기 소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에다. 그 말을 찾아 올라가보면 대개는 모두 연관되어 있어 분리될 수가 없다. […) 민중의 힘은 거센 파도와 같아 저항을 받으면받을수록 더 끓어오르게 되어 사람들은 드디어 종교의 속박에서벗어날 생각을 하게 되었다. [・・・ ] 

인간은 자신의 개성을 발휘함으로써 관념적인 세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수 있다. 개성이야말로 조물주이다. 오직 자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로운 것이다. 그것은 본래 자기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데서 구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자유는 힘에 의해 얻어질수 있지만 그 힘은 개인에게 있다. 그것은 개인의 재산이면서 권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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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사리 무덤 앞에 섰을 때는 인생의 비감함을 곱씹게 된다. 쫓겨난광해군의 무덤이 왕릉의 규모일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초라했다. 봉분과 묘비, 상석, 문인석 한쌍, 석등 하나가 전부다. 석등은 총알 자국이 난 채 깨져 있다. 왕실 인물들의 무덤 입구에 보이는 홍살문이나 정자각(丁字閣)도 없다. 규모로 치면 어느 높은 벼슬아치의 무덤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저 ‘아담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누워 있는 광해군 부부에게 그나마 위로가될지도 모를 일이다.

왕릉이나 대군들의 무덤에 참배하려면 대개 무덤 입구에서부터 언덕으로 올라가야 한다. 광해군 무덤은 정반대다. 자물쇠가 달린 녹색철문을 열고 들어와 능선을 내려와야 한다. ‘어차피 쫓겨난 임금 이니 마음놓고 내려다보아도 된다는 심리에서 이런 곳에 무덤을 썼을까? 광해군은 죽은 뒤에도, 지금까지도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었다.

광해군(光海君. 1575~1641)에게만은 달랐다. 쫓겨난 뒤에도 의도적으로 평가절하되고 철저하게 외면되었다. 조선 후기의 역사책이나개인 문집에서 찾을 수 있는 ‘혼군‘ 이나 ‘폐주‘ 라는 명칭은 예외 없이광해군을 가리킨다. 죽은 뒤에도 의도적인 격하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죽은 뒤에도 의도적인 격하를계속 당했다면 살았을 때의 업적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의 반증일 수도있다. 아니면 광해군을 쫓아내고 정권을 잡은 사람들의 치적이 형편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옛날보다 나아진 것이 없다"는 따가운 시선을피하려면 옛 임금에 대한 추억 자체를 없애야만 했을 것이고, 계속 과거와의 전쟁‘을 치러야만 했을 것이다. 그 ‘전쟁‘ 이란 다름 아닌 ‘광해군 죽이기‘ 였을 것이다. 광해군이 죽은 뒤에도 ‘광해군 죽이기‘ 는 계속되었던 것이다.

유몽인의 수난은 목숨이 끊어진 뒤에도 이어졌다. 그는 19세기까지도 ‘섬길 가치가 없는 군주에게 헛되이 충성을 바친 가짜 충신‘으로 매도되었다. 유몽인은 이이첨이나 정인홍처럼 광해군대를 주름잡았던권력의 실세가 아니었다. 광해군에게 그다지 총애를 받았던 적도 없다. 그럼에도 그가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고, 죽은 뒤에도 이렇게 가혹한 비판을 받은 것을 보면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부정적인 것으로 굳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이미 ‘반정‘ 이라는 단어 속에 원초적으로 담겨 있다. ‘반정(反正)‘은 중국의 고전인 『춘추』나 『사기』등에보이는 "발난세반제정(撥亂世反諸.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세상으로 돌이킨다)"이란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반정은 문자그대로 ‘올바른 상태로의 복귀‘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반정 이전의광해군 시대는 ‘어지럽고 올바르지 못한 시대‘ 일 수밖에 없다.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의 주체들은 자신들의 거사를 정당화하기위한 사업을 펼쳤다. 한편으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거사의 불가피성을 설명하여 인조를 새로운 국왕으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고, 다른한편에서는 광해군 시대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것은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가 정당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무엇보다중요한 작업이었다. 『광해군일기』는 바로 그 과정의 산물이었다.

오늘날 중초븐인 태백산븐 광해군일기가 남아 있는 것은 커다란의미를 지닌다. 중초본과 정서본의 내용을 비교함으로써 일기 편찬 과점에서 자행된 광해군 죽이기‘의 실상을 어느 정도나마 엿볼 수 있기때문이다. 

따라서 정족산본 일기에는 이 내용이빠져 있다. 이미 그를 쫓아내는 명분으로 ‘광해군은 화친론자‘ 라는 명제가 설정되었다면 위의 기사는 지워버리는 편이 인조반정 주체들에게는 훨씬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중초본 일기가 세초되어 사라지고, 정서만 남아 있었더라면 광해군은 자신이 화친론자가 아니라고 ‘변명‘ 조차 못했을 것이다.

중초본 일기를 세초하지 않고 남겨두었던 당시의 실록청 관계자들이혹시라도 광해군이 훗날 재평가되리라고 생각했을까? 이런 문제까지생각해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어쨌든 중초본이 남아 있는 덕분에 가려져왔던 광해군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데 다소나마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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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심리란 물리적인 대상들처럼 한 가지 양태와 설명,
분석만 존재하는 영역은 아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다른해석, 분석이 가능하다. 어떤 경우든 핵심은, 그 해석과 분석을 통해 얼마나 ‘실제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는가다. 즉실용성이다.

정밀하고 정확한 통찰은 실용적인 해결방안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때로는 통찰 자체가 곧 해결책이 되기도하고, 통찰 후에 구체적인 해결책들이 시간차를 두고 자연스럽게 떠오르기도 한다. 어느 편이든 모두 도움이 된다.

우리는 자아상을 스스로 만들지 못한다. 어릴 적부터 부모와 가족 그리고 타인과 세계가 주는 정보에 개인의 기질이나 성향, 사유의 패턴 등이 가미되어 자아상이 형성된다. 즉외부와 내부의 요소들이 합쳐지는 것이다. 

문제는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부정적 자아상‘이다. 자기도 모르게 부정적 자아상이 형성되고, 그것에 계속 영향 받는 것이다. 삶의 에너지와 의욕을 뺏어가는 부정적 자아상도, 앞서 말한 흐름에 따른다면 결국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다.

간혹 타고난 부정적, 염세적 성향 때문에 형성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외부의 영향과 주입이 우선이라 봐야 한다.

자아상에 대한 외부의 주입이 일어나는 시키는 대개 어린시절이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는 물론 부모다. 그 외에 자라면서 만나게 되는 친척, 친구, 선생, 지인 동도 자아상 형성에 조금씩 관여한다. 

어린아이들은 주입되는 정보를능동적으로 취사선택하지 못하고 대부분 그냥 받아들인다.
심지어 거부하고 싶은 부정적 정보마저 무의식적으로는 ‘그렇다‘고 받아들이곤 한다.

문제는 외부에서 주입하는 자아상에 부정적인 내용이 많다는 사실이다. 주로 개인의 능력이나 상태에 대한 것들이다.

문제는 이 부분이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주입된 외부의관점을 ‘나의 고유한 생각‘으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더 이상 그것이 외부에서 온 것이라 여기지 못하게 된다.
심지어 처음에는 거부했던 내용들조차 말이다. 의식적으로는 거부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들어와버린 것이다.

나아가 외부 생각에 의해 자아상이 형성되는 것이 자연스럼듯이 외부에서 들어온 생각을 나의 고유한 생각으로 여기는 것도 사실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만의 언어사용 능력을 통해 인간 종특유의 복잡하고 심층적인 사유능력을 발전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기능이라 할 수있다. 그냥 하나의 도구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의 구조와프로세스 자체는 선명히 구분하고 눈치 채야 한다. 모르면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게 된다.)진짜 문제는 마지막 단계에서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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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전력을 탄수화물, 휘발유를 지방으로 바뀌표현해 보면 인체의 에너지 소비 시스템과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도 지방을 불태워서 에너지된으로 삼을 때는 탄수화물을 연소하지 않는다. 

반면에 탄수화물을 에너지원으로 삼을 때는 지방을 연소하지않는다. ‘지방 회로‘와 ‘탄수화물 회로‘의 두 가지 에너지 사이클을 구분해서 사용함으로써 몸을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장거리 걷기처럼 천천히 지방을 연소시키는 ‘유산소 운동‘과 단거리 달리기처럼 탄수화물을 연소시켜서 순간적인 힘을 내는 ‘무산소 운동‘이 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유산소 운동에는 적색근, 무산소 운동에는 백색근이 사용되므로, 쓰이는 근육이 서로 다르고 소비하는 에너지 회로도 다르다.

100미터를 전력 질주하는 달리기는 글리코겐(당)을 불태우는무산소 운동이다. 이때 지방은 연소되지 않고, 탄수화물은 바로고갈되기 때문에 오랫동안 달리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게 된다.

반면에 마라톤, 조깅, 에어로빅, 수영 등은 지방을 불태우는 유산소 운동이다. 하지만 동시에 백색근도 사용하기 때문에 역시 탄수화물이 고갈되면 더 이상 운동을 지속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걷기는 적색근만 사용하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지방을 연소시킬 수 있다.

그런데 현대인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식생활을 당연시하고 있다. 세 끼 식사뿐 아니라 손만 뻗으면 빵이나 과자를 먹을 수 있는 간식 천국에서 살아간다. 이렇게 하루 세끼에 간식까지 챙겨 먹으면서도 정작 몸을 움직이지않고 먹은 만큼 에너지를 쓰지 않는 상태로 지내다 보니, 몸에는불필요한 지방이 쌓일 수밖에 없다. 요컨대나잇살에 더해 군살까지 늘어나는 것이다.

이는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갑자기 몸집이 불어났을 때헬켓 전투기처럼 엔진과 프레임을 키우면 몸을 지탱할 수 있다. 즉심장과 골격을 두 배로 키우면 아무리 살이 쪄도 상관없다. 하지만 심장의 크기는 신체 크기와 상관없이 어른 주먹만 하다. 

심장과 뼈를 두 배로키울 수 없다면, 몸을 가볍게 만드는 체중 감량밖에달리 방법이 없다. 이와 같이 체중 감량을 통해 인체의 효율을높이는 일은 오늘날의 현대인에게 절실한 문제다.

평소에 전혀 운동을 하지 않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달리기를 시작하거나 근력 운동을 하면 제일 먼저 근육 속의 탄수화물이 연소한다. 탄수화물은 800킬로칼로리만 비축되어 있기 때문데 순식간에 고갈되고 만다. 이때 탄수화물이 연소하면 젖산이라는 피로물질이 나와서 금세 피로감이 몰려온다. 따라서 오랫동안운동을 지속하기 어렵다.

또한 탄수화물이 바닥나면 혈당도 같이 떨어져서 허기가 밀려온다. 그리하여 식욕을 참지 못하고 배가 부를 때까지 먹으면 일부는 탄수화물로 비축되지만 대부분은 지방으로 축적된다. 바로이것이 운동을 해도 되레 뚱뚱해지는 이유다.
물론 배고픔을 참고 끊임없이 달린다면 지방이 연소되지만, 이는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 그런 연유에서 나는 ‘엑서사이즈(exercise)‘를 하지 말고, ‘엑서사이즈(non-exercise)를 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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