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사리 무덤 앞에 섰을 때는 인생의 비감함을 곱씹게 된다. 쫓겨난광해군의 무덤이 왕릉의 규모일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초라했다. 봉분과 묘비, 상석, 문인석 한쌍, 석등 하나가 전부다. 석등은 총알 자국이 난 채 깨져 있다. 왕실 인물들의 무덤 입구에 보이는 홍살문이나 정자각(丁字閣)도 없다. 규모로 치면 어느 높은 벼슬아치의 무덤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저 ‘아담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누워 있는 광해군 부부에게 그나마 위로가될지도 모를 일이다.

왕릉이나 대군들의 무덤에 참배하려면 대개 무덤 입구에서부터 언덕으로 올라가야 한다. 광해군 무덤은 정반대다. 자물쇠가 달린 녹색철문을 열고 들어와 능선을 내려와야 한다. ‘어차피 쫓겨난 임금 이니 마음놓고 내려다보아도 된다는 심리에서 이런 곳에 무덤을 썼을까? 광해군은 죽은 뒤에도, 지금까지도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었다.

광해군(光海君. 1575~1641)에게만은 달랐다. 쫓겨난 뒤에도 의도적으로 평가절하되고 철저하게 외면되었다. 조선 후기의 역사책이나개인 문집에서 찾을 수 있는 ‘혼군‘ 이나 ‘폐주‘ 라는 명칭은 예외 없이광해군을 가리킨다. 죽은 뒤에도 의도적인 격하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죽은 뒤에도 의도적인 격하를계속 당했다면 살았을 때의 업적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의 반증일 수도있다. 아니면 광해군을 쫓아내고 정권을 잡은 사람들의 치적이 형편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옛날보다 나아진 것이 없다"는 따가운 시선을피하려면 옛 임금에 대한 추억 자체를 없애야만 했을 것이고, 계속 과거와의 전쟁‘을 치러야만 했을 것이다. 그 ‘전쟁‘ 이란 다름 아닌 ‘광해군 죽이기‘ 였을 것이다. 광해군이 죽은 뒤에도 ‘광해군 죽이기‘ 는 계속되었던 것이다.

유몽인의 수난은 목숨이 끊어진 뒤에도 이어졌다. 그는 19세기까지도 ‘섬길 가치가 없는 군주에게 헛되이 충성을 바친 가짜 충신‘으로 매도되었다. 유몽인은 이이첨이나 정인홍처럼 광해군대를 주름잡았던권력의 실세가 아니었다. 광해군에게 그다지 총애를 받았던 적도 없다. 그럼에도 그가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고, 죽은 뒤에도 이렇게 가혹한 비판을 받은 것을 보면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부정적인 것으로 굳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이미 ‘반정‘ 이라는 단어 속에 원초적으로 담겨 있다. ‘반정(反正)‘은 중국의 고전인 『춘추』나 『사기』등에보이는 "발난세반제정(撥亂世反諸.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세상으로 돌이킨다)"이란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따라서 반정은 문자그대로 ‘올바른 상태로의 복귀‘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반정 이전의광해군 시대는 ‘어지럽고 올바르지 못한 시대‘ 일 수밖에 없다.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의 주체들은 자신들의 거사를 정당화하기위한 사업을 펼쳤다. 한편으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거사의 불가피성을 설명하여 인조를 새로운 국왕으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고, 다른한편에서는 광해군 시대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것은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가 정당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무엇보다중요한 작업이었다. 『광해군일기』는 바로 그 과정의 산물이었다.

오늘날 중초븐인 태백산븐 광해군일기가 남아 있는 것은 커다란의미를 지닌다. 중초본과 정서본의 내용을 비교함으로써 일기 편찬 과점에서 자행된 광해군 죽이기‘의 실상을 어느 정도나마 엿볼 수 있기때문이다. 

따라서 정족산본 일기에는 이 내용이빠져 있다. 이미 그를 쫓아내는 명분으로 ‘광해군은 화친론자‘ 라는 명제가 설정되었다면 위의 기사는 지워버리는 편이 인조반정 주체들에게는 훨씬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중초본 일기가 세초되어 사라지고, 정서만 남아 있었더라면 광해군은 자신이 화친론자가 아니라고 ‘변명‘ 조차 못했을 것이다.

중초본 일기를 세초하지 않고 남겨두었던 당시의 실록청 관계자들이혹시라도 광해군이 훗날 재평가되리라고 생각했을까? 이런 문제까지생각해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어쨌든 중초본이 남아 있는 덕분에 가려져왔던 광해군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데 다소나마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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