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한용운의 물음이 떨어졌다. 붉은 가사를 걸친 승려들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고, 법당 안에는 딱딱하고 불길한 침묵이 흐를 뿐이었다. 그러자 사납게 일그러진표정의 한용운이 법상을 박살 낼 듯 주먹으로 두들기며 뇌성벽력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건 바로여기 앉아 있는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
일갈을 한 한용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법당을 나가버렸다. 일제의 어용정책을 수용하는 대가로 감투와 재산을 챙긴 주지들이 한용운의 뇌성벽력에 꼼짝없이 당하고만 것이다.

뒷날 변절한 최남선과 탑골공원 근처에서 마주쳤을 때에도 한용운의 단호하고 직선적인 성격은 그대로 표출된다.
"반해, 오랜만이올시다." 최남선이 한용운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당신 누구시오?" 한용운은 쌀쌀맞게 되물었다.
"나 육당 아니오."
육당이 누구시던가?"
"육당 최남선이오. 그새 잊으셨을리는 없고..
"내가 아는 육당은 벌써 죽어서 장송해버렸소."
한용운은 최남선의 보는 앞에서 이렇게 쏘아붙이고 등을 돌려버렸다.

어릴 적 서당에 다닌 것이 학력 전부인 한용운은 철학과 문학을 스스로 공부하고 동인 활동도 전혀 거치지 않는다. 한용운은 자신의 글과 일치하는 행동을 보임으로써, 학벌이나 유학 이력을 장식처럼 걸친 채 입으로만 민족애를 외치며 학연이나유파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기존의 문단에 경종을 울린다.

한용운은 일생에 걸쳐 징용이나 보국대 또는 황병을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으며 강연도 하지 않는다. 한때 독립운동에 앞장서기도 한 최남선과 이광수를 비롯한 거의모든 문인이 변절하고 말지만, 그만은 다른 면모를 보인 것이다. 신사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는 것은 물론 아예 호적에 이름조차 올리지 않는 등 그는 일제의어떤 강요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평생 조국의 자주독립을 추구한 만해 한용운은광복을 1년 남짓 앞둔 1944년 6월,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숨을 거둔다.

처음 이 시집이 나왔을 때 님이 누구인지를 두고 의견이 구구했다. 말 그대로 사랑하는 님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종교적 해탈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고난에 찬 우리 민족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여성적인 정감의 어조로 일관한 님의 침묵에실린 88편의 시는 단순한 연애시가 아니라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 형상화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말」과 뒤에 일종의 후기로 보이는 탈고 소감이 독자에게」라는 제목으로 실려있어서 이채롭다. 새로운 형식을 선보이며 그 빼어난 시적 성취를 자랑하는 님의침묵』은 민족 전체가 마치 길을 잃은 한 마리 어린 양 처럼 떠돌던 일제강점기,
님이 침묵하던 시절의 시들을 담고 있다. 이 시절의 님은 한용운이 뛰어나게 갈파했듯이 자신의 부재로써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오랫동안 한용운의 남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됐다. 평론가 김우창에 의하면 한용운의남은 "그의 삶이 그리는 존재의 변증법에서 절대적인 요구로서 또 부적응의 원리로서 나타나는 한 한계 원리를 의미하며, 그것은정적으로 있는 민족이 아니라 억압된 민족에 대하여 자주적인 민족을, 사회적으로 억압된 민중에 대하여자유로워진 민중을 실증적으로 파악하는 법에 대하여 보이지 않는 근원적인 진리"를 말한다."

한용운의 시는 사랑과 이별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김소월의 시와 맥락을 같이하지만,
시적 대상과 이를 형상화하는 과정은 전혀 다르다. 

그의 이별은 비록 님은 떠났어도 보내지 않은이별이며, 언제나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이별이다. 낙관성이 깃든 이별법이다. 이것을 구태여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한다면 불교에서 말하는바 끊임없는 자기 부정에의한 달관의 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민족 차원에서는 언젠가 이루어질 조국의 해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개인 차원에서는 완전을 추구해나가는 시인자신의 이상향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가장 쉽게는 남녀 사이의 에로스로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읽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또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중첩된 이미지의 끈을 찾아가는 것이 곧 만해 시 읽기의묘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치는 또 다른 시대에, 여전히 기독교적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러시아라는 다른 문맥 속에서 다시 한번 나타난다. 슬라브인이 된 배치는 여전히 기이한 자, 사사로운 사유가로 머물지만, 이번에는 그 기이함을 달리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사사로운 사유가와 공적인 스승 간의 새로운 대립의 힘을 발견한 사람은 바로 쉐스토브(Léon Chestov)이다. 이전의 백치는 그가 스스로 도달한 명증들만을 원했다. 그러기까지 그는모든 것, 아마도 3+2=5라는 것조차 의심했을 것이다. 그는 자연의 모든 진리들을 의심해 본다. 새로운 백치는 결코 명중들을 원치 않는다. 그는 결코 3+2=5 따위에 스스로를 ‘내맡기지 않는다. 그는 부조리함을 원한다 - 이는 사유의 동일한이미지가 아니다. 예전의 백치는 진리를 원했지만, 새로운 백치는 부조리함을 사유에 있어서 최고의 능력, 말하자면 창조의능력으로 삼고자 한다. 

개념적 인물이 아주 드물게 혹은 암시적으로 그 자신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기에 있다. 또한 그는 명명조차 되지 않은 채로 지하에서 언제나 독자에 의해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가 나타날 때, 때로는 고유한 이름을 갖기도 한다. 플라톤 사상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가장 중요한 개념적 인물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대화들을 기술했으나, 거기에는 대화의인물들과 개념적 인물들이 혼동될 위험이 따른다. 그들은 이름만일치할 뿐, 결코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대화의 인물은개념들을 제시한다. 

설사 그들이 ‘비우호적‘ (antipathiques)일 때조차도 그것은 문제된 철학자가 설정하는 구도와 그가 창조하는 개념들에 전적으로속해 있으면서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구도 자체의 위험들, 즉 잘못된 지각작용들, 좋지 않은 감정들, 혹은 거기서 생겨나는 부정적인 운동들을 지적해 주며, 곧 그들 스스로가 독창적인 개념들에 영감을 불러일으켜, 그러한 개념들의 거부감을 일으키는 성격마저 이러한 독창적 철학을 구성하는 자질로 남게된다. 더욱이 구도의 긍정적인 (positifs) 운동, 호감을 주는(attractifs) 개념들과 우호적인(sympathiques) 인물들의 경우에는말할 것도 없이, 이 모두가 일종의 철학적 감정이입(Einfuhlingphilosophique)이랄 수 있다. 그리고 흔히 이 두 경우들에는 모두커다란 양가성들이 존재한다.

개념적 인물은 철학자의 대변인이 아니라 차라리 그 역이라 할수 있다. 철학자는 단지, 자신의 철학의 중재자들이며 진정한 주체들인 개념적 주요 인물과 모든 다른 인물들의 외피外皮)일 뿐이다. 개념적 인물들은 철학자의 ‘이근동류어‘ (根同類語,
heteronymes)이며, 철학자의 이름은 단지 그의 인물들의 필명일따름이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나의 여러 부분들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구도를 통하여 스스로를 성찰하고 연장시키는 사유능력이다. 개념적 인물은 추상적 인격화, 상징이나 알레고리와는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는 살아 있으며 주장하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개념적 인물들의 특이성(idiosyncrasie)이다. 

그러나 니체에 있어서는 연루된 개념적 인물들이 결코 암시적으로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사실 그들의 그 자체로서의 현현이 일종의 모호함을 부추겨서,
많은 독자들이 니체를 시인, 마술가 혹은 신화의 창조자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념적 인물들은, 니체에 있어서나 다른 경우에 있어서나, 신화적 인격화도, 역사적 인물들도, 문학이나 소설의 주인공들도 아니다. 플라톤에 있어서의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이 역사의 소크라테스가 아니듯이, 니체의 디오니소스도 더 이상 신화의 디오니소스가 아니다. 생성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따라서 디오니소스는 철학자가 되며, 그와 동시에 니체는 디오니소스가 되는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도 시초는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철학자가 되게끔 한 동시에 그 자신은 소크라테스가 되었다.

우리들은 어느 것이 최초의 영토였던가조차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모든 영토는 이전의 영토로부터의 이탈을 전제할 수밖에없는 것 같다. 혹은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영역들은 이 세 개의 움직임들이 서로 뒤섞여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매듭들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일일이 분별해내기 위해서는 진정한 유형들 혹은 인물들을 진단해야만 한다. 상인은 영토 내에서 물건을 사지만, 생산물들을 상품들로 탈영토화시키며, 상업적 순환 위에서 재영토화한다. 자본주의에 있어서 자본 내지 소유는 탈영토화를 거쳐, 더이상 토지가 아니라 생산의수단들 위에서 재영토화된다. 

그러나 단지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일 뿐만 아니라 영혼에 관련된, 단지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 차후에 한정지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절대적이기도 한, 그러한 영토들과 탈영토화는 없겠는가?
사상가, 철학가 혹은 예술가에 의해 환기되는 조국 혹은 고향이란 무엇인가? 철학은 선험, 본연성, 혹은 회상이 그 증거로서 보여주는 어떤 고향과 유리될 수 없다. 

관계적 특질들(traits relationnels)이 있다. 그중 하나가 ‘친구‘
(‘Ami)인데, 그것은 경쟁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의 대상인 어떤사물을 통해서만 친구와 관계를 맺는 그러한 친구다. 사물 혹은개념에 관해 서로 논박하는 것은 바로 ‘주장자‘와 ‘경쟁자‘ 이지만, 개념은 잠이 든 채, 무의식적으로 감지될 수 있는 하나의 육체를 필요로 하며, 그리하여 ‘소년‘ (Garçon)이 개념적 인물들에추가된다. 사랑이란 사유하기를 강요하는 폭력과도 같으나
"연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 - 반면에 우정은 단지 약간의 선한의지만을 요구하는 까닭에, 우리는 이미 또 다른 구도상에 있는것이 아닌가? 또한 철학자 스스로가 여자가 ‘된다‘ 는 것을 배제하지 않고서, 이번에는 ‘약혼녀‘가 그의 파멸을 무릅쓰고라도 개념적 인물의 역할을 자처하겠다는 것을 어찌 막겠는가? 키에르케고르(혹은 클라이스트나 프루스트)가 말했듯이, 여자가 거기에관해서 훤히 알고 있는 친구보다 낫지 않겠는가?

역동적 특질들(traits dynamiques)이 있다. 나아가다, 기어오르다. 내려가다 등이 개념적 인물들의 역동성들이라면,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방식으로 튀어오르다, 니체처럼 춤추다, 멜빌간이 감수하다 등은 서로 환원될 수 없는 철학의 경기자들을 위한 또 다른역동성들이다. 

초월성에 대한 환상들조차 우리에게 도움을 주며 생생한 일화들을 제공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내재성 안에 있는 초월적인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자부할 때, 우리는 내재성의 구도를 내재성 자체로 재충전하도록 할 뿐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89년, 미국무성 정책기획실에 정식 직원으로 근무하던한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다. 그리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상징된, 동구에서의 일련의 사태가이 선언을 뒷받침했다." 그로부터 3년 뒤 그는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을 출간하면서 일약 문제적 철학자가 되고만다. 이것은 일종의 승리선언, 그것도 이중의 승리선언이었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은 그가 말한대로 ‘인정투쟁 의종말이자, ‘철학‘의 종말이기도 했던 셈이다. 이후부터 제기되는 갖가지 사회-정치-경제 문제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원리가 관철되기만 하면 해결될 사안들이기 때문에, 더이상 ‘원리‘를 둘러싼 형이상학적 싸움은 불필요하게 되었으며, 모든 것은 과학기술자, 국가 관료, 그리고 기업가의 일사불란한 ‘처리‘를 통해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후쿠야마의 독창성은 이런 세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을 단순히 ‘최후의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그의 ‘최후의 인간‘은 니체적 의미에서 "승리를 거둔 노예"
를 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거부되어야 할 인간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역사를 다시 전개할 인간, 인정투쟁에 목마른 ‘최초의 인간‘으로의 회귀를 설파한 것은아니다. 그는 이 ‘최후의 인간‘과 ‘최초의 인간‘모두를 거부한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 뒤에 요청하는 인간의 형상은 ‘최후의 인간‘인 노예-동물도 아니고, 전쟁과 혁명을원하는 ‘최초의 인간‘도 아니다. 그가 요청하는 인간은 바로과학기술-경제활동을 통해 ‘우월욕망 megalothymia‘ 을 충족시키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은 결국 긴 마차의 대열이 향하게 될 ‘종착점‘이 결정되었음을 알리는 선언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냉전 종식 이후에 벌어진 전쟁과 분쟁은 후쿠야마에게 아무런 ‘의미 - 목적‘ 을 갖지 않는다. 이는수많은 사람이 엄청난 피해를 입고 죽어나가는 비참한 광경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흘리는 피가 어떠한 새로운 정치적 전망이나 사유를 요청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조르조 아감벤의 정치철학은 이런 언설에 대한 응답으로제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의미 = 목적 없는‘ 싸움속에서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서구 정치철학의 심연에 웅크리고 있던 하나의 인간 형상을 찾아낸다. ‘호모 사케르‘ 라고알려질 이 형상을 통해 역사와 철학을 종말이라는 폐허에서구원해내려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감벤이 이 종말의 형국속에서 또다른 ‘의미 = 목적‘을 찾아내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인간의 역사와 행위가 추구해온 ‘의미 = 목적‘
이 사라진 현재야말로 사유 본연의 임무가 전개되는 국면이라고 주장한다. 

아감벤은 ‘최후의 인간‘과 ‘최초의 인간 사이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기술경제인 한가운데에서,
‘인간‘을 ‘인간‘ 일 수 있게 해온 정치와 언어의 심연을 들여다보려 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주권‘ 에 관한 물음을통해 전개되며, 그 길잡이 역할을 한 이들이 바로 칼 슈미트와 발터 벤야민이다. 바꿔 말하면, 슈미트와 벤야민이 열어놓았지만 충분히 전개되지 못한 ‘역사의 종말‘에 관한 사유를아감벤이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감벤을 통해이들의 ‘역사의 종말‘을 추적하다보면, 그 근원의 연도인1848년과 맞닥뜨리게 된다. 아마도 후쿠야마의 승리선언이무효라고 선언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사유가 1848년을 전유한 방식을 파헤쳐보는 일이 필요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렇게 성립되어온 법의 무엇이 편집적이라는 건지 쉽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법의 역사가 관습과 권리 편집의 역사라는 것은 대충 알 수 있어도 그 법률의 내용이 어떻게 편집적인지는 알기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법이란 어쩔 수 없이 결정적인 조항으로채워져 있어 어떤 부분이 편집적인지 의문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법과 관계된 일에 얽혀보면 그것이 얼마나용의주도하게 편집적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무엇이 법적인 경계선인지 분명히 하려면, 또 그 경계선은 어디에 있는지 설명하려면 금지 조항이 단순한 규정이어서는 충분하지않다. 또한 금지 조항을 깨트리려는 의지가 발동했는지 아닌지 정확하게 설명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편집 규칙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특정한 구실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게 된다. 바로 재판장과 심판 같은 사람이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 스포츠에서는심판, 학교에서는 선생님이다. 최근에는 선생님들이 재판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더 많은 역할을 해주기 바라는데 말이다.

결국 ‘거짓말의 효용‘은 ‘법에서 의제를 활용한다‘라는 말이된다. 저자는 법은 의제를 활용할 때마다 조금씩 편집 · 진화해왔다고 했다. 거짓말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법이란 것도 의외로 부드럽다. 하지만 딱딱한 부분도 있다.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법의 이러한 양면성을 편집술에 적용해보면 두 가지 편집을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제정된 법을 어떻게 법률로 명문화하는지에 대한 편집이다. 이것을 편집공학에서는 컴파일compile‘이라고 한다. ‘코디파이codify" 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어의 편찬에 해당하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이미 편찬된 법의 조문에 준거해 그것을 현실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나 사건, 동향에 맞춰 해석하는 일로서 편집이다.
여기에는 재판관의 일부터 변호사의 일까지, 학자의 일부터 저널리스트의 일까지가 모두 포함된다. 편집공학에서 ‘에디트edic‘에해당한다.

이 책에서 내가 적극적으로 편집술의 대상으로 삼고 싶은 것은
‘에디트‘이다. 이것은 ‘편찬‘에 대응하여 ‘편집‘ 이라고 한다.
물론 양쪽 다 편집술이 필요하지만 컴파일은 더 기초적인 방법이고, 에디트는 더 창발적이고 관계 창조적인 방법이다.

움직이지 않는 지식과 멈춰 있는 사상은 정보가 아니다. 그런 정로는 죽은 정보다. 지식과 사상을 움직이게 할 때, 거기에 편집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깊이와 넓이를 한데 아우르는 현실 통찰, 적확한 어휘 선택, 끈질긴 묘사로 우리나라 사실주의 문학의 거봉으로 우뚝 선염상섭想(1897~1963) 이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 것은 열다섯 살 때의 일이다. 

이에 염상섭은 소설가의 작품은 작가의 사적인 세계와 분리할수 없는 것으로 작품을 논하면서 그 작가의 인격을 비롯한 사사로운 면도 함께 비판하는 것은 비평가의 당연한 권리라고 팽팽히 맞선다. 이는 1920년대에 일어난소설가 김동인과 비평가 염상섭의 대립이자 ‘창조파‘와 ‘폐허파‘의 대립이었다.

이 사건은 문학비평이 일반적인 문학론을 넘어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분화하고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나중에 <폐허>에서 나와 <창조>로 온 염상섭과 김동인이 만나면서 오해를 풀지만, 이 사건은 오랫동안 김동인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한편 <폐허>에서 보인 염상섭의 우울하고 퇴폐적인 시와 비평의 경향은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 「야」, 「제야」 등으로 《개벽》까지 이어지면서 좀더 구체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이인직의 신소설 이래 이광수의 계몽성 소설, 그리고 이에 반발한 김동인과 전영택의
‘창조‘ 역량을 과시하는 소설 몇 편이 나온 바 있지만, 1921년 《개벽》에 실린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우리나라 소설사의 맥락에서 무척 이채로운 작품이었다. 따라서 소설가로서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던 김동인에게조차 염상섭이 햄릿으로 비친 것은 과장이라고 할 수 없다.

염상섭은 이 작품에서 3·1운동 직후 지식인이 겪은 번뇌를 냉철한 시각으로 생물을해부하듯이 임상학적인 수법으로 그려내어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주의 작가‘ 라는평을 듣는다. 아울러 한편으로는 고도의 섬세한 심리 묘사와 상징 기법 위에 폐허> 시절의 퇴폐적이고 음울한 분위기가 덧칠해짐으로써 서구의 ‘자연주의‘ 와는또 다른 색조를 자아낸다.
FAN

1924년 《개벽》 2월호에 「금반지」를 발표하고 이듬해 「전화」, 「전기」, 「조그만 일「밥」 등을 발표하는데, 이러한 작품에서는 초기에 보이던 어두운 면이 많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등장인물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단지 그 인물들의 환경과성격, 심리적 동기를 훨씬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시각과 수법으로 분석함으로써 이른바 리얼리즘‘의 본격적인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이 무렵 작품 활동과 관련하여 견문을 좀 더 넓힐 필요성을 느낀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쿄에 하숙을얻고 양주동과 지내며 일본과 서구의 새로운 문예사조 등을 연구하고 돌아온다.

작가 염상섭은 이러한 줄거리를 통해 구세대 과도기 신세대 또는 봉건 지주 시대, 개화 시대, 자본주의 시대라는 삼분법 속에서 각 세대의 전형을 반영하는 인물들의사고 · 행동 · 갈등을 정밀하게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자본주의 개화 지식인을 대변하는 덕기의 맞은편에 병화로 대변되는 사회주의 지향 세력을 놓으면서도 극단적인 대립구도를 취하지 않고 상대적인 수용자세와 평형을 꾀함으로써 한결 총체적인 리얼리즘을 구현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염상섭의 가장 큰 특기인 극도의 섬세함과 정밀묘사가 단편이 아닌 장편에서는 핵심을 흐리게 만들고 산만한 느낌이 들어서 "예술적 감동력이 미력하다는 지적도 받는다. 특히 염상섭과는 대조적으로문체의 과감한 생략과 간결함을 창작기법의 표준으로 삼고 이에 대단한 자부심을느끼고 있던 김동인은 그의 이러한 지나친 꼼꼼함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한다.

그의 묘사법은 너무 산만적이다. 한 방안에 갑·을병 세 사람이있으면그는 세 사람의 동작심리는커녕 장소며 심지어는 그들의 그림자가 방바닥에 비치인 위치며 그의 그림자가 햇볕의 경계선에 걸쳐 놓인 재떨이까지도묘사하지 않고는 두지 않는다. 한 장면의 대점과 주점을 파악하여 가지고 불필요한 자는 전부 약하여 버리는 조리적 재능이 그에게는 없다.
- 김동인, 「한국 근현대소설」, 김동인 전집 8 

아내가 곁에 있어야만 안심하고 글 쓰는 일에 몰두하던 그는 죽을때에도 당시 쉰두 살이던 부인의 개가를 염려했다는 일화를 남긴다. 한국 현대소설의 개척자 염상섭은 1963년 3월 14일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예순여섯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