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치는 또 다른 시대에, 여전히 기독교적이긴 하지만 이번에는 러시아라는 다른 문맥 속에서 다시 한번 나타난다. 슬라브인이 된 배치는 여전히 기이한 자, 사사로운 사유가로 머물지만, 이번에는 그 기이함을 달리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사사로운 사유가와 공적인 스승 간의 새로운 대립의 힘을 발견한 사람은 바로 쉐스토브(Léon Chestov)이다. 이전의 백치는 그가 스스로 도달한 명증들만을 원했다. 그러기까지 그는모든 것, 아마도 3+2=5라는 것조차 의심했을 것이다. 그는 자연의 모든 진리들을 의심해 본다. 새로운 백치는 결코 명중들을 원치 않는다. 그는 결코 3+2=5 따위에 스스로를 ‘내맡기지 않는다. 그는 부조리함을 원한다 - 이는 사유의 동일한이미지가 아니다. 예전의 백치는 진리를 원했지만, 새로운 백치는 부조리함을 사유에 있어서 최고의 능력, 말하자면 창조의능력으로 삼고자 한다.
개념적 인물이 아주 드물게 혹은 암시적으로 그 자신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기에 있다. 또한 그는 명명조차 되지 않은 채로 지하에서 언제나 독자에 의해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가 나타날 때, 때로는 고유한 이름을 갖기도 한다. 플라톤 사상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가장 중요한 개념적 인물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대화들을 기술했으나, 거기에는 대화의인물들과 개념적 인물들이 혼동될 위험이 따른다. 그들은 이름만일치할 뿐, 결코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대화의 인물은개념들을 제시한다.
설사 그들이 ‘비우호적‘ (antipathiques)일 때조차도 그것은 문제된 철학자가 설정하는 구도와 그가 창조하는 개념들에 전적으로속해 있으면서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구도 자체의 위험들, 즉 잘못된 지각작용들, 좋지 않은 감정들, 혹은 거기서 생겨나는 부정적인 운동들을 지적해 주며, 곧 그들 스스로가 독창적인 개념들에 영감을 불러일으켜, 그러한 개념들의 거부감을 일으키는 성격마저 이러한 독창적 철학을 구성하는 자질로 남게된다. 더욱이 구도의 긍정적인 (positifs) 운동, 호감을 주는(attractifs) 개념들과 우호적인(sympathiques) 인물들의 경우에는말할 것도 없이, 이 모두가 일종의 철학적 감정이입(Einfuhlingphilosophique)이랄 수 있다. 그리고 흔히 이 두 경우들에는 모두커다란 양가성들이 존재한다.
개념적 인물은 철학자의 대변인이 아니라 차라리 그 역이라 할수 있다. 철학자는 단지, 자신의 철학의 중재자들이며 진정한 주체들인 개념적 주요 인물과 모든 다른 인물들의 외피外皮)일 뿐이다. 개념적 인물들은 철학자의 ‘이근동류어‘ (根同類語, heteronymes)이며, 철학자의 이름은 단지 그의 인물들의 필명일따름이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나의 여러 부분들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구도를 통하여 스스로를 성찰하고 연장시키는 사유능력이다. 개념적 인물은 추상적 인격화, 상징이나 알레고리와는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는 살아 있으며 주장하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개념적 인물들의 특이성(idiosyncrasie)이다.
그러나 니체에 있어서는 연루된 개념적 인물들이 결코 암시적으로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사실 그들의 그 자체로서의 현현이 일종의 모호함을 부추겨서, 많은 독자들이 니체를 시인, 마술가 혹은 신화의 창조자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념적 인물들은, 니체에 있어서나 다른 경우에 있어서나, 신화적 인격화도, 역사적 인물들도, 문학이나 소설의 주인공들도 아니다. 플라톤에 있어서의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이 역사의 소크라테스가 아니듯이, 니체의 디오니소스도 더 이상 신화의 디오니소스가 아니다. 생성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따라서 디오니소스는 철학자가 되며, 그와 동시에 니체는 디오니소스가 되는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도 시초는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철학자가 되게끔 한 동시에 그 자신은 소크라테스가 되었다.
우리들은 어느 것이 최초의 영토였던가조차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모든 영토는 이전의 영토로부터의 이탈을 전제할 수밖에없는 것 같다. 혹은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 사회적 영역들은 이 세 개의 움직임들이 서로 뒤섞여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매듭들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일일이 분별해내기 위해서는 진정한 유형들 혹은 인물들을 진단해야만 한다. 상인은 영토 내에서 물건을 사지만, 생산물들을 상품들로 탈영토화시키며, 상업적 순환 위에서 재영토화한다. 자본주의에 있어서 자본 내지 소유는 탈영토화를 거쳐, 더이상 토지가 아니라 생산의수단들 위에서 재영토화된다.
그러나 단지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일 뿐만 아니라 영혼에 관련된, 단지 상대적일 뿐만 아니라 차후에 한정지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절대적이기도 한, 그러한 영토들과 탈영토화는 없겠는가? 사상가, 철학가 혹은 예술가에 의해 환기되는 조국 혹은 고향이란 무엇인가? 철학은 선험, 본연성, 혹은 회상이 그 증거로서 보여주는 어떤 고향과 유리될 수 없다.
관계적 특질들(traits relationnels)이 있다. 그중 하나가 ‘친구‘ (‘Ami)인데, 그것은 경쟁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의 대상인 어떤사물을 통해서만 친구와 관계를 맺는 그러한 친구다. 사물 혹은개념에 관해 서로 논박하는 것은 바로 ‘주장자‘와 ‘경쟁자‘ 이지만, 개념은 잠이 든 채, 무의식적으로 감지될 수 있는 하나의 육체를 필요로 하며, 그리하여 ‘소년‘ (Garçon)이 개념적 인물들에추가된다. 사랑이란 사유하기를 강요하는 폭력과도 같으나 "연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 - 반면에 우정은 단지 약간의 선한의지만을 요구하는 까닭에, 우리는 이미 또 다른 구도상에 있는것이 아닌가? 또한 철학자 스스로가 여자가 ‘된다‘ 는 것을 배제하지 않고서, 이번에는 ‘약혼녀‘가 그의 파멸을 무릅쓰고라도 개념적 인물의 역할을 자처하겠다는 것을 어찌 막겠는가? 키에르케고르(혹은 클라이스트나 프루스트)가 말했듯이, 여자가 거기에관해서 훤히 알고 있는 친구보다 낫지 않겠는가?
역동적 특질들(traits dynamiques)이 있다. 나아가다, 기어오르다. 내려가다 등이 개념적 인물들의 역동성들이라면,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방식으로 튀어오르다, 니체처럼 춤추다, 멜빌간이 감수하다 등은 서로 환원될 수 없는 철학의 경기자들을 위한 또 다른역동성들이다.
초월성에 대한 환상들조차 우리에게 도움을 주며 생생한 일화들을 제공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내재성 안에 있는 초월적인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자부할 때, 우리는 내재성의 구도를 내재성 자체로 재충전하도록 할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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