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와 넓이를 한데 아우르는 현실 통찰, 적확한 어휘 선택, 끈질긴 묘사로 우리나라 사실주의 문학의 거봉으로 우뚝 선염상섭想(1897~1963) 이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 것은 열다섯 살 때의 일이다. 

이에 염상섭은 소설가의 작품은 작가의 사적인 세계와 분리할수 없는 것으로 작품을 논하면서 그 작가의 인격을 비롯한 사사로운 면도 함께 비판하는 것은 비평가의 당연한 권리라고 팽팽히 맞선다. 이는 1920년대에 일어난소설가 김동인과 비평가 염상섭의 대립이자 ‘창조파‘와 ‘폐허파‘의 대립이었다.

이 사건은 문학비평이 일반적인 문학론을 넘어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분화하고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나중에 <폐허>에서 나와 <창조>로 온 염상섭과 김동인이 만나면서 오해를 풀지만, 이 사건은 오랫동안 김동인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한편 <폐허>에서 보인 염상섭의 우울하고 퇴폐적인 시와 비평의 경향은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 「야」, 「제야」 등으로 《개벽》까지 이어지면서 좀더 구체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이인직의 신소설 이래 이광수의 계몽성 소설, 그리고 이에 반발한 김동인과 전영택의
‘창조‘ 역량을 과시하는 소설 몇 편이 나온 바 있지만, 1921년 《개벽》에 실린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우리나라 소설사의 맥락에서 무척 이채로운 작품이었다. 따라서 소설가로서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던 김동인에게조차 염상섭이 햄릿으로 비친 것은 과장이라고 할 수 없다.

염상섭은 이 작품에서 3·1운동 직후 지식인이 겪은 번뇌를 냉철한 시각으로 생물을해부하듯이 임상학적인 수법으로 그려내어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주의 작가‘ 라는평을 듣는다. 아울러 한편으로는 고도의 섬세한 심리 묘사와 상징 기법 위에 폐허> 시절의 퇴폐적이고 음울한 분위기가 덧칠해짐으로써 서구의 ‘자연주의‘ 와는또 다른 색조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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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개벽》 2월호에 「금반지」를 발표하고 이듬해 「전화」, 「전기」, 「조그만 일「밥」 등을 발표하는데, 이러한 작품에서는 초기에 보이던 어두운 면이 많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등장인물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단지 그 인물들의 환경과성격, 심리적 동기를 훨씬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시각과 수법으로 분석함으로써 이른바 리얼리즘‘의 본격적인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이 무렵 작품 활동과 관련하여 견문을 좀 더 넓힐 필요성을 느낀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쿄에 하숙을얻고 양주동과 지내며 일본과 서구의 새로운 문예사조 등을 연구하고 돌아온다.

작가 염상섭은 이러한 줄거리를 통해 구세대 과도기 신세대 또는 봉건 지주 시대, 개화 시대, 자본주의 시대라는 삼분법 속에서 각 세대의 전형을 반영하는 인물들의사고 · 행동 · 갈등을 정밀하게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자본주의 개화 지식인을 대변하는 덕기의 맞은편에 병화로 대변되는 사회주의 지향 세력을 놓으면서도 극단적인 대립구도를 취하지 않고 상대적인 수용자세와 평형을 꾀함으로써 한결 총체적인 리얼리즘을 구현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염상섭의 가장 큰 특기인 극도의 섬세함과 정밀묘사가 단편이 아닌 장편에서는 핵심을 흐리게 만들고 산만한 느낌이 들어서 "예술적 감동력이 미력하다는 지적도 받는다. 특히 염상섭과는 대조적으로문체의 과감한 생략과 간결함을 창작기법의 표준으로 삼고 이에 대단한 자부심을느끼고 있던 김동인은 그의 이러한 지나친 꼼꼼함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한다.

그의 묘사법은 너무 산만적이다. 한 방안에 갑·을병 세 사람이있으면그는 세 사람의 동작심리는커녕 장소며 심지어는 그들의 그림자가 방바닥에 비치인 위치며 그의 그림자가 햇볕의 경계선에 걸쳐 놓인 재떨이까지도묘사하지 않고는 두지 않는다. 한 장면의 대점과 주점을 파악하여 가지고 불필요한 자는 전부 약하여 버리는 조리적 재능이 그에게는 없다.
- 김동인, 「한국 근현대소설」, 김동인 전집 8 

아내가 곁에 있어야만 안심하고 글 쓰는 일에 몰두하던 그는 죽을때에도 당시 쉰두 살이던 부인의 개가를 염려했다는 일화를 남긴다. 한국 현대소설의 개척자 염상섭은 1963년 3월 14일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예순여섯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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