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한용운의 물음이 떨어졌다. 붉은 가사를 걸친 승려들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고, 법당 안에는 딱딱하고 불길한 침묵이 흐를 뿐이었다. 그러자 사납게 일그러진표정의 한용운이 법상을 박살 낼 듯 주먹으로 두들기며 뇌성벽력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건 바로여기 앉아 있는 31본산 주지 네놈들이다!" 일갈을 한 한용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법당을 나가버렸다. 일제의 어용정책을 수용하는 대가로 감투와 재산을 챙긴 주지들이 한용운의 뇌성벽력에 꼼짝없이 당하고만 것이다.
뒷날 변절한 최남선과 탑골공원 근처에서 마주쳤을 때에도 한용운의 단호하고 직선적인 성격은 그대로 표출된다. "반해, 오랜만이올시다." 최남선이 한용운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당신 누구시오?" 한용운은 쌀쌀맞게 되물었다. "나 육당 아니오." 육당이 누구시던가?" "육당 최남선이오. 그새 잊으셨을리는 없고.. "내가 아는 육당은 벌써 죽어서 장송해버렸소." 한용운은 최남선의 보는 앞에서 이렇게 쏘아붙이고 등을 돌려버렸다.
어릴 적 서당에 다닌 것이 학력 전부인 한용운은 철학과 문학을 스스로 공부하고 동인 활동도 전혀 거치지 않는다. 한용운은 자신의 글과 일치하는 행동을 보임으로써, 학벌이나 유학 이력을 장식처럼 걸친 채 입으로만 민족애를 외치며 학연이나유파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기존의 문단에 경종을 울린다.
한용운은 일생에 걸쳐 징용이나 보국대 또는 황병을 찬양하는 글을 쓰지 않으며 강연도 하지 않는다. 한때 독립운동에 앞장서기도 한 최남선과 이광수를 비롯한 거의모든 문인이 변절하고 말지만, 그만은 다른 면모를 보인 것이다. 신사참배와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는 것은 물론 아예 호적에 이름조차 올리지 않는 등 그는 일제의어떤 강요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평생 조국의 자주독립을 추구한 만해 한용운은광복을 1년 남짓 앞둔 1944년 6월,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숨을 거둔다.
처음 이 시집이 나왔을 때 님이 누구인지를 두고 의견이 구구했다. 말 그대로 사랑하는 님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종교적 해탈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고난에 찬 우리 민족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여성적인 정감의 어조로 일관한 님의 침묵에실린 88편의 시는 단순한 연애시가 아니라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 형상화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말」과 뒤에 일종의 후기로 보이는 탈고 소감이 독자에게」라는 제목으로 실려있어서 이채롭다. 새로운 형식을 선보이며 그 빼어난 시적 성취를 자랑하는 님의침묵』은 민족 전체가 마치 길을 잃은 한 마리 어린 양 처럼 떠돌던 일제강점기, 님이 침묵하던 시절의 시들을 담고 있다. 이 시절의 님은 한용운이 뛰어나게 갈파했듯이 자신의 부재로써 스스로 가치와 의미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오랫동안 한용운의 남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됐다. 평론가 김우창에 의하면 한용운의남은 "그의 삶이 그리는 존재의 변증법에서 절대적인 요구로서 또 부적응의 원리로서 나타나는 한 한계 원리를 의미하며, 그것은정적으로 있는 민족이 아니라 억압된 민족에 대하여 자주적인 민족을, 사회적으로 억압된 민중에 대하여자유로워진 민중을 실증적으로 파악하는 법에 대하여 보이지 않는 근원적인 진리"를 말한다."
한용운의 시는 사랑과 이별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김소월의 시와 맥락을 같이하지만, 시적 대상과 이를 형상화하는 과정은 전혀 다르다.
그의 이별은 비록 님은 떠났어도 보내지 않은이별이며, 언제나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이별이다. 낙관성이 깃든 이별법이다. 이것을 구태여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한다면 불교에서 말하는바 끊임없는 자기 부정에의한 달관의 상태로 이해할 수 있다.
민족 차원에서는 언젠가 이루어질 조국의 해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개인 차원에서는 완전을 추구해나가는 시인자신의 이상향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가장 쉽게는 남녀 사이의 에로스로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읽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또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중첩된 이미지의 끈을 찾아가는 것이 곧 만해 시 읽기의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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