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발전하는가‘라는 물음이 역사학의 큰 화두가 된 것은 오래전의일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발전‘이란 용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부터 논해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문명만을 놓고보면 인류는 진보하고있음에 틀림없다. 왜냐면 문명에는 기술의 개념이 들어 있고, 적어도인류는 모든 분야에서 끊임없는 기술 향상을 이루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인류에게 있어 발전은 방향의 문제일 뿐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게 틀림없는 사실이다.

역사란 사건의 나열, 정확히 말하면 ‘사건에 대한 기록의 나열이다. 그 사건이란 인간이 한 짓이고, 또 인간을 둘러싸고일어난 일이다. 자연현상에 의해 일어나는 사건도 있지만 그것마저도 인간이 인식해야만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사건이 된다. 굳이 레오폴트 랑케Languidson Ranke의 독일 역사주의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대중적으로 친근한 역사란 곧 인간의 나열인 것이다.

역사를 알고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어렵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것은 아니다. 가장 간단한 방법 하나를 말하자면 사람 몇 명을 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이력, 즉 그 인간이 한함을 다는 것이다. 흔히 그것을 일화‘ 또는 ‘에피소‘라고 하는데 그런 일이사건이 되어 일화가 생기고 그 일화의 연속이 기록이 되고, 또 역사가 되는것이다. 인간과 역사가 다시 순환을 하였다. 중언이지만 역사는 인간이다.

살아오면서 학교에서 배우고, 책에서 읽고, 방송에서 보고,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스쳐갔던 수많은 인물은 가장 기초적인 역사 지식이다. 본장에나오는 인물들을 보기 바란다. 이것은 본서가 서술하는 통사를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워밍업이다. 가장 기초적인 지식으로 어쩌면 수없이 반복해들었던 이름들일지 모른다.

종교적인 분야를 논하자면 예수보다 600여년 뒤에 태어나 이슬람Islam을 창시한 무함마드Muhammad 또한 비슷한 위치에 있다. 그는 아라비아반도의 메카 Mecca 에서 태어나 다신교가 굳어진 사회에서 새로운 종교,
그것도 일신교神敎를 일으킨 인물이다. 21세기 현재 세상을 지배하는 거대 종교들 중 가장 최근에 등장한 종교를 세운 인물로서 실로 대단한 업적을 이룩하였고 그 영향력 또한 막대하다.

이들은 왔던 순서대로 떠나는데 조조가 220년, 유비가 223년, 손권이252년이다. 이들의 몰년은 각 나라의 운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사이에 제갈량이 왔다 간다. AD 181~234년, 공교롭게도 <삼국지》에는 제갈량과 생몰연대가 똑같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현제유협회이다. 삼국지에서 가장 똑똑한 인물과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저세상에 가서 할 말이 많을 듯하다. 동기는 중요하니까.

수나라도 618년에 망했는데 양광만큼 제멋대로 살고, 거대하고 시원하게 느아먹고 간 인간이 있었을까 싶다. 부러운가.

양귀비로 유명하고 막강 당나라군을 바로 그 당나라 부대로 만든이가 현종이다. 본명 이융기. 현종은 무위불리는 혼란로을 끝내고 성세를 이룩했으나 말년에 정사를 돌보지 않아 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내몰았다. 현종의 실정에 있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인물이유명한 양귀비이다. 하지만 웬 여자 핑계인가. 모든 문제는 황제 자신에게서 온 것을. 현종과 양귀비는 35세 차이인데,

샤를은 AD 814 년에 사망한다. 아버지와 달리 장신이었다고한다. 작은 가문의 한은 안당해본 사람은 모른다."

이 한은 주로 며느리를 통해 풀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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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이용하는 것과 잡생각을 하는 것.
이것도 지속적으로 하려면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지식이다. 한줌에 지나지 않더라도 생각에는 지식이라는 연료가 필요하다. 잡스럽다 할지라도생각과 사고라는 것은 사람이 자라면서 보고 듣고 맛보고 경험한 것, 즉 저절로 알게 된 것들과 외부로부터 배운 것들이 융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나온 산물이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생각이 사다리를 놓고 또 놓으려면 그에 관한 약간의지식이 깔려 있어야만 한다. 공부를 하자는 말이 아니다. 그러면 다시 고통스러워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즐거운 잡생각을 위해 깊은 지식까지는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깊이 들어가면 ‘잡이 아니니까. 그런 정도의 지식을얻는 가장 쉬운 곳이 역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동양의 역사라는 단어에 비해 서양의 히스토리History라는 말은 나이가 많다. 최소한 2,500살은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스어에서 라틴어 또 영어로 옮겨간 이 말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탐구를 통해 얻은 지식‘이라고 했다.

동양이고 서양이고 다 사람이 사는 곳이고, 사람이 일을 벌이는 것이기에 역사는 히스토리를 만나 뜻이 통하는 친구가 된 것이다. 즉 사기가곧 히스토리이고 히스토리가 곧 역사라고 하겠다.

역사는 바뀐다. 그것도 자주 바뀐다. 그 옛날일어났던 그 사건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겠지만 그것을 기록하고 옮겨놓은역사는 불변의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란 ‘어떤 일‘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 어떤 일을 기록한 자료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건이 있었던 그 순간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은그 사건을 기록해 놓은 역사서를 보고 단지 그것을 추정할 뿐이다. 

다만 역사는 오로지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해석에 달린 것이기에 ‘좋은‘ 사람이 해석을 하면
‘좋은‘ 역사가 되고, ‘나쁜 놈‘이 해석을 하면 ‘나쁜‘ 역사가 되며, 무엇인가원하는 게 있는 사람이 해석을 하면 역사는 그 의도를 담게 된다. 

결국 수많은 역사에 관한 문제는 같은 사건을 사람마다 다르게 보기 때문에 일ㅇ나는 결과였던 셈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역사의 해석이 달라지는 또 다른 요인으로 새로운 기록이 발견되거나 유물과 유적 발굴에 따른 정보의 추가가 있다. 그러나 역사 해석의 가장 큰차이는 사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사관이란 역사를 보는 관점을 말한다. 사관에 따라 하나의 사건이 전혀 다른 일처럼, 혹은 전혀 다른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사관이 완전히 굳어져 버렸거나 특정한 목적이 있는 학자에게는 새로운 유물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해석하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사관의 차이가 엄청나게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역사는 불변이 아닌 바뀔 수 있는 것임을, 또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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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1월 11일은 사람들이 제1차세계대전이라고 부르기 전까지는 ‘대전쟁‘이라 불린 싸움이 멈춘 날로 줄곧 기억되었다. 1914년에서 1918년까지 전세계를 휩쓴 전쟁의 종식을 기억하는 것과 그 사건에 붙여진 이름은, 그로 인해 빚어진전례없을 정도로 막대한 희생과 파괴를 반영한다. 

어떻게 왕조에 대한 충성에 기반을 둔 국가를 주민의 민족정체성에 기반을 둔 국가로 전환할 것인가? 이런 근본적인 이슈를 다루는 평화중재자들의 활동은 전적으로 공정하거나 이성적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좀처럼 공을 인정받지도 못했다.

유럽에서는 자신들과는 이질적인 통치자의 통치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감했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이런 활동에 어울리고 그렇게 보여야 했던 평화정착의 세 측면이 있었다. 유럽의 신생국가 다수는 재설정된 국경 내에 사는소수민족의 권리 존중을 약속하는 협정을 맺어야 했다. 이런소수민족 보호 시스템은 시스템을 만든 사람이 기대한 만큼작동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노력에 대한 공은 인정할 만하다.

두 가지 추가적인 혁신이 언급되어야 한다. 우선 미국의 상당한 영향력으로 이른바 ‘국제연맹‘이라는 국제기구가 만들어졌다. 규약(Covenant)이라고 불린 국제연맹 헌장은 개별 강화조약의 첫째 부분에 포함되었다. 막 끝난 끔찍한 전쟁이 재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제관계에 새로운 접근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당시에는 긴급한 어떤 이슈든 논의할 영구적인 국제포럼과, 소수민족 · 위임통치령·국민투표를 감독할 장치, 그리고 기구에 소속된 각 회원국의 독립을 보장할 집단포럼이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기대한 만큼 작동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개념은 이후 국민과 국가지도자들의 생각에 영향을 끼칠 국제관계에 새로운 요소를제시했다.

전쟁에 패배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독일인들은 혼란에 빠졌다. 다양한 단체와 개인이 나서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하고 다른 미래를 제시했다. 다수 군인과 일부정치 지도자들은 독일이 전선에서 진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 유대인을 비롯한 이른바 체제전복 세력들에 의해 등뒤에서 칼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독일을 제외한 국가들은 이른바 ‘대전쟁(the Great War)‘을경험한 뒤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관여할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전쟁을 다른 어떤 나라가 진지하게 일으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1920 년대와 1930년대 초에는 군사력을제한하기 위한 각종 노력이 이루어졌다. 비록 큰 효과는 없었지만, 이런 활동은 대부분의 강대국들이 필요하다고 여긴 것을 보여주었다. 

독일과 이탈리아 및 일본의 관계가 더 돈독해지자, 영국은독일을 상대하기가 더 껄끄러워졌다. 영제국과 전세계 영연방에 대한 위협은 지중해와 동아시아뿐 아니라 유럽에서도경각심을 갖게 했다. 쓰라린 내부 분열은 프랑스의 입장을 더약화시켰다. 독일령 라인란트를 떠나는 대가로 약속받은 미국과 영국의 지원은 없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여러 측면에서 주목해야 한다. 독일공군의 지원을 받는 대규모 기갑부대가 동원된 작전은 적진을 신속하게 돌파해 진격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폴란드 특유의 지형과 열악한 도로 및 비행장 탓에 군용 장비의 피해도상당했는데, 이것은 독일군 수뇌부가 폴란드 침공을 준비할때 고려하지 못한 점이었다. 독일군은 야포 운반을 비롯해 부상자 운송까지 각종 수송을 말에 크게 의존했지만, 현실과 크게 동떨어진 독일 육군의 기계화를 강조하는 선전 영화 때문에 이런 상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공격 전 독일군에는 폴란드의 성직자와 권력 집단 대부분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최종적으로는 전체 폴란드 인구를 독일인 이주자로 대체할예정이어서, 저항 세력을 조직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가능하면 빨리 제거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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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8년의 대전쟁은 지구상의 모든 대양에 걸쳐서 벌어졌고 최종적으로는 교전국이 모든 대륙을 아울렀으니 마땅히
"세계대전"으로 불릴 만하다. 그러나 이 전쟁이 최초의 세계대전은 아니었다. 지난 300년 동안 유럽 열강은 지구 곳곳에서 서로 싸워왔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Karl von Clausewitz)는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 속에서 전쟁이란 정부 정책과 군부의 행위들, 그리고 ‘민족들의 열정‘으로 이루어진 삼위일체라고 표현한 적이있다. 1차세계대전이 왜 일어났고 왜 그렇게 진행되었는지를이해하려면 이 세 가지 요소를 하나씩 따져보아야 한다.

몇몇 사소한 변화를 제외하면 유럽 열강(Great Powers) (여전히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의 모습은 지난 2세기 동안 달라지지 않았지만 세력균형은 급격하게 변화했다. 열강 중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는 이제 독일 제국으로, 1866년과 1870년에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랑스에 승리한 결과, 프로이센 왕국의주도로 탄생했다. 

프랑스는 이 패배로 인해 2등 국가로 전락했고 이러한 현실에 크게 분개했다.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의 영토로 구성된 오스트리아 제국은 1867년 이래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군주국(합스부르크 제국)으로 재편되었고, 독일의 동맹국이라는 종속적 지위를 받아들였다. 

이들 대륙 열강 좌우로는 이해관계가 부분적으로만 유럽에 걸쳐 있는 두 제국이 있었다. 하나는 광대한 반(半)아시아적 러시아 제국으로, 남동부 유럽에서 종종 간헐적이지만 주요 행위자로 활동해왔다. 다른 하나는 영국으로,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해외에서 자국의 영토를 확대하고 공고히 하는 동안 대륙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19세기 말에 러시아 정부의 시선은 아시아로의 팽창에 쏠있었지만 1904-05년 일본에 패배한 후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지배하던 유럽 남동부로 쏠렸다. 원래 그리스와 세르비아, 불가리아의 동방정교 공동체들에 기반을 둔 발칸의민족 저항 운동은 같은 기독교도로서, 나중에는 같은 슬라브족으로서 러시아인들의 후원을 기대해왔다. 

그리스와 세르비아, 불가리아는 19세기를 거치면서 모두 독립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도 슬라브족, 특히 세르비아인과 그들의 사촌 격인 크로아티아인이 다수 있었다. 그리고 신생 슬라브 국가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굳히고 독립을굳건히 해갈수록, 합스부르크 제국은 제국 내 소수민족들 사이에 커져가는 동요와 이를 조장하는 러시아 때문에 갈수록근심이 깊어졌다.

그러나 합스부르크군주국은 전적으로 억눌린 민족들‘로 구성돼 있었다. 18세기에는 지배적인 독일계 엘리트 계층이 있었지만 심지어 이득일인들에게도 이제는 북쪽에 새로운 독일 제국이라는 인접한 조국이 생겼다. 

영국은 대일 동맹을 제외하면 아무런 공식 동맹도 체결하지 않았지만 독일은 영국이 자국을 포위하고 속박하는 그들을 짜고 있다고 불평했고 양국의 관계는 꾸준히 나빠졌다.
1911년 독일이 아가디르 앞바다에서 해군력 시위를 통해 모로코의 프랑스 세력에 도전하고 프랑스에 굴욕을 안기려고했을 때, 영국은 프랑스에 대한 지지를 공공연하게 표명했다.
영국과 독일의 많은 이들이 상대방을 자연스러운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했고 이제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용이하게 지배하려고 제국에 공식 합병했다. 그러자 세르비아 정부는 세르비아 군부 내 요인들이 훈련시키고 지원한 비밀 테러리스트 단체 ‘흑수단(The Black Hand)‘을동원해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을 위한 공공연한 ‘해방 운동‘을 전개했다. 동시에 러시아의 부추김을 받아 발칸 반도에서 궁극적으로 오스만 투르크 세력을 몰아내고자 그리스, 불가리아, 몬테네그로와 함께 ‘발칸 동맹 (Balkan League)‘을 형성하는 데 앞장섰다. 기회는 1912년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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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철구조의 핵심 원리는 음질 내부의 연속적 자질들의 대조이다. 즉의 일부는 다른 일부와 대립한다. 음절의 어느 한 부분을 더 두드러지게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것은 주로 모음 V-vel)과 자음사이의 대조이다. 모든 음질이 하나의 자음과 하나의 후속모음(CV)으로 이루어진 언어들이 있다. 이 경우 연쇄체의 어떤 지점에서도 후속 음소가 속하는 부류를 예측할 수 있다. 더욱 다양한 음절유형을 가지는 어떤 언어에서는 음소 부류의 반복출현이 상이한 정도의예측 확률을 제공한다. [예컨대] CV 구조 외에도 CVC, V, VC 등 다른음절 구성 도식이 사용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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