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11월 11일은 사람들이 제1차세계대전이라고 부르기 전까지는 ‘대전쟁‘이라 불린 싸움이 멈춘 날로 줄곧 기억되었다. 1914년에서 1918년까지 전세계를 휩쓴 전쟁의 종식을 기억하는 것과 그 사건에 붙여진 이름은, 그로 인해 빚어진전례없을 정도로 막대한 희생과 파괴를 반영한다. 

어떻게 왕조에 대한 충성에 기반을 둔 국가를 주민의 민족정체성에 기반을 둔 국가로 전환할 것인가? 이런 근본적인 이슈를 다루는 평화중재자들의 활동은 전적으로 공정하거나 이성적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좀처럼 공을 인정받지도 못했다.

유럽에서는 자신들과는 이질적인 통치자의 통치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감했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이런 활동에 어울리고 그렇게 보여야 했던 평화정착의 세 측면이 있었다. 유럽의 신생국가 다수는 재설정된 국경 내에 사는소수민족의 권리 존중을 약속하는 협정을 맺어야 했다. 이런소수민족 보호 시스템은 시스템을 만든 사람이 기대한 만큼작동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노력에 대한 공은 인정할 만하다.

두 가지 추가적인 혁신이 언급되어야 한다. 우선 미국의 상당한 영향력으로 이른바 ‘국제연맹‘이라는 국제기구가 만들어졌다. 규약(Covenant)이라고 불린 국제연맹 헌장은 개별 강화조약의 첫째 부분에 포함되었다. 막 끝난 끔찍한 전쟁이 재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제관계에 새로운 접근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당시에는 긴급한 어떤 이슈든 논의할 영구적인 국제포럼과, 소수민족 · 위임통치령·국민투표를 감독할 장치, 그리고 기구에 소속된 각 회원국의 독립을 보장할 집단포럼이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기대한 만큼 작동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개념은 이후 국민과 국가지도자들의 생각에 영향을 끼칠 국제관계에 새로운 요소를제시했다.

전쟁에 패배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독일인들은 혼란에 빠졌다. 다양한 단체와 개인이 나서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하고 다른 미래를 제시했다. 다수 군인과 일부정치 지도자들은 독일이 전선에서 진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 유대인을 비롯한 이른바 체제전복 세력들에 의해 등뒤에서 칼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독일을 제외한 국가들은 이른바 ‘대전쟁(the Great War)‘을경험한 뒤 세계 대부분의 나라가 관여할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전쟁을 다른 어떤 나라가 진지하게 일으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1920 년대와 1930년대 초에는 군사력을제한하기 위한 각종 노력이 이루어졌다. 비록 큰 효과는 없었지만, 이런 활동은 대부분의 강대국들이 필요하다고 여긴 것을 보여주었다. 

독일과 이탈리아 및 일본의 관계가 더 돈독해지자, 영국은독일을 상대하기가 더 껄끄러워졌다. 영제국과 전세계 영연방에 대한 위협은 지중해와 동아시아뿐 아니라 유럽에서도경각심을 갖게 했다. 쓰라린 내부 분열은 프랑스의 입장을 더약화시켰다. 독일령 라인란트를 떠나는 대가로 약속받은 미국과 영국의 지원은 없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여러 측면에서 주목해야 한다. 독일공군의 지원을 받는 대규모 기갑부대가 동원된 작전은 적진을 신속하게 돌파해 진격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폴란드 특유의 지형과 열악한 도로 및 비행장 탓에 군용 장비의 피해도상당했는데, 이것은 독일군 수뇌부가 폴란드 침공을 준비할때 고려하지 못한 점이었다. 독일군은 야포 운반을 비롯해 부상자 운송까지 각종 수송을 말에 크게 의존했지만, 현실과 크게 동떨어진 독일 육군의 기계화를 강조하는 선전 영화 때문에 이런 상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공격 전 독일군에는 폴란드의 성직자와 권력 집단 대부분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최종적으로는 전체 폴란드 인구를 독일인 이주자로 대체할예정이어서, 저항 세력을 조직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가능하면 빨리 제거해야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