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바이킹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이 많다. 침략자이고 무법자이며 야만인이라는 편견이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것이 바이킹의전부는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바이킹은 용감한 전사였고, 담대한 모험가였으며, 유능한 상인이었고, 탁월한 뱃사람이었다. 

결국 유럽은 바이킹에게 효율적으로 맞서기위해 백성 가까이에 있는 능력 있는 지방 영주를 중심으로 하는 봉건제도를 발전시켜야만 했다. 그것만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렇게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가 시작되었다. 바이킹이 유럽 대륙의 시스템을통해 역사 발전 방향을 바꿔버린 것이다. 그 정점에 바로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모두에게 존경받았던 바이킹 두목 크누트가, 바이킹 정복자 윌리엄이 있었다.

크누트는 전쟁을 벌여 왕위에 올랐다. 어쩌면 일부의 주장처럼 앞살이라는 책략까지 동원한 끝에 왕이 된 남자였다. 그는 잉글랜드를어떻게 통치했을까? 크누트의 통치를 얘기하기에 앞서 절대 소인바이킹 침략군이 잉글랜드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부터 생각해보자. 바이킹 군대의 용맹이 정복의 진짜 원인이었을까? 아니다. 가장근본적인 이유는 앵글로색슨 정권의 무능함이었다. 애설레드 왕은별칭부터 ‘언레디Unready‘였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리더라는뜻이다. 데인족 바이킹에게서 나라를 지킬 방법도 없으면서 그들을무차별하게 살해한 것이 대표적인 실정이었다.

그러나 크누트에게는 항상 바이킹 출신이라는 태생적 약점이 따라다녔다. 특히 크누트가 능력을 발휘하기 전인 집권 초기, 백성의대다수였던 앵글로색슨인은 자신들과 태생이 같은 애설레드 가문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잉글랜드 교회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상당히 독립적인 권한을 누리고 있었다. 윌리엄이 잉글랜드 교회를 개혁해 교황청과의관계를 복원하겠다고 약속했으니 교황이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중세에 교황의 지지는 정치적으로 매우 유리한 명분이었다.

비밀리에 교황청의 지지를 손에 넣은 윌리엄은 조용히 기회를 기다렸다. 마침내 참회왕의 죽음과 해럴드의 선출로 기회를 잡은 윌리얻은 본격적인 원정대 편성에 착수했다. 그러나 원정이 성공해 공작의 권력이 더욱 강해질 것을 우려한 직속 봉신들은 참전을 거부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의 땅과 진리품을 미끼로 유럽 전역에서 모험가들을 끌어모았다. 이 전략이 대성공을 거둬 윌리엄은 5,000명에 달하는군대를 조직했다.

결국 잉글랜드는 250년 넘게 계속된 바이킹의 침공을 견뎌내지못하고 그들에게 왕위를 내주었다. 그러나 바이킹의 지배 아래 있던것은 잉글랜드뿐만이 아니었다. 지중해 한복판의 시칠리아와 남부이탈리아에도 바이킹 후예들이 세운 노르만 왕국이 있었고, 광활한러시아 땅에 최초의 국가인 키예프 공국을 세운 것도 스웨덴 출신의바이킹이었다. 용맹하고 대담했던 바이킹은 전 유럽을 휩쓸었다. 그렇게 유럽의 역사를 새로 쓴 바이킹 중에서 가장 위대한 리더가 바로대왕大王이라 불리는 크누트다. ‘정복왕‘이라 불리는 윌리엄이다.

 용기! 도전! 얼마 전 스벤 크누트 시대의 덴마크 수도였던 로스킬데를 다녀왔다. 그곳에는 바이킹 박물관이 있는데 바이킹의 배인 롱십Longship들이 전시돼 있다. 유려한 선수와 날렵한 몸체가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특히 정면에서 바라본 롱십의 날카로움은 전율을 느끼게 한다. 손을 대면 베일 듯하다. 

바이킹은 이배를 타고 바다를 가르고, 시대를 가르고, 역사를 갈랐다. 그들은 야만인이고 해적이었다. 동시에 항해자였고 탐험가였으며 개척자였다.
역사의 주인공은 결국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노르망디 침략군을 상대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달아야했다. 1066년 10월14일, 해럴드의 지친 군대는 헤이스팅스 근처에서 윌리엄 군대와 격돌했고, 중무장한 윌리엄의 기사들은 해럴드의 보병대를 격파했다.
격전 중에 해럴드 왕과 그의 형제들은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왕으로 선출된 지 10개월 만이었다. 결국 잉글랜드 왕위는 다시 바이킹의후예인 노르망디 공작에게 돌아갔다. 윌리엄에게는 정복왕 TheConqueror 이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이 붙여졌다. 이후 윌리엄과 그의후계자들은 안정적인 왕조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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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독자들이여, 바로 여기에 지휘자라는 존재의거대한 미스터리가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얼 하는 사람들인가? 무엇이 위대함을 결정하고, 무엇이 숙련도를 결정하는가? 무수한 아마추어 평론가들(인터넷을 보라)럼 여러분도 캐플런과 빈 필하모닉의 말러를 "하나의 게시라 여기는가? 그렇다면 화성학과 대위법, 독보법을 배우는데 평생을 바친 사람들은 어찌 되는가? 콩쿠르에 출전하고,
지방 오케스트라의 보조 지휘자에서 출발해 2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보좌 지휘자로 힘들여 한 발씩 나아가고, 그러고도 빈에서 말러의 교향곡 2번을 지휘할 기회를 평생 잡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찌 되는가?

기묘한 무법의 세계 모든 것과 그에 정반대되는 또 다른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 이는 우리가 속한 분야, 우리가 추구하는 예술, 우리가 종사하는 극장과 우리가 하는일을 위대하게 만드는 공통분모를 찾아내는 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겠지만ㅡ를 탐구하는 것이 나의 집필목적이다. 

여러분이 우리를 사랑할 때 우리는 천재가 된다.
여러분이 우리를 묵살할 때 우리는 사기꾼이 된다. 우리는천재인 동시에 사기꾼이며, 또 그보다 더한 그 무엇이다. 그리고 그보다 미약한 무엇이기도 하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우리를 보며 신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지휘자 역시 그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가 그러하듯, 우리가 무엇이며 무엇이 아닌지를 환히 밝히는 데 도움을 주는 지휘자 신들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지휘란 이를 행하는 자들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는 일이라는 점이다. 가장 위대한 지휘자들조차 다른 지휘자들에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곤 한다. 대개는 작고한 지휘자들이야기를 언급함으로써 현존 지휘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도록 나름의 가림막 장치를 끼워 넣긴 하지만 말이다. 지금도 지휘 기법은 중세 시대마냥 장인이 젊은 도제에게 가르치고 전수하는 식으로 이어진다.

번스타인의 말러 해석이 갖는 주요한 특징 하나는 끊임없이 요동치는 템포다. 번스타인은 청자가 주목해주길 바라는 지점이 다가오면 음악의 템포를 늦추어 관심을 붙들곤한다. 1악장의 처연하고 자그마한 두 음표짜리 선율 또한 들숨과 날숨처럼 들린다. 

카라얀의 말러 교향곡 9번 1악장은 템포가 훨씬 꾸준하다. 대신 카라얀은 점차 긴장감을높여가며 각각의 클라이맥스를 넘고 또 넘는다. 랄렌탄도(템포 확장)를 비롯한 유동적 템포 운용 기법은 자제하고 호홉이 디 긴 임팩트를 노리는 양상이며, 뚜렷이 분절되는 자그마한 아치를 여럿 두기보다는 거대한 하나의 아치를 그려나가는 인상이다. 이 모든 것이, 그리고 이로써 교향곡 전체에 관해 시사하는 바가 이 서사시적 작품의 고작 첫 몇 분 동안 일어난다.

지휘 예술은 역사가 그리 깊지 않다. 기껏해야 200년쯤거슬러 올라가면 끝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중세 길드마냥나이 많은 대가가 시범을 통해 가르치는 것이 보통이다. 지휘자가 작업하는 모습은 신비로운 매력으로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그 모든 파워를 느끼다니 참 근사한 기분이겠다"라고 말하곤 한다(이런 소리를 하는 건 거의대부분 비즈니스맨들이다). 그럴 때면 정작 나는 아무런 파워도 느끼지 못한다고 답하곤 한다. 내게 지휘란 무엇보다 힘겨운 책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휘대에 오르면 강력한힘이 나를 통과한다는 점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휘의 끌힘은 심오하다. 소리의 창조와 소리의수용 사이 중심에 존재하는 데서 오는 기쁨은 마치 마약처럼 우리를 끌어당긴다. 지휘를 잘하는 건 무척 까다로운 일이지만,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질 때는 음악가들과 청중 사이에 예측할 수 없는 신성한 ‘화합‘이 이루어진다. 누군가의인생에 진한 각인을 남기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빚어내며,
신비에 빛을 비추고, 시간을 멈추며, 인간으로서 우리의 본질을 모든 것, 모든 이와 연결하는 불가해한 그 무엇의 일부가 된 듯한 순간이다. 그렇다, 지휘란 그런 경험일 수 있는것이다.

그 어떤 지휘자도 오케스트라 없이 일을 할 순 없다. 우리는 오로지 실전을 통해서만 훈련할 수 있다. 스튜디오에서홀로 연습한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게다가 공연이 마음에 들지 않은 누군가가 쏜 비판의 화살도 모두 우리가 받아내야 한다. 기립 박수를 받고 훌륭한 리뷰 기사가 게재되더라도 우리를 다시 불러준다는 보장은 없다. 다시 말해 ‘지휘자의 커리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일련의 모든과정이 무척 무작위의 흐름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선형 증가 궤도처럼 보이는 것은 오로지 그 핵심만간추려 정리한 지휘자의 홈페이지에서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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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가타리는 자신의 작동을 생산할 뿐인 이 기계, 이내재성으로 충만한 삶이 그려내는 운동의 궤적을 노모스라고불렀다. 들뢰즈가타리에게 노모스는 폴리스와 대립된다. 폴리스가 경계 짓고 테두리 짓고 안과 바깥을 나누는 반면, 노모스는 경계를 지우고 테두리를 허물며 안과 바깥을 넘나든다. 

폴리스가 먹고 호흡하고 말하고 빨고 뱉는 입을 위계화해서 질서를 만드는 반면, 노모스는 먹고 호흡하고 말하고 빨고뱉는 입이 다른 기계와 연결되는 양상 그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노모스는 폴리스의 모든 구분과 분할을 되묻는 힘이다.
그것은 입을 그저 작동할 뿐인 기계로 ‘긍정‘ 함을 뜻한다. 하지만 이 긍정에는 부정의 계기가 포함되어 있다. 이긍정은 철저하게 폴리스의 그물망을 벗어나는 도주의 모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모스의 궤적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입기계를 긍정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란다. 폴리스가 입을어떻게 분할하고 구분하는지, 그 양상을 추적하는 일에서 시작해야만 하는 것이다.

폴리스 바람의 먹는 일은 폭력에 의한 경제 전제적 지배하에 놓여 있는 ‘전정치적 상태의 입인 셈이다. 이는 위의박탈된 삶‘이라는 규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밤에 대한 말의우위, 즉 지배(밥)에 대한 자유(말)의 우위라는 위계의 설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폴리스의 탄생은 두번째second 생명의 부여라기보다는, 두 가지 생명으로의 분할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이 모든 것이 말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라면, 말하는입을 가진 생명은 ‘이미‘ 두 가지로 분할된 채 있다고 해야하리라.

그런 의미에서 폴리스는 먹는 입을 추방하지 않는다. 오히려 먹는 입을 ‘탄생시킨다‘. 말하는 입과의 부단한 분할에 의해서 말이다. 

그럼에도 서구 정치사상은 폴리스를 완결된 내부로 이해해왔다. 그 바깥을폴리스와 무관한 박탈된 삶, 전쟁, 무법, 야만으로 가득 찬, 밥과 생존을 둘러싸고 먹는 입들이 서로 물어뜯는 곳으로 묘사하면서.

그러나 먹는 입이 폴리스가 만들어낸 것인 이상, 그것은 더이상 자연 상태나 동물적 습성으로 이해될 수 없다. 아무리먹는 입을 바깥으로 내몰아 배제하려 해도 불가능한 것이다.
폴리스에는 먹는 입이 태어난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흔적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서구 정치사상에 대한 탈구축"이요청된다. 이를 통해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을 분할하려는 불가능한 시도의 반복이 서구 정치의 아포리아임이 드러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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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편집은 종종 대단한 것으로 인식되기 일쑤다. 요즘은 컴퓨터의 발달로 대규모로 정보처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어떤 사람이든지 인터넷으로 세상의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편집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정보는 얻었지만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의 양에 당황하고 만다. 그래서 ‘무슨 무슨 정리법 같은 책을 사 보기도 한다. 하지만 정보의 처리나 편집에는 정리법보다 사실은 ‘정보의 생김새‘가 힌트가 되는 일이 많다.

편집에는 ‘딱딱한 편집‘과 ‘부드러운 편집‘이 있다. ‘딱딱한 편집‘은 하드웨어 타입 편집으로 인쇄나 VTR, 컴퓨터의 기능과 속성을 활용한 편집을 말한다. 예를 들어 슬로모션을 사용한 영상 편집은 카메라나 재생 장치의 기술과 기능에 근거해서 만들 수 있다.

반면 ‘부드러운 편집‘은 소프트웨어 타입 편집으로 인간의 감각이나 지각, 말이나 몸짓, 행동으로 무엇을 이해하거나 전하는 것을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미디어에서 하는 편집 행위를 말한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딱딱한 편집‘은 기계적인 것으로 디지털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에 반해 ‘부드러운 편집‘은 아날로그적인 것으로 사람답다. 사실 이 두 가지를 디지털형과 아날로그형으로 분명하게 나눠버리는 것은 좀 무리가 있는데, 쉽게 설명하자면그렇다는 것이다. 대충의 뉘앙스는 이해했으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정보의 바탕과 형태를 만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데, 이것은 현재 하드웨어 타입 디지털형의 기능으로는 불가능한경우가 많다. 이것은 사람의 눈과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생활 속의 예를 들자면 아이 키우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아이를 키우려면 우선 육아의 기본에 해당하는 ‘바탕 정보‘가 필요하다. 이 ‘바탕 정보‘는 산모가 출산 전부터 공부해서 머릿속에넣어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막상 아이를 낳고 나서는 아기의다양한 ‘몸짓‘에서 ‘정보‘를 읽어내야 아이를 키운다고 할 수 있다.

갓난아기의 몸짓은 매우 미묘해서 읽어내기 어렵지만 그 속에숨어 있는 특징을 발견하지 못하면 엄마로선 자격 미달이다. 이것이 ‘형태 정보‘ 이다. 엄마는 아기를 키우면서 이러한 ‘형태 정보‘를 읽어낸다.

이렇게 ‘몸짓‘이나 ‘버릇‘에도 나름대로 편집의 동기가 숨어 있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것을 ‘정보의 생김새‘라고 한다.

편집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정보에 서로 영향을 주면서 내용을 의도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것, 이것이 편집의 핵심이며 편집의 세 번째 입구다.

이렇게 ‘말하기‘, ‘대화하기‘의 흐름에는 제법 고차원적인 편집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대화하고 있는 사람들이자신들이 속한 문화와 문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
‘정보의 생김새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호 공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그저 왜 이런 식으로 대화가 이루어져온 것인지, 거기에는 어떤 방법이 움직이고 있는지, 그것은 어떤 편집 방법인지를깨닫지 못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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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하고자 하는 질문은 앞으로 얘기될 것들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 정신분석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이 매우 단순한 질문이며 대답도 매우 단순하다고 생각한다. 대답은 ‘자신을 아는 것‘이다. 

자신을 알고자 하는 것은인간의 매우 오래된 열망이며 그리스 시대부터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자신을 아는 것이 세상에 대한 지식의 기초를 이룬다고 생각해왔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Eckhart)가 매우 강한 논조로 "신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 자신을 아는 것이다"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이것은 가장오래된 인간 열망들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에서 살아나가고, 결정을 내리고, 우선권을 부여하고, 가치들을지니도록 끌어나가는 안내자이자 주도자는 바로 ‘나‘이다.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게 하는 이 ‘나‘라는 주요한 주제에 대해 모른다면 우리의 모든 행동과 우리의 모든 결정들은 반은 눈을 감은상태에서 반은 깨어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인간은 동물과 똑같은 본능을 부여받지는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동물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 이외에는어떤 것도 알 필요가 없다. 물론 이외에 하나의 요건이 필요하긴 하다. 동물들도 매우 하수준의 동물조차도 학습을 필요로하며 본능에도 최소한의 학습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최소한일 뿐이다. 대체로 동물들은 꼭 기억해야만 하는 몇 가지경험들을 제외하고는 더 많은 것을 알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결정하기 위하여 많은 것을 알아야만 한다. 먹고 마시고, 자신을 방어하고, 잠자고, 아마도 어린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고는 인간의 본능은, 인간이 어떻게결정을 내려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자연의 한 가지 짓궂은 장난은 인간에게 성적 만족에 대한 기쁨과 열망을 부여한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욕구가다른 욕구들이나 충동들처럼 그렇게 강렬한 본능적 요구는 단연코 아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영적인, 혹은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또는 인간적인 측면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측면에서도 필요하다.

정신분석은 하나의 치료방법일 뿐만이 아니라, 자기 - 이해를위한 도구이다. 바꿔 말하면 자기 - 해방을 위한 도구이고 삶을위한 도구인데 내 견해로는 이것이 정신분석이 가지고 있는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정신분석에서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치료에 중요하다. 이것은 이미 성경에 나와 있는 주장이다 ;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2) - 왜 자신의 무의식을 아는 것이, 다시 말해 왜 자신을 완전히 아는 것이 한 사람을 증상으로부터자유롭게 만들고 혹은 행복하게 만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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