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가타리는 자신의 작동을 생산할 뿐인 이 기계, 이내재성으로 충만한 삶이 그려내는 운동의 궤적을 노모스라고불렀다. 들뢰즈가타리에게 노모스는 폴리스와 대립된다. 폴리스가 경계 짓고 테두리 짓고 안과 바깥을 나누는 반면, 노모스는 경계를 지우고 테두리를 허물며 안과 바깥을 넘나든다.
폴리스가 먹고 호흡하고 말하고 빨고 뱉는 입을 위계화해서 질서를 만드는 반면, 노모스는 먹고 호흡하고 말하고 빨고뱉는 입이 다른 기계와 연결되는 양상 그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노모스는 폴리스의 모든 구분과 분할을 되묻는 힘이다. 그것은 입을 그저 작동할 뿐인 기계로 ‘긍정‘ 함을 뜻한다. 하지만 이 긍정에는 부정의 계기가 포함되어 있다. 이긍정은 철저하게 폴리스의 그물망을 벗어나는 도주의 모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모스의 궤적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입기계를 긍정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란다. 폴리스가 입을어떻게 분할하고 구분하는지, 그 양상을 추적하는 일에서 시작해야만 하는 것이다.
폴리스 바람의 먹는 일은 폭력에 의한 경제 전제적 지배하에 놓여 있는 ‘전정치적 상태의 입인 셈이다. 이는 위의박탈된 삶‘이라는 규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밤에 대한 말의우위, 즉 지배(밥)에 대한 자유(말)의 우위라는 위계의 설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폴리스의 탄생은 두번째second 생명의 부여라기보다는, 두 가지 생명으로의 분할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이 모든 것이 말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라면, 말하는입을 가진 생명은 ‘이미‘ 두 가지로 분할된 채 있다고 해야하리라.
그런 의미에서 폴리스는 먹는 입을 추방하지 않는다. 오히려 먹는 입을 ‘탄생시킨다‘. 말하는 입과의 부단한 분할에 의해서 말이다.
그럼에도 서구 정치사상은 폴리스를 완결된 내부로 이해해왔다. 그 바깥을폴리스와 무관한 박탈된 삶, 전쟁, 무법, 야만으로 가득 찬, 밥과 생존을 둘러싸고 먹는 입들이 서로 물어뜯는 곳으로 묘사하면서.
그러나 먹는 입이 폴리스가 만들어낸 것인 이상, 그것은 더이상 자연 상태나 동물적 습성으로 이해될 수 없다. 아무리먹는 입을 바깥으로 내몰아 배제하려 해도 불가능한 것이다. 폴리스에는 먹는 입이 태어난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흔적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서구 정치사상에 대한 탈구축"이요청된다. 이를 통해 말하는 입과 먹는 입을 분할하려는 불가능한 시도의 반복이 서구 정치의 아포리아임이 드러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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