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전력을 탄수화물, 휘발유를 지방으로 바뀌표현해 보면 인체의 에너지 소비 시스템과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도 지방을 불태워서 에너지된으로 삼을 때는 탄수화물을 연소하지 않는다. 

반면에 탄수화물을 에너지원으로 삼을 때는 지방을 연소하지않는다. ‘지방 회로‘와 ‘탄수화물 회로‘의 두 가지 에너지 사이클을 구분해서 사용함으로써 몸을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장거리 걷기처럼 천천히 지방을 연소시키는 ‘유산소 운동‘과 단거리 달리기처럼 탄수화물을 연소시켜서 순간적인 힘을 내는 ‘무산소 운동‘이 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유산소 운동에는 적색근, 무산소 운동에는 백색근이 사용되므로, 쓰이는 근육이 서로 다르고 소비하는 에너지 회로도 다르다.

100미터를 전력 질주하는 달리기는 글리코겐(당)을 불태우는무산소 운동이다. 이때 지방은 연소되지 않고, 탄수화물은 바로고갈되기 때문에 오랫동안 달리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게 된다.

반면에 마라톤, 조깅, 에어로빅, 수영 등은 지방을 불태우는 유산소 운동이다. 하지만 동시에 백색근도 사용하기 때문에 역시 탄수화물이 고갈되면 더 이상 운동을 지속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걷기는 적색근만 사용하기 때문에 효율적으로 지방을 연소시킬 수 있다.

그런데 현대인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세 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식생활을 당연시하고 있다. 세 끼 식사뿐 아니라 손만 뻗으면 빵이나 과자를 먹을 수 있는 간식 천국에서 살아간다. 이렇게 하루 세끼에 간식까지 챙겨 먹으면서도 정작 몸을 움직이지않고 먹은 만큼 에너지를 쓰지 않는 상태로 지내다 보니, 몸에는불필요한 지방이 쌓일 수밖에 없다. 요컨대나잇살에 더해 군살까지 늘어나는 것이다.

이는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갑자기 몸집이 불어났을 때헬켓 전투기처럼 엔진과 프레임을 키우면 몸을 지탱할 수 있다. 즉심장과 골격을 두 배로 키우면 아무리 살이 쪄도 상관없다. 하지만 심장의 크기는 신체 크기와 상관없이 어른 주먹만 하다. 

심장과 뼈를 두 배로키울 수 없다면, 몸을 가볍게 만드는 체중 감량밖에달리 방법이 없다. 이와 같이 체중 감량을 통해 인체의 효율을높이는 일은 오늘날의 현대인에게 절실한 문제다.

평소에 전혀 운동을 하지 않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달리기를 시작하거나 근력 운동을 하면 제일 먼저 근육 속의 탄수화물이 연소한다. 탄수화물은 800킬로칼로리만 비축되어 있기 때문데 순식간에 고갈되고 만다. 이때 탄수화물이 연소하면 젖산이라는 피로물질이 나와서 금세 피로감이 몰려온다. 따라서 오랫동안운동을 지속하기 어렵다.

또한 탄수화물이 바닥나면 혈당도 같이 떨어져서 허기가 밀려온다. 그리하여 식욕을 참지 못하고 배가 부를 때까지 먹으면 일부는 탄수화물로 비축되지만 대부분은 지방으로 축적된다. 바로이것이 운동을 해도 되레 뚱뚱해지는 이유다.
물론 배고픔을 참고 끊임없이 달린다면 지방이 연소되지만, 이는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 그런 연유에서 나는 ‘엑서사이즈(exercise)‘를 하지 말고, ‘엑서사이즈(non-exercise)를 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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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서 묘사되는 소돔과 고모라라는 죄악의 도시는 병든 사회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 사회는 ‘세상의 안정‘을 향하여 서로를 도울 수 없었기때문이다. ‘한 사람은 잃지 않고 다른 사람은 이익을 얻는 그러한 방법으로 서로 돕기를 거절하였으므로 소돔과 고모라는제1장에서 언급된 팔꿈치가 반대로 휘어져 서로 협조할 수 없는 연옥의 상황과 유사한 그러한 비참한 시장을 창조했던 것이다.

 창세기에 이와 같은 종류의 ‘병든 시장‘으로 비난받는또 다른 사회가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하늘까지 닿도록 탑을 세우려고 한 바빌로니아의 고대도시 바벨(히브리어로바빌론)의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 결과 신은 벌을 내려 사람들을 지상 각지로 흩어지게 하였다.

배들에 의하면, 바벨 사람들의 가장 큰 실수는 사회적 경제 활동을 자신들의 목적으로 변형시키려고 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우 비록 팔꿈치가 반대로 휘어진 사람들이 서로를 먹여주는 수준까지 왔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천국이라고 할수는 없는 것이다.

제1장의 ‘천국‘에서 그곳의 가장 큰 즐거움의 하나는 식탁에 놓여 있는 맛있는 음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음식을 통하여 더욱 즐거운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인데, 즉 그것은 교환이다. 

만약 팔꿈치가 반대로 휘어진사람이 음식을 옆사람에게 넣어줄 때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모르고 음식을 먹는 상대방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않는다면 음식을 계속하여 입에 넣어주는 행위가 상당히 상대방을 당혹스럽게 할 것이다. 숟가락과 포크가 계속하여 얼굴을 찌르는, 우리가 어렸을 때 경험한 극히 불편한 그런 일을당하면 우리는 아마도 식욕을 잃어버릴 것이다.

‘육체‘와 ‘혼‘의 구별은 간혹 이해가 되기도 하고 더러는 우리를 잘못 이끌기도 하는데 즉각적 즐거움과 누적된 즐거움의차이점처럼 즐거움의 영역으로 고쳐 표현될 수 있다. 육체를만족시키는 것은 육체가 고통받게 하는 것처럼 쉽다. 

 모든 것은 우리 신경단위세포의 속도에 의하여 결정된다. 만약 우리의 신경세포가 속도제한이 있고 아울러 즐거움과 고통의 보상경험을 발생시키는 가장 빠른 길이라면 상대적으로 혼의 경험속도는 아주 늦다. 

 혼의 경험은 우리 삶의 어떤 단계가 지나가고 난 후 진실로 완료되고 명백해지는 것이다. 육체의 경험은반복을 통하여 쉽게 만족되고 그 하나의 산물로서 죽음에 대한 자각을 가져온다. 

그러나 혼은 이와 같은 경험을 다시 읽고이 경험을 존재로 바꾼다. 책임을 가지고 살 때 우리는 잠재성을 극대화하고 부를 창조하고 우주의 거대한 시장(GreatMarket of the cosmos)을 위하여 ‘세계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육체의 풍족이 혼의 풍족에 의하여 한정되어진다는 것과 혼의 경험을 희생시켜 육체 경험을 강조하는 것을 피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즉, 이 법칙은 결핍을 야기하는 죽은 이중의 시간낭비라는 것을 말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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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과 글(제1영역에 속하는 대표적인 요소들)은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다. 한편 무언가가 말해질 때, 그 말에 포함되지 못한 부분들은 이 세상의 미스터리로 남는다.

 루리아Luria에 따르면, 창조주는 자신안에 빈자리를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일체는 비어있을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일체는, 어떤 것이 주장될 때(말해질 때) 동시에 일체가 암시되는 그런 본성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오로지 이로써만알과 인식이라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주 만물의 태초이자 기원이 되는 창조는 ‘일종의 욕망들(vessels)‘이 존재로서 모습을 갖춰가는 분화의 과정이다. 우주의 순수한 본질과 빛은 개별화된 욕망 안에만 담길 수있다. 하나의 단일하고 우주적인 욕망이 산산이 조각나는 과정이곧 창조의 행위이므로, 창조는 본질(essence)적이기보다는 형상(form)적인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형상들로부터 배운 지식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형상들이 등장할 때 온갖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태양에에너지는 분명 지구의 에너지 고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그것을 감당할 만한 또다른 형상(장비, 기술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쓸모가 없다. 이처럼 하나의 형상이 등장하는 순간, 다른 모든 형상들도 잠재적으로 규정된다.

엄밀하게 말해 제1영역은 이런 욕망과 형상들이 모인 차원이며, 이 영역의 밖에는 미처 형상화되지 못한 온갖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어떤 구체적인 문제 또는 상황이 지닌 가치다. 형상은 다른 형상만을 존재케 할 수 있으며, 이런 배타성을통해 역설적으로 본질을 드러낸다. 우상숭배를 금한 십계명도 이와 관련이 있다. 형상은 신이 자신의 안쪽을 비우며 만들어낸 공간 속에서 생겨났으므로, 형상에만 집착하는 태도는 종잡을 수없는 무언가에 현혹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확인할 수 있는 것과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며,
그 중에 확인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존엄한 가치를 지닌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형상일 뿐이며, 오직 보이지 않는신만이 본질이다.

지식도 마찬가지로 창조된 형상들을 통해 생겨난다. 따라서
‘지식‘ 이나 ‘형상‘이 아니라 ‘본질‘을 전하고자 하는 동서고금의 경전들은 반드시 미처 말하지 못한 무언가를, 또는 알려줄 수없는 무언가를 넌지시 암시하는 나름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문자 그대로의 뜻에만 탐닉해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는다면, 본질은 영원히 형상에 의해 감춰지고 형상이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에 접근할 방법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한편, 의식(consciousness)과 지식(knowledge)은 욕망을 만들어내는 현실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형상을 토대로 삼아 본질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일부러 본질과 거리를 둠으로써 현실적인일들이 방해받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절하기도 한다.

거리에서 전달된 질문 때문에 처음 스승이 들려준 대답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본질을 향한 질문이 던져졌을 때, 형상은 그에대한 신의 응답을 드러내는 도구로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질문과 대답 사이에는 ‘간격‘이 있음을 이해해야만 그대답은 온전한 가치를 갖게 되며, 이런 이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하지가 않다. 때로는 대답 그 자체보다 오히려 질문에 더 많은 대답이 들어 있을 수도, 반대로 대답에 질문 그 자체보다 더 많은 의문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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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것이 틀렸다"는 도발적인 제목의 글이 나올 정도로‘ 중국 이해의 불확실성은 심각하다.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선입견으로 인해) 잘못 이해해서이고, 부분적으로는 중국정부가 (그 누구도 전에 가본 적 없는 길을 가느라) 불확실성 속에 있어서이다. 중국공산당은 계속 집권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일반인은 물론이고 중국전문가 사이에서도 중요한 화두가 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일 터이다.

분단된 한반도 남쪽에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화두가 떠오르고 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점점 더 갈등이 심해져 ‘신냉전‘이 거론될 정도이다보니 두 초강대국 사이에 낀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가 목하 심증한관심사이다. 이 질문은 한국사회 내부에서 논쟁 중인 중장기 발전 담론과 결함되어 있다.

이 일을 나름으로 감당하기 위해 저자는 100년의 역사 대화를 본격적으로 시도하려고 한다. 2019년은 마침 중국현대사의 기점으로 흔히 주목되는 1919년 5·4운 동의 100주년을 맞은 해였고, 2021년은 공산당 창당100주년이다. 2019년 또는 2021년의 눈으로 1919년 또는 1921년을 새롭게 보는 동시에 100년 전의 눈에 비춰 지금의 대국 중국을 다시 보는 쌍방향성을 의미한다.

이 100년에 관한 견해는 ‘현대 중국‘으로 보거나 아니면 ‘혁명 중국으로 보는 입장으로 갈릴 수 있다. 전자가 1919년으로 시작된 일반적 의미의 현대사를 가리키고 독립자주와 부강을 추구하기 위해 (서구 경험을모델로 한) 국민국가 건설과 공업화를 실현하는 과정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반(半)식민·반(半)봉건사회 극복을 위한 신해혁명(辛亥革命)과 국.
.
민혁명(國民革命)에 이어 공산혁명으로 귀결된 반제 · 반봉건 혁명의 연속체를 가리키고 (서구와 다른 독자적인 역사 경험을 부각한다.

지금 중국에서는 근현대사를 성공의 이야기로 서술하는 분위기가 점점 짙어지는 듯하다. 청말의 역사가 좌절과 굴욕으로 점철되긴 했으나, 비교의 대상을 다른 "모든 비서방국가로 넓혀보면 그것은국가전환의 매우 성공적인 역사"라는 것이다. 

 이 바탕에는 17세기 후반기 이래 3세기에 걸친 장기 과정으로 보면 ‘국민국가이자 제국‘인 중국이
‘크고 강한‘ 현대국가로 전환한 과정이 제대로 설명될 수 있다는 식의 패러다임이 작동한다. 

그러나 그처럼 장기 시간대에서 중국역사의 구조를파악하다보면 단·중기 시간대의 변화에 소홀하기 쉽다는 점을 지적하지않을 수 없다. 특히 중국이 아편전쟁 (제1차 중영전쟁, 1839~42년)을 겪고 불평등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된 이후의 역동적 변화가 갖는 의미가 간과되기 마련이다. 그 폐단의 핵심인 ‘반(半)식민성‘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해진다. 이로 인해 (의도하는 않는) 중국특수론(예외주의)에 귀결되기쉽다.

한걸음 더 들어가, 혁명사 패러다임의 근간인 ‘반제·반봉건‘이란 과제도 유동하는 역사적 맥락에 놓고 파악할 수 있다. 아편전쟁으로 세계체제에 강제로 편입된 중국의 사회구성을 반(半)식민·반(半)봉건사회로 파악하고 이에 기초해 중국공산당이 정립한 혁명전략이 반제·반봉건이다."

그런데 이중과제론의 시각에서 다시 보면, 전자는 근대적응에 치중했고 후자는 근대극복에 치중한 길이다. 반제·반봉건과제는 자본제적 관계의 작용에 상대식으로 소홀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민족자본가의양면성은 그들이 반제로 나설 가능성 곧 통일전선의 과제를 기민하게 포착하는 데 때로는 장애가 되기도 했다. 저자 식으로 말하면 이중과제 동시 수행의 긴장이 유지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책에서는 큔(Philip A, Kuhn)이 제기한 ‘현정‘(constitution), 달리말하면 국가 구성의 근본적인 제도와 실천 곧 ‘체제‘라는 문제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저자가 그의 패러다임에 주목하는 이유는, 100년의 변혁을 명·청대 이래 장기 지속된 헌정의 (agenda)라는 구조 속에서 파악함으로써 근대주의의 폐해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 속에서 각 주체가헌정의제를 어떻게 구현해낼 수 있었는가를 일관성 있게 사고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정치참여의 확대와 더불어 국가의 권한 및정통성 제고라는 두가지 요구를 한꺼번에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헌정의제의 역사 속에서 매 세대가 자신의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풀어나가려 한 ‘이중과제‘의 구현 과정에 착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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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식욕이라는 단어는 불안을 안기는 단어였던 반면 나는 음식 하면 곧바로 살림에 대한 통제 상실을 연상했다) 그는 그 단어로 더 폭넓은 정서를 건드렸다. 그의 말에는르누아르가 연상되는 느낌이 배음처럼 깔렸고, 어쩐지 음식이라는 순전히 물리적인 대상이 아니라 열정과 관능과 정신적 갈망이라는 더 복잡한, 어쩌면 더 큰 만족을 주는 무언가를묘사하는 것 같았다. 

또 그는 이상한 문맥에서 식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내게 기쁨에 관해 질문할 때나, 내가 삶에서 충분한 ‘재미‘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혼잣말하듯 걱정을 드러낼 때 그랬다. 상담 초기의 구체적인 기먹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런 말 속에 일종의 열쇠가, 애초에 나를 그의 상담실로 이끌었던 여러가지 괴로운 몸부림과 엉킴을 언젠가는 해석해주거나 적어도 새로운 틀로 재구성해줄 암호가 담겨 있었던 것 같다. 

내게 기쁨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완전히 끌어들이고 내 모든 감각을 깨우는 일은무엇인가? 그의 관점에서는 이런 질문들, 그러니까 한 사람이정말로 갈망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에게 진정으로 충족된 느낌을 주는 것은 무엇인지와 같은 질문들이 식욕에 관한 핵심적 질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고집 세고 완강한 환자였던 나는여러 해 동안 그런 질문이 몹시 거슬렸고 그가 핵심을 밝혀내기는커녕 오히려 놓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요점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식욕은 내 모든 부수적괴로움을 끌어다 걸어두는 걸이이며 (나 자신과 수많은 여자들의) 내면에 흐르는 모든 강이 생겨난바다다. 

물론 식욕/욕구apperie란 단어는 우선 먹는 일에 관한 것이다. 다만 먹는 일과관련된 이 부분은 수많은 여자들의 삶을 결정하고, 나 역시 너무나 잘 아는 부분이지만, 이 단어는 갈망과 농경과 필요로 이루어진 훨씬 폭넓은 범위도 아우른다. 

욕구는 세계에 참여하이고자 하는, 삶에서 풍요의 감각과 가능성을 느끼고자 하는 쾌락을 경험하고자 하는 더욱 깊은 수위의 소망에 관한 것이다.

여자들에게는 이 소망이 종종 유난히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펼쳐지지만. 그 고통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르누아르의그림 속 여자들과 우리의 차이가 보인다. 거기에는 그들이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 그러니까 기쁨, 육체 및 영혼과의평화로운 관계, 넉넉함에 대한 우리의 지속적인, 그러나 흔히제대로 표현되지 못하는 갈망이 있다.

 세상에는 삶을 완전히 바꿔놓는 일인데도 겉보기에 너무평범하고 무해해 보여서 좀처럼 그런 일로 인지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그날의 쇼핑도 그런 일중 하나다. 

코티지치즈는 신이 여자들을 고문하기 위해, 여자들의 열망을 더욱 간절하게 만들기 위해 특별히 개발한 음식임이 분명하다. 그것이 접시에 놓인 모습을 떠올려보라. 

이 길은 궁극적으로 음식보다는 감정과관련이 있었고, 허기보다는 허기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과 더욱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 마음가짐이란 우선 우리로 하여금 나는 원한다라고 말하게 이끌고, 그런 다음 더욱중요하게, 나는 그럴 자격이 있다라고 말하게 이끄는 권리 의식,
행위 주체성, 주도성이다. 그날의 구매는 대수롭지 않게 보였을지 몰라도 사실은 하나의 전환점이었고, 한 여자가 한쪽 길에는 ‘텅 빔‘이라고 표시되고 다른 쪽 길에는 ‘가득 참‘이라고표시된 두 갈래 길에서 한 길을 선택한 순간이었다. ‘가득 참‘
이란 것, 포만과 충만과 쾌락이란 것이 내가 손을 뻗어 잡을수 있는 것이라는 믿음이 마음 깊이 없었던 나는 ‘텅 빔‘의 길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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