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과 글(제1영역에 속하는 대표적인 요소들)은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다. 한편 무언가가 말해질 때, 그 말에 포함되지 못한 부분들은 이 세상의 미스터리로 남는다.

 루리아Luria에 따르면, 창조주는 자신안에 빈자리를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일체는 비어있을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일체는, 어떤 것이 주장될 때(말해질 때) 동시에 일체가 암시되는 그런 본성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오로지 이로써만알과 인식이라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주 만물의 태초이자 기원이 되는 창조는 ‘일종의 욕망들(vessels)‘이 존재로서 모습을 갖춰가는 분화의 과정이다. 우주의 순수한 본질과 빛은 개별화된 욕망 안에만 담길 수있다. 하나의 단일하고 우주적인 욕망이 산산이 조각나는 과정이곧 창조의 행위이므로, 창조는 본질(essence)적이기보다는 형상(form)적인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형상들로부터 배운 지식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형상들이 등장할 때 온갖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태양에에너지는 분명 지구의 에너지 고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그것을 감당할 만한 또다른 형상(장비, 기술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쓸모가 없다. 이처럼 하나의 형상이 등장하는 순간, 다른 모든 형상들도 잠재적으로 규정된다.

엄밀하게 말해 제1영역은 이런 욕망과 형상들이 모인 차원이며, 이 영역의 밖에는 미처 형상화되지 못한 온갖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어떤 구체적인 문제 또는 상황이 지닌 가치다. 형상은 다른 형상만을 존재케 할 수 있으며, 이런 배타성을통해 역설적으로 본질을 드러낸다. 우상숭배를 금한 십계명도 이와 관련이 있다. 형상은 신이 자신의 안쪽을 비우며 만들어낸 공간 속에서 생겨났으므로, 형상에만 집착하는 태도는 종잡을 수없는 무언가에 현혹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확인할 수 있는 것과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며,
그 중에 확인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존엄한 가치를 지닌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형상일 뿐이며, 오직 보이지 않는신만이 본질이다.

지식도 마찬가지로 창조된 형상들을 통해 생겨난다. 따라서
‘지식‘ 이나 ‘형상‘이 아니라 ‘본질‘을 전하고자 하는 동서고금의 경전들은 반드시 미처 말하지 못한 무언가를, 또는 알려줄 수없는 무언가를 넌지시 암시하는 나름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문자 그대로의 뜻에만 탐닉해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는다면, 본질은 영원히 형상에 의해 감춰지고 형상이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에 접근할 방법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한편, 의식(consciousness)과 지식(knowledge)은 욕망을 만들어내는 현실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형상을 토대로 삼아 본질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일부러 본질과 거리를 둠으로써 현실적인일들이 방해받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절하기도 한다.

거리에서 전달된 질문 때문에 처음 스승이 들려준 대답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본질을 향한 질문이 던져졌을 때, 형상은 그에대한 신의 응답을 드러내는 도구로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질문과 대답 사이에는 ‘간격‘이 있음을 이해해야만 그대답은 온전한 가치를 갖게 되며, 이런 이해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하지가 않다. 때로는 대답 그 자체보다 오히려 질문에 더 많은 대답이 들어 있을 수도, 반대로 대답에 질문 그 자체보다 더 많은 의문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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