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식욕이라는 단어는 불안을 안기는 단어였던 반면 나는 음식 하면 곧바로 살림에 대한 통제 상실을 연상했다) 그는 그 단어로 더 폭넓은 정서를 건드렸다. 그의 말에는르누아르가 연상되는 느낌이 배음처럼 깔렸고, 어쩐지 음식이라는 순전히 물리적인 대상이 아니라 열정과 관능과 정신적 갈망이라는 더 복잡한, 어쩌면 더 큰 만족을 주는 무언가를묘사하는 것 같았다.
또 그는 이상한 문맥에서 식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내게 기쁨에 관해 질문할 때나, 내가 삶에서 충분한 ‘재미‘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혼잣말하듯 걱정을 드러낼 때 그랬다. 상담 초기의 구체적인 기먹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런 말 속에 일종의 열쇠가, 애초에 나를 그의 상담실로 이끌었던 여러가지 괴로운 몸부림과 엉킴을 언젠가는 해석해주거나 적어도 새로운 틀로 재구성해줄 암호가 담겨 있었던 것 같다.
내게 기쁨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완전히 끌어들이고 내 모든 감각을 깨우는 일은무엇인가? 그의 관점에서는 이런 질문들, 그러니까 한 사람이정말로 갈망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에게 진정으로 충족된 느낌을 주는 것은 무엇인지와 같은 질문들이 식욕에 관한 핵심적 질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고집 세고 완강한 환자였던 나는여러 해 동안 그런 질문이 몹시 거슬렸고 그가 핵심을 밝혀내기는커녕 오히려 놓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요점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식욕은 내 모든 부수적괴로움을 끌어다 걸어두는 걸이이며 (나 자신과 수많은 여자들의) 내면에 흐르는 모든 강이 생겨난바다다.
물론 식욕/욕구apperie란 단어는 우선 먹는 일에 관한 것이다. 다만 먹는 일과관련된 이 부분은 수많은 여자들의 삶을 결정하고, 나 역시 너무나 잘 아는 부분이지만, 이 단어는 갈망과 농경과 필요로 이루어진 훨씬 폭넓은 범위도 아우른다.
욕구는 세계에 참여하이고자 하는, 삶에서 풍요의 감각과 가능성을 느끼고자 하는 쾌락을 경험하고자 하는 더욱 깊은 수위의 소망에 관한 것이다.
여자들에게는 이 소망이 종종 유난히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펼쳐지지만. 그 고통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르누아르의그림 속 여자들과 우리의 차이가 보인다. 거기에는 그들이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 그러니까 기쁨, 육체 및 영혼과의평화로운 관계, 넉넉함에 대한 우리의 지속적인, 그러나 흔히제대로 표현되지 못하는 갈망이 있다.
세상에는 삶을 완전히 바꿔놓는 일인데도 겉보기에 너무평범하고 무해해 보여서 좀처럼 그런 일로 인지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그날의 쇼핑도 그런 일중 하나다.
코티지치즈는 신이 여자들을 고문하기 위해, 여자들의 열망을 더욱 간절하게 만들기 위해 특별히 개발한 음식임이 분명하다. 그것이 접시에 놓인 모습을 떠올려보라.
이 길은 궁극적으로 음식보다는 감정과관련이 있었고, 허기보다는 허기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마음가짐과 더욱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 마음가짐이란 우선 우리로 하여금 나는 원한다라고 말하게 이끌고, 그런 다음 더욱중요하게, 나는 그럴 자격이 있다라고 말하게 이끄는 권리 의식, 행위 주체성, 주도성이다. 그날의 구매는 대수롭지 않게 보였을지 몰라도 사실은 하나의 전환점이었고, 한 여자가 한쪽 길에는 ‘텅 빔‘이라고 표시되고 다른 쪽 길에는 ‘가득 참‘이라고표시된 두 갈래 길에서 한 길을 선택한 순간이었다. ‘가득 참‘ 이란 것, 포만과 충만과 쾌락이란 것이 내가 손을 뻗어 잡을수 있는 것이라는 믿음이 마음 깊이 없었던 나는 ‘텅 빔‘의 길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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