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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그린 화가, 에곤 실레
에스터 셀스던.지넷 츠빙겐베르거 지음, 이상미 옮김 / 한경arte / 2024년 10월
평점 :


책이 도착하기를 손꼽아 기다렸고, 받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습니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흡입력 있는 책이에요. 그럼에도 읽으며 내내 불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 책에서 그려지는 에곤 실레는 예술가라면 의례히 겪는 생활고나 상실의 아픔 따위는 없이, 자신의 관심과 성공에 충실한 삶을 살았던 행복한 작가처럼 보입니다. 예전에 에곤 실레에 관한 책을 한 권 읽었었는데, 화가의 상실과 고통이 크게 느껴졌던 기억을 가지고 있거든요. 또한 이 책처럼 적나라한 누드화가 가득 담겨 있지도 않았고요.^^;
이제 와 생각해보니, 우리나라 특유의 性에 대해 드러내기를 부끄러워 하는 분위기 때문에 저자께서도 그렇게 쓸 수 밖에 없지 않았나 싶어요. 이렇게 왕성한 집중력으로 온갖 性에 관해 다작한 작가에 관해, 전혀 다른 관점의 글이 되었던 거죠.
이 책은 우리나라의 터부에서 자유로운 영국과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작가와 미술사학도 두 분이 쓴 책입니다. 작가에 대한 과도한 예찬이나 비판없이, 작품을 중심으로 에곤 실레를 해석하고 있어 독자에게도 작품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 사회도 많이 열려서 이런 분방한 느낌이 드는 그림들도 작가의 고유성으로 인정하게 된 거 같습니다. 예전에는 누드 스케치가 전시된 클림트전이 몹시 불편했던 저도, 이 책이 불편했던 이유가 적나라한 누드화가 많아서라는 것을 깨닫자 에곤 실레가 자신의 욕망과 관심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추구한 작가였구나 느낍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의 자세에 놀라움이 덜어지자, 인물들의 시선과 표정에서 더욱 많은 이야기를 찾고 싶어지네요. 이 책은 우리 사회의 변화를 잘 감지하여, 에곤 실레를 대표하는 그림과 화가를 깊이 이해한 작가들의 글로 엮었습니다.

예술가는 ego가 강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화가는 나를 드러내지 않고는 못 견뎌서 자화상을 그린다고도요. 자신의 가득한 욕망을 화폭에 그대로 옮길 정도로 솔직한 에곤 실레. 감정에 충실하니 당연히 자화상을 많이 그렸을테지요. 이 책에도 많은 자화상이 실렸습니다. 인상을 쓰고 있는, 고개를 숙인, 비스듬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화가의 자화상에는 당당하다기 보다는, 예민하고 부끄러워하지만 보는 사람의 시선을 열렬히 바라고 있는 화가 본인의 마음이 엿보이는 거 같습니다.

에곤 실레의 파격적인 그림은 당시에도 큰 논란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술애호가들이 에곤 실레를 버릴 수가 없었을 거 같아요.
저는 의자에 앉아 있는 친우의 옆모습을 그린 이 그림을 오래도록 들여다 보았습니다. 친우의 자세와 생각에 잠긴 듯한 무표정. 아마도 친우는 조금 지치고, 어쩌면 깊은 고뇌에 빠져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에곤 실레는 친우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채색하며 친우에게 애정 어린 격려를 보냈겠지요. 단조로워 보이는 회색 배경과 소파지만, 질감을 달리해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 내어 보는 이에게 친우가 있는 시간적, 공간적, 심리적 공간을 상상하게 합니다.
그림 한 장에도 이렇게 스킬과 감정을 담아내는 화가이기에, 빈의 미술계를 이끌게 되었을 테지요.
이 책의 가치는 작품을 통해 화가 에곤 실레를 보여준다는 데 있습니다. 에곤 실레의 누드화는 에곤 실레 자신이 온갖 종류의 性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겠지만, 당시 빈에 상업적인 목적으로도 누드화가 유행했음을 알려줍니다. 자화상에서 드러나는 심리 변화, 지인들을 그린 그림에 드러나는 감정들, 반복해서 그리는 거리와 나무 그림에서 보여지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감수성과 재능이 풍부한 청년 에곤 실레를 만나게 됩니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이 미술을 사랑하는 독자께 즐거운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