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뢰 연습
수잔 최 지음, 공경희 옮김 / 왼쪽주머니 / 2020년 11월
평점 :
처음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눈길을 확 끄는 표지때문이었습니다.
인터넷 서점을 들락거릴 때마다 팝업되는 아름다운 표지,
한국계 작가의 전미도서상을 수상작이라는 홍보 문구.

저자인 수전 최는 한국인 아버지를 가졌지만, 완전한 미국인입니다. 책에서 단 한 부분도 한국적 정서라든가, 한국의 문화를 느끼지 못했어요. 괜히 혈연에 집착한 저는 왠지 낯설기도 했답니다.
한편, 긴 이야기를 넘나들며 탄탄하게 짜인 이야기 구조와, 섬세하고 예리한 심리 묘사가 작가로서의 역량이 출중하구나, 전미도서상을 수상한 작품이란 이런 정도의 깊이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구나하고 감탄했습니다.
또한 이 책의 번역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요즘 책들을 읽다보면 대체 원작에 어떻게 쓰였던 걸까 궁금한 번역들이 꽤 있었는데, 이 책은 그런 부분 하나 없이 스토리의 전개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관록의 번역 작가, 공경희님의 재발견에 기뻤습니다.
책은 세 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장 긴 첫 번째 이야기는 세라라는 16세 소녀가 겪는 이야기입니다.
세라는 같은 반 친구 데이비드와 갑자기, 불같은 사랑에 빠졌다가 영문도 모른 채 한 순간에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고 맙니다. 아직 데이비드를 사랑하는 세라는 점점 우울하고 불안해지며 스스로 고립된 섬이 되어갑니다. 데이비드 또한 세라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기를 망가뜨리고요.
두 번째 이야기는 30세가 된 캐런이 화자가 됩니다.
이 이야기로 첫 번째 이야기는 작가가 된 세라가 쓴 소설 내용임을 알게 되지요.
캐런이 경험했던 그 시절의 사건들은 전혀 다른 진실을 가지고 있습니다.
캐런은 너무 힘들었던 그 시절의 경험으로 심리 치료를 계속 받고 있습니다.
세 번째 짧은 이야기는 24살의 클레어가 겪는 사건으로 독자에게 진실의 단초를 줍니다.
세라와 데이비드는 연기 수업 '신뢰 연습' 도중에 서로를 발견하고 열렬한 연인이 되지만, 일련의 사건 끝에 다시 돌아온 수업 시간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아픔만이 남게 된다. 그리고 학생들의 우상이자 정신적 저주인 킹술리 선생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출판사 소개글을 대강 읽어보고 '재미나겠는 걸~영화 '어톤먼트'에서 철없는 아이의 거짓말이 빚어낸 비극이 평생가듯 선생님의 개입으로 사랑하는 남녀가 평생을 걸쳐 방황하는 이야기인가'했답니다.
책 내용이 이렇게 예상과 다른 적도 드무네요.ㅎㅎ
책 제목에서 인물들 사이에 '신뢰'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주겠거니 했는데, 정작 책을 읽어보니 반대의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세 이야기 속에서 화자들은 조금씩 변주된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남자 친구의 데이트 폭력, 선생님과의 부적절한 관계, 도움을 가장한 성폭력 시도.
또한 이 책에서는 게이 선생님과 학생의 부적절한 관계도 보여줍니다.
그리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소녀들의 의존과 집착, 분노는 다른 사건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분노는 선생님, 절친에게 상처를 주는 거짓말과 억지, 자기파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하네요.
p. 274
"애들이 다 알고 하는 짓이라고. 우린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았어. 우리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우린 어렸어."
캐런은 조심스레 대할 대상이 데이비드인 양 조심스레 대꾸했다. 대화로 상처받을 사람은 그가 아닌데도. 하지만 그녀가 조심했는데도 데이비드는 발끈했다. 그가 경멸하듯 웃음을 터뜨리고는 쏘아붙였다.
"우린 절대 어리지 않았어."
책에서 같은 사건에 대해서 피해자와 가해자는 전혀 다른 기억과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녀들은 남자 친구와 사랑하는 어른에게서 그루밍 성폭력을 당하고 깊은 상처를 입은 반면 가해자 측에서는 동의한 바라고 생각하지요. 분명 서로 좋아해서 동의한 일이었지만, 상황이 변하고 마음이 바뀐 것뿐이다라면 또 달리 해석될 요지가 많기도 합니다.
책은 우리의 삶 자체가 현재진행형의 '신뢰 연습' 수업 중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다만 이 수업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신뢰하라!'는 수업이 아닙니다.
이 책은 친구든 연인이든 선생님이든 부모든, '무조건적인 신뢰가 가능한가, 신뢰를 저버린 상대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뻗어나가는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또한 감수성이 칼끝같이 예민한 청소년기의 경험이 삶을 얼마나 풍부하게, 혹은 얼마나 비참하게 느끼게 하는가 기억하게 합니다.
내용 상 청소년이 읽기에는 부적합한 성적 행동, 약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청소년에게 권하지 못해 아쉽습니다. 청소년이기에 겪게 되는 감정의 변화와 깊이, 의존에 대해 예리하게 묘사된 책이라서요. (이것도 꼰대같은 발상일가요..)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은 사람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많은 사람들 모두 읽고 이야기 나누기에 더없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