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한 마음이 모두 소진되어 오늘은 이만 쉽니다
홍환 지음 / 김영사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띠지에 적힌 ‘뼈를 후려치는 메모’라는 표현에 120% 공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책을 유쾌하게 읽을 거라고 생각한다.
가끔 무라카미 하루키가 떠오르기도 하는 통쾌한 문장력에 속이 뻥 뚫린 듯 시원하기도 했지만 너무 내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아서 읽는 내내 마음이 가라앉았다.
작가님이 20대에 겪은 가난과 불안과 외로움이 애써 구석으로 몰아두었던 힘들었던 내 과거를 소환해왔다.

생각해보면 나는 내내 가난했다. 남 보기엔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의 딸로 깔끔하게 차리고 다녔으니 대학 때 사람들은 내가 요리는커녕 설거지도 안 해봤을 거라고 멋대로 판단했지만 늘 부족한 용돈으로 생활해야 했던 탓에 밥 사달라고 조르는 후배들이 반갑지 않았고 큰맘 먹고 식사 약속을 잡으면 꼭 누군가를 달고 오는 것도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국립대에서 장학금도 내내 받았으니 학비 부담도 크지 않았는데 그렇게까지 쪼들리게 생활하게 한 부모님께 조금 서운한 마음도 든다.
대학을 졸업하고 모 대학 도서관에 사무조교로 취업해서 일용직 아르바이트보다도 못한 급여를 받으면서도 없으면 없는 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며 돈을 쫓는 사람들을 속물스럽다고 여기기까지 했었다.
출산 후 은행에 취업을 했지만 겉보기에 그럴싸해 보일 뿐 사실 계약직이었고 무엇보다 급여가 터무니없이 낮았다.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근무할 때에도 정직원이라는 체감은 거의 없었다.
투잡, 쓰리잡으로 몇 년을 일한 적도 있었다. 깊은 이야기까지는 꺼내놓지 못 하겠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깊게 새겨진 상처를 보는 양 통증이 느껴진다.

분명 재미있는 이야기가 더 많은데 나는 아픈 과거 이야기에 대해 더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자꾸만 책장을 덮었다.
나도 작가님처럼 어린 시절의 나에게 제사를 지내는 심정으로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뭔가를 해야만 되겠다.

행복에 대하여 “일과를 끝내고 잠자려고 누웠을 때 아무런 근심 걱정도 떠오르지 않는 편안한 마음 상태”라고 정의해놓은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몹시 공감한다.
p. 1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멀 피플 아르테 오리지널 11
샐리 루니 지음, 김희용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4월
평점 :
품절


제목은 노멀 피플이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부유하고 똑똑하지만 오만한 태도로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메리앤, 메리앤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미혼모의 아들이지만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 코넬의 이야기.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리지만 남들의 시선을 감당하기엔 잃을 게 많은 코넬의 제안대로 비밀리에 만난다.
 
대도시의 대학에 진학한 두 사람이 계급주의에 내몰려 처지가 뒤바뀌는 것도 인상적이다. 가난한 코넬은 더 이상 인기남이 아니라 촌뜨기 취급을 당하고 부쩍 세련되게 변한 메리앤의 주변에는 항상 친구들이 넘쳐난다.
사람들과의 관계와 시선에 따라 자존감의 크기는 달라진다. 비로소 눈에 보이는 상대방의 결핍과 불안을 거부하지 않고 여전히 서로를 원하면서도 계속해서 어긋나고 빗나가는 두 사람의 복잡한 심리를 더할 수 없이 섬세한 터치로 그리고 있다.

나를 온전히 나로서 자유롭게 하던 사람을 만난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강렬한 사랑의 유효기간이 지나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100% 완벽한 사람이 아니구나, 깨달았을 때 나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던가 하는 생각도.

오랜만에 마음속 깊이 스미는 로맨스 소설을 읽고 나니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가슴 졸이며 내내 몰입해서 읽었지만 내 짧은 문장력으로 표현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다만, 사람들이 샐리 루니를 이야기할 때 젊은 나이와 프랑스와즈 사강을 언급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는 자신이 메리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기 위해, 그 생각을 종이 위에 몇 번이고 적어보았다. 그녀가 어떤 모습인지, 그녀가 어떻게 말하는지를 글로 정확히 묘사하고 싶은 욕망에 그는 가슴이 뭉클하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옷. 점심시간에 그녀가 학교 구내식당에서 읽는, 민트 색 책등에 표지에는 어두운 분위기의 프랑스 그림이 그려져 있는 『스완네 집 쪽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그녀의 긴 손가락. 그녀는 다른 아이들과 같은 종류의 삶을 영위하고 있지 않다. - P38

메리앤, 나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아니지만 가끔은 하느님이 나를 위해 너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어. - P143

누군가를 좋아하기 때문에 어떤 결정들을 내리고, 그러고 나면 삶 전체가 달라진다는 건 재미있는 일이야. 지금 우리는 사소한 결정들로도 삶이 크게 바뀔 수 있는 그런 기묘한 나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껏 넌 나한테 대체로 아주 좋은 영향을 미쳤고, 나는 내가 확실히 더 나은 사람이 된 기분이 들어. 네 덕분이지. - P285

그는 그녀에게 마치 선물처럼 선한 면모를 선사해주었고, 이제 그것은 그녀의 것이다. 한편 그의 삶은 그의 눈앞에서 동시에 사방으로 펼쳐진다. 지금껏 그들은 서로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정말이야, 정말. 그녀는 생각한다. 사람들은 정말로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어. - P3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강하게 흔들리고 있어
최은주 지음 / 지구불시착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두물머리에 살고 돈 안 되는 일은 잘하는 최은주 작가의 백수일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솔직한 작가의 일상과 생각을 눈으로 쫓는 것이 기대보다 훨씬 재미있다.

공황장애때문에 만족스럽던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백수의 삶을 가꾸어나가는 양수리 감성돈.
조금 짠내가 나지만 주어진 상황을 즐길 줄 알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소소한 행복을 얼마든지 찾아내는 그녀에게서 희한하게 위로를 받는다.

감추는 것도, 센 척도 없는 행복한 백수 최은주 작가님에게 돈 되는 일도 자꾸 생겨났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글 원없이 쓰시고 또 나도 읽을 수 있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익스플로러 아카데미 1 - 네뷸러의 비밀 익스플로러 아카데미 1
트루디 트루잇 지음, 스콧 플럼 그림, 권가비 옮김 / 매직사이언스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학무식자도 푹 빠져서 읽게 되는 너무너무 재미있는 SF소설.
1997년부터 2007년까지 해리포터가 있었다면 지금은 <익스플로러 아카데미>다.
해리포터에 마법이 있었다면 <익스플로러 아카데미>에는 첨단과학이 있다. 증강현실, 4D프린팅, 내 명령을 수행하는 꿀벌 모양의 초소형 드론 등등.
시작부터 혼을 쏙 빼놓게 매혹적이다.

매년 단 25명까지만 입학을 허가하는 익스플로러 아카데미.
전세계에서 선발된 최정예 학생들이 이곳에서의 훈련을 통해 세계를 누비며 탐험가이자, 과학자, 환경운동가인 익스플로러로 활동하게 된다.
하와이에 사는 12세의 크루즈 코로나도는 익스플로러 아카데미에 합격하여 워싱턴 D.C.로 떠나는데, 무사히 훈련을 마치고 익스플로러가 될 수 있을까? 곳곳에서 크루즈를 위협하는 세력은 엄마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을까?
나도 익스플로러가 되어 같이 훈련 받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는 생생한 묘사, 속도감, 몰입감이 그야말로 상상초월이다.
끊임없이 제시되는 암호퍼즐, 선택의 기로.
어느 것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게 없다.
과연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세상에 내놓은 SF소설이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보여준다.

이 소설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성인까지 모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과학지식이 없어도 희한하게 다 이해되는 설득력이 있다. 또한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에는 과학적 식견이 높아진 듯한 뿌듯함이 밀려온다.

많은 학생들이 이 책을 읽고 꿈꿀 수 있기를 희망한다.

2권도 있던데 빨리 구해서 읽어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 마포구 사람인데요?
다니엘 브라이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년 1월에 글쓰기 강좌에 등록했었다. 마지못해 꾸역꾸역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휴식 겸 보상의 느낌으로 신청했던 터라, 글을 써서 뭔가 이루겠다는 목표 같은 건 없었고 막연히 글쓰기를 배워볼까 싶어서였다. 수강생이 16명이었는데 나를 빼곤 다 젊은 사람들이었다. 2,30대의 멋진 사람들이 세련된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걸 보고 적잖이 주눅이 들었다. 하루는 강의시간보다 좀 일찍 도착해서 얘기를 나누다가 수강생 중 한 명이 외국에서 오래 일했고 3월엔가 또 이스라엘로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를 비롯한 몇 사람이 “오, 멋있어요.”라고 하자 그분은 “이주 노동자의 고충은 어디에나 있죠.”라던가 그 비슷한 말을 했다. 그 말조차도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아, 거기선 이방인이지, 참.’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유튜브 ‘단 앤 조엘’의 크리에이터 다니엘 브라이트가 만난 사람들과 음식에 대해 우리말로 쓴 책이다. 한국에서 살고 있기는 해도 외국인인데 우리말로 책을 쓰다니.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최근 제목만 보고 책을 선택했다가 몇 번이나 낭패를 본 나로서는, 웬만한 우리나라 사람보다 오히려 문장력이 낫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그리고 은근히 재미도 있다.
한국에서 충분히 재미있게, 희망차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유튜브 영상을 만든다는 그의 사람을 대하는 진지하고도 진솔한 태도가 마음에 울림을 준다. 수준급의 사진들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가장 많이 쓴 표현은 ‘겸손하다’라는 형용사인 것 같다. 누구 님은 참 겸손해서 좋았다, 누구 형은 겸손한 사람이다 등등. 심지어는 식당도, 책표지까지도 겸손하게 생겼단다.
나는 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남의 나라에서 생활하면서 얼마나 교만하고 무례한 사람들을 많이 겪었을까? 유튜버로 사람들을 만날 때에도 많은 거절과 냉대를 경험했을 것이다. 책 제목인 “저 마포구 사람인데요?”는 그가 들은 수많은 “Where are you from?”에 대한 재치 있는 답변이 아닐까 싶다. 소확행을 실천할 줄 아는 사람으로서 성실하고 즐겁게 생활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긴 하지만, 같은 대한민국 서울에서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 대 사람으로서 따뜻한 악수를 건네고 싶다. 언젠가 마포를 걷다가 마주친다면 한 끼 식사를 대접하고도 싶다. 은모든 작가님 북토크에서 전해 들은 마포 어느 식당의 제주도 흑돼지 두루치기에 소주 한 잔 나눴으면 좋겠다.

타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든 태어날 때부터 고향에서 살아온 사람이든 누구나 자기만의 힐링 장소와 쉼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을 찾았으면 한다. p. 61

#다니엘브라이트 #단앤조엘 #책추천 #한겨레출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