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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열다섯부터 열일곱 살까지는, 캐서린도 여주인공에 어울리는 소양을 쌓았다. 그리하여 여주인공이라면 다사다난한 인생의 우여곡절 속에서 도움이 되고 위안이 될 인용구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마땅히 읽어야만 하는 그런 책들을 모두 읽었다.

이 정도면 캐서린의 변모는 만족할 만했다. 다른 여러 면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다. 비록 소네트를 쓰지는 못했지만 읽을 수는 있었고, 피아노로 직접 작곡한 서곡을 연주하여 온 좌중을 황홀경에 빠뜨릴 가능성은 전혀 없었지만 다른 사람의 연주를 피곤한 기색 없이 듣고 앉아 있을 수는 있었다. 그녀에게 제일 부족한 부분은 그림이었다. 그림에는 전혀 취미가 없었다. 연인의 옆모습을 스케치할 실력조차 안 될 정도였다. 이 점에서는 진정한 여주인공의 자격에 한참 못 미쳤다. 하지만 당장은 초상화를 그릴 연인도 없었기 때문에, 캐서린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열일곱 살이 되도록, 진정한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감수성을 자극할 만한 멋진 청년 한 명 보지 못했고, 그저 가볍게 지나가는 말로라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찬사 한마디 듣지 못했다.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하지만 젊은 아가씨가 여주인공이 되려고 할 때면, 이웃 40가구가 심통을 부려도 막을 수 없는 법이다. 반드시 무슨 일이든 일어나서 그녀 앞에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기 마련인 것이다.

떠날 때가 가까워지면서 어머니인 몰랜드 부인의 걱정이 커져가는 건 당연했다. 이 두려운 이별로 인해 사랑하는 캐서린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수천 가지 나쁜 일에 대한 불길한 예감이 부인의 마음을 짓누르고,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마지막 하루 이틀 동안에는 눈물이 쏟아졌을 것이다. 부인의 내실에서 작별 인사를 나눌 때에는 어머니의 현명한 입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용한 충고가 나와야 마땅했다. 그런 순간에, 젊은 아가씨들을 강제로 멀리 떨어진 농가로 끌고 가는 걸 즐기는 귀족과 준남작들의 폭력을 주의하라고 경고해준다면 걱정으로 가득했던 어머니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으리라. 누군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몰랜드 부인은 귀족이나 준남작을 잘 몰랐고, 그들이 저지르는 일반적인 악행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므로 그들의 계략으로 자기 딸이 위험에 빠질 거라는 의심은 아예 하지 않았다.

(점잖은 집안의 젊은 아가씨치고 열여섯 살 전에 이름 한 번 안 바꿔본 사람이 있을까?)

사실 평범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평범한 감정에는, 소설 속 여주인공들이 언제나 처음 가족과 헤어질 때 분출하는 세련된 감수성과 섬세한 감정들보다는 차라리 이편이 더 어울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앨런 부인을 좀 더 자세히 소개하는 게 좋을 듯싶다. 그래야만 앞으로 부인의 행동이 어떤 식으로 작품에 전반적인 불행을 일으키는지, 그리하여 마지막에 이르러 부인이 경솔함 때문이든, 천박함 혹은 질투심 때문이든 간에 캐서린의 편지를 가로채거나 그녀의 평판을 망쳐놓거나 문밖으로 내쫓거나 해서, 가엾은 캐서린을 완전히 절망적인 비참함 속으로 빠뜨리는 데 어떻게 일조할는지 독자들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앨런 부인은 결혼을 할 만큼 자기를 좋아할 수 있는 남자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 이외에 다른 감정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그런 숱한 여성 부류들 중 하나였다. 그녀는 미모도, 지성도, 명예도, 예의범절도 없었다. 오로지 숙녀 같은 풍채, 대단히 조용하고 고분고분한 기질, 그리고 약간의 변덕이, 그녀가 어떻게 앨런 씨처럼 분별 있고 지적인 남자의 선택을 받았는지 설명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이런 경우에 앨런 부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따금 아주 태평하게 한마디씩 던지는 게 전부였다. "너도 춤을 춰야 하는데. 파트너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니." 부인의 젊은 말동무인 캐서린은 얼마 동안은 부인의 이런 말이 고마웠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는 말을 자꾸만 되풀이하니까 그만 질려서 고마운 마음이 싹 사라졌다.

어쨌거나 캐서린은 시선을 끌었고, 찬사도 받았다. 신사 두 명이 예쁜 아가씨라고 말하는 걸 직접 들었던 것이다. 그런 말은 응당 효과를 발휘했다. 즉시 캐서린은 아까와 달리 꽤 유쾌한 저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소박한 허영심은 충족되었다. 진정한 여주공인이라면 자신의 매력을 찬미하는 소네트를 열다섯 편쯤 받았을 때 느꼈을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캐서린은 두 젊은 신사의 짧은 칭찬에서 느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분 좋게 마차에 올랐다. 그녀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람들의 관심에 충분히 만족했다.

"제가 지금까지 파트너에게 제대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너무 태만했군요. 바스에 오신 지 얼마나 됐는지, 전에도 여기 오신 적이 있는지, 어퍼 사교장이나 극장, 음악회에는 가보셨는지, 그곳이 마음에 들었는지도 아직 묻지 않고 말이죠. 제가 무척 소홀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실 시간이 있으신지요? 괜찮으시면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당신의 대답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여야 하는데, 깜짝 놀라는 척하는 게 가장 쉽거든요. 다른 감정보다 적절하기도 하고요. 그럼 이제 계속해볼까요. 여기 처음 오셨습니까, 마담?"

"킹 씨의 소개로 매우 매력적인 젊은 남자와 춤을 추었다.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특별히 똑똑한 사람 같지는 않았지만,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 저는 당신이 이렇게 쓰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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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학흑학ㅠ 너무웃겨
제인 오스틴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건 샌디턴 같다.

이 말을 하면서 부인은 흘깃 샬럿을 쳐다보았다. 크게 감탄하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샬럿이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재빨리 덧붙였다. "그분은 조카에게 시계를 유증하지 않았어요. 유증이 아니었다고. 유언장에 들어있지않았죠. 물론 그 얘기를내게 한 적은 있어요. 조카에게 시계를 줬으면 좋겠다고 딱 한번 말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법적 효력은 없는 거니까 안 줘도되는 거였지."
"정말 대단하시네요. 훌륭하세요." 샬럿은 마지못해 감탄하는 척했다.

(샌디턴, 전자책 챕터 7 318/39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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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때 읽고 처음 읽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책으로 읽었을 땐 좋아할 구석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 책에 매력을 느끼는데 나도 느끼고 싶은 건 고전이라는 권위 때문이 아니다. 이미 알던 것의 매력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리고 싶을 뿐이다.

이 시대에 맞고 더 잘 읽히는 윌북 책으로 읽고 있다. 낭만주의적이고 자연 묘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그래서 낭만주의적 분위기, 자연 묘사에 더해 베르테르가 로테를 사랑하며 무슨 말을 하는지 살펴보는 중이다.

사실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니었어. (무도회장으로 오는길에 아가씨들이 이미 말했거든.) 그런데도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낯설게 들렸어. 부지불식간에 이미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 되어버린 로테와의 관계 속에서 그 이야기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야. 순간 나는 너무 당황해 정신이 혼미해진 나머지 그만 엉뚱한 커플 사이로 끼어들고 말았지. 그 바람에 대열이 마구뒤엉켰는데, 다행히 로테가 얼른 쫓아와 나를 잘 이끌어준 덕분에 금세 질서가 회복됐어. (전자책 46/25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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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3-06-14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윌북이 책 참 잘 만들죠~~고전은 예전에 읽을 때 말씀 그대로, ‘좋아할 구석이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베르테르도 다시 읽어야 할 고전 리스트에 올립니다~

책식동물 2023-06-14 22:55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소설을 좋아하는데 확실히 자연 묘사가 낭만주의와는 다르더라고요ㅋㅋㅋ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마침 제가 요즘 빠진 그림이 또 낭만주의st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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