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에세이 - 우리가 함께 쓴 일기와 편지
샬럿 브론테 외 지음, 김자영 외 옮김 / 미행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뭔가 엄청난 대박적 성찰이 있었으면 나도 참 좋았겠지만,

나는 그렇게 고차원적인 고라니가 아니다.





알라딘에서는 독자 북펀드를 통해 책을 출간한다. 나도 참여한 적 있다.《벨기에 에세이》도 그런 책이다.


브론테 자매를 너무, 너무!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문학과 여자 작가가 쓴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브론테 자매는 거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펀딩하고 싶었지만, 펀딩은 주로 종이책이고 미행 출판사에서는 전자책을 내 주기 때문에 펀딩하지 않고 전자책을 기다리고 있던 중...


직장 동료가 책을 빌려줘서 읽어보았다. ^-^




내 손바닥보다 조금 큰 귀여운 책이다. 편집은 신기하게도 종이에 비해 글자가 적게 들어간다. 20자 남짓 되나? 그래서 가독성이 매우 좋지는 않은 것 같다.


책은 샬롯 브론테가 앤 브론테의 죽음에 관해 쓴 시로 시작한다.

자매의 고향 하워스에서 에밀리 브론테와 앤 브론테가 함께 쓴 일기,

샬롯 브론테가 쓴 편지,

샬롯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가 벨기에의 기숙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우며 쓴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의 소설이 좋으면 작가의 작품 아닌 다른 글까지 궁금해진다. 시, 일기, 편지, 평론, 강의록 등등.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여성 작가들은 그런 게 번역이 잘 안 되어 있어서 아쉬웠다. 아마도 작품이 성별과 국적을 떠나서 너무 압도적이라 상품성이 넘쳐나서, 상대적으로 편지나 일기나 시는 조명을 못 받는 것 같다.


그리고 미행 출판사는 편집 후기까지 넣어줘서 책을 만들면서 쉽게 잊는 편집자의 존재까지 상기하게 만든다!




책을 심도 있게 읽지는 않았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하고 굵직한 흐름을 파악하지도 않았다. 물론 삶의 연속성이 있기는 하지만, 읽은 바로는 거대한 흐름 그 자체보다는 굵은 줄기에서 파생한 작은 가지들, 삶의 편린에 더 가깝다.


이렇게 밑밥을 까는 이유는... 이 책을 읽으며 멋진 리뷰를 쓰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게 아니기에, 내가 느낀 바에 충실한 리뷰를 쓸 것이기에 그렇다.ㅋㅋ


최근 알라딘 서재 이웃과 장문의 댓글을 몇 번 주고 받았는데, 그분은 에세이를 좋아한다고 하셨다. 나는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기에, 그분은 인문사회과학서를 많이 읽고 양질의 리뷰를 쓰시기에, 아직 극복하지 못한 에세이에 대한 편견이 있기에 '응?' 하고 글을 읽었는데, "그 사람이 삶을 대하는 태도와 자신이 맺는 관계를 주로 보"고, "그런 시선을 배우기 위해서 읽는다"고 하셨다. 새로운 시각. 사고의 전환...!


이 내용을 읽으며 나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는데, 나는 나를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나는 나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 않고 있다. 사건을 대할 때 내 태도를 보고 알았다. 타인에게 일어난 부당하고 슬픈 일이라면 그것이 '마치 내 일인 것처럼' 분노했다. 그런데 내게 슬픈 일이 일어났을 경우 개인적인 차원의 일이고 사회 개혁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에(님아;;;ㅋㅋㅋㅋㅋㅋㅋㅋ)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에세이 독서는 내가 느낀 인상이나 경험에 좀 더 집중하기로 했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자.


주로 샬롯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가 글을 썼고, 앤이 쓴 글은 상대적으로 적다. 세 사람의 글을 비교해보자면 이렇다.


샬롯 브론테: 지적이고 얌전한 숙녀 같다. 여성 캐릭터를 중시한다.

에밀리 브론테: 단단하고 자매 중에서는 제일 남성적인 것 같다. 이런 표현 안 좋아하지만.

앤 브론테: 잔잔하고 얌전하면서도 뼈가 있다.


데버러 러츠가 쓴 《브론테 자매 평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작년 이맘때 즈음 읽었는데, 이 책에도 내 감상과 비슷한 내용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앤 브론테의 죽음에 대하여



내게는 인생의 기쁨이 거의 없고,

죽음의 공포도 거의 없다;

이별의 시간 속에서 바라보았던

내가 죽어서라도 구하고픈 이.


조용히 사그라지는 숨을 지켜보며,

부디 한숨 한숨이 마지막이기를;

애타는 마음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사랑하는 이목구비 위로 드리우기를.


그 먹구름이, 그 적막이 나를

내 인생의 사랑과 갈라놓겠지;

그러면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야지,

그분께 온전히 뜨겁게 감사드려야지;


비록 우리가 잃어버린

삶과 희망과 영광에도;

그렇대도, 어둠에 맞서, 폭풍을 헤치며,

홀로 감내해야 할 지치는 싸움.


가족이 죽기를 바란다니, 이거 제정신이 아니네? 싶을 수도 있겠지만, 주석을 읽으면 샬럿 브론테는 폐결핵 말기였던 앤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샬럿은 앤이 하루라도 더 살기를 바랐겠지만, 그 고통을 알기 때문에 차라리 죽음이 찾아와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생각에는 이 글 첫머리에 정해둔 때가 오면―우리 즉, 나, 샬럿, 앤―모두 기쁨과 생기로 가득한 어떤 신학교의 응접실에 하하 호호 모여 앉아 한여름의 축일을 지킬 것이다. 우리는 빚도 다 갚고 수중에 상당한 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아빠와 이모, 브랜웰은 각각 우리를 보러 왔거나―보러 오는 중일 것이다―그 여름밤은 맑고 따뜻하겠지―이 황량한 풍경과는 아주 다를 거고 어쩌면 앤과 나는 정원으로 슬쩍 빠져나가 우리가 쓴 글을 잠시 훑어볼지도 모른다―나는 이런 것이든 아니면 더 좋은 것이든 현실이 되기를 바란다―


1841년이면 1818년생인 에밀리 브론테가 23살일 때의 일기다.


이 일기가 와닿았던 이유는, 자매들이 모두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학교를 세우고자 하는 꿈을 꾸던 시기에 쓰였고, 학교를 세운 뒤의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쓴 것으로 보인다.


다른 일기를 보면 샬럿, 에밀리, 앤과 브랜웰이 오십 대가 된 미래를 상상하고 가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에밀리와 앤은 서른 즈음에 병사했고, 샬럿도 삼십 대에 임신 상태에서 죽었다. 브랜웰도 오래는 못 살았다고 한다.


브론테 남매의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는 아내, 어려서 죽은 두 딸(샬롯보다 손위)과 살아서 성인이 된 남매 모두를 앞세웠다고, 데버러 러츠가 쓴《브론테 자매 평전》에서 그랬다.


자녀 중 유일하게 결혼한 게 샬럿인데, 샬럿의 남편 아서 벨 니콜스는 패트릭의 후임 목사였다. 아서는 3살 연상인 샬럿에게 구애했고 샬럿은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다가 받아들였다. 패트릭은 아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아마 신분,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함) 샬럿마저 세상을 떠난 후 둘이 의지하고 살았다. 아서는 패트릭이 죽을 때까지 보살폈고, 그가 죽고 나서 재혼했다. 패트릭과 아서 둘 다 노인이 될 때까지 장수했다.


하...!!!!!!!!!!!!!!!!!!!!!!!!!!!!!!!!

이게 뭐야!!!!!!!!!!!!!!!!!!!!!!!!!!


...그런데 한편으로는 브론테 남매가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후반 사이에 죄다 요절했다고 해서 너무 비참하게 여길 필요는 없지 않나 싶다. 짧을 뿐이지 나름 재미있게 살았다고 생각하면 위안이 된다.



꽤 오랫동안 나는 스물다섯 살을 내 존재에 있어서 어떤 획을 긋는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건 진짜 예감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그저 미신 같은 공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후자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이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 봐야 알겠지.


제가 윤석열 나이로 25세입니다.


1820년생인 앤 브론테는 1841년 당시 스물한 살이었다. 몇 년 뒤면 올 스물다섯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윤석열 나이로 저 나이인 나는... 동의했다!!! ㅋㅋㅋㅋㅋㅋㅋ


내 생각은 이랬다. 이십 대 초반과는 달리 스물다섯 정도면 그래도 좀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면 뭔가 달라지겠지, 나아지겠지, 하던 막연한 생각을 십 대 때부터 갖고 있었다. 아마도 중학생 때, 중학교 이학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살아보니까 나는 그대로고 뭔가 달라지거나 나아지리라는 믿음은 "미신 같은 공상에 불과"하더라.


너무 비관적인가 싶겠지만, 어떤 나이에 도달한다고 게임 레벨업 보상처럼 자동으로 뭔가 바뀌는 게 아니고, 내 행동과 마음가짐과 태도에 따라 달려 있다는 걸 느꼈다.


...좋지 않나? 나이와는 무관하다는 게. 내가 몇 살이든 재미있게 살 수 있다는 게? ㅋㅋㅋ



용기를 내서 화이트 부인에게 하루 휴가를 주실 수 있냐고 부탁까지 하면서 버스톨에 가서 엘런 너시를 보려고 한 게, 엘런이 나한테 마차를 보내주겠다고 했거든. 내 부탁을 들어 주시긴 했지만, 그 과정은 너무나 차가웠고 오래 걸렸어. 어쨌든 내 의견을 매우 모범적이고 놀라운 방식으로 고수했어. (...)


이 부분!!!


리드 외숙모의 임종이 임박해서 제인 에어가 에드워드 로체스터에게 가서 휴가를 달라고 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아니... 너무... 너무 제인에어스러워!!! 제인 에어라면 분명히 "의견을 매우 모범적이고 놀라운 방식으로 고수"했을 거야!!!


하고 사진을 찍었다.

영어 번역가 노지양과 홍한별이 주고 받은 편지를 모은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에서 《제인 에어》를 언급한다. 나올 수밖에 없다...!!!


읽은 지 일 년이 넘어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이번 포스팅에서 언급하는 책들이 하필...ㅋㅋㅋ) 《제인 에어》를 읽으며 예쁘지 않고, 사근사근하지 않고, 인기 있지도 않고, 책을 좋아하는, 그러니까 다른 소설에서 여주인공으로 등장할 법한 여성스러운 여자가 아니어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의지가 되었다고 한다. 아니, 그건 샬롯 브론테의 다른 소설 《빌레트》의 주인공 루시 스노 때문이었나?


그런데 제인도, 루시도 작중에서 여주인공으로 등장할 법한 예쁜 여자와 마주한다. 제인의 경우에는 로체스터의 약혼녀라는 소문이 있는 잉그램 양이고, 루시도 지네브라나 폴린이었던가? ㅎㅎ 고등학생 때 빌레트를 읽어서 기억이 잘 안 난다.


하여간 제인 에어와 루시 스노 또한 여주인공 감인 여주인공이 아닌데, 이게 작가의 모습이 캐릭터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샬롯에게서 제인을, 그리고 아마도 루시의 모습을 본다.


작가의 모습이 캐릭터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샬롯이나 에밀리나 앤, 내가 좋아하는 제인 오스틴이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육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얼추 그려볼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은 발랄하면서도 사랑스럽고 여유로운 여자일 것 같고,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온몸에 풍자적인 어조가 있을듯. ㅋㅋㅋ 전자는 작품 여성 인물들의 말투에서 짐작했고, 후자는 《롤리타》와 《프닌》의 어조로 말미암아 찍었다.



사랑하는 엘런―에밀리는 이제 더 이상 아픔이나 연약함으로 고통받지 않아도 돼. 그녀는 두 번 다시 이승에서 고통받지 않을 거야. 그녀는 짧고 굵게 싸우고는 떠나버렸어. 그녀는 화요일, 내가 너에게 편지를 썼던 바로 그날에 죽었어. 나는 그녀가 몇 주 동안은 우리와 계속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불과 몇 시간도 안 되어서 그녀는 영원한 세상으로 떠나 버렸어. 그래, 이 시간 속에도 땅 위에도 에밀리는 이제 없어. 어제 우리는 가련하고, 쇠약하고, 죽을 운명이었던 그녀의 몸을 교회 박석 밑에 조용히 묻었어. 지금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찾았어. 우리가 그러지 않을 이유는 또 뭐겠어? 그녀가 괴로워하는 걸 보는 고통은 끝났고, 고통스러운 죽음의 장면도 지나갔고, 장례도 치렀는걸. 우리는 그녀가 평화에 이르렀다는 걸 느껴. 이제 된서리와 매서운 바람으로 떨지 않아도 돼. 에밀리는 그것들을 느끼지 못 하니까. 그녀는 장래가 촉망되는 시기에 죽었어. 인생의 한창때에 가버렸어. 하지만 이건 하느님의 뜻이고, 그녀가 떠나간 곳보다 그녀가 지금 있는 그곳이 훨씬 좋을 거야.


흐아아앙!!!!!!!!!!!!!!!!!!!!!!!!!!


책 서두에 실린 샬럿의 시가 떠올랐다.


에밀리가 먼저 죽고, 이듬해에 앤이 죽었다. 에밀리 또한 폐결핵을 앓았는데, 의사의 진찰을 거부했다고 한다.


시기상으로 샬럿이 앤의 죽음을 바라본 게 나중인데, 에밀리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보면 이때부터 샬럿이 가족의 죽음에 품는 단단함을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앤의 죽음에 대한 태도도 그렇고 이 편지도 그렇고 야박하다 싶겠지만, 샬럿으로서는 이게 최선이 아니었을까 싶다.



순전히 재미만으로 어린 강아지 대여섯 마리를 죽인 어느 우아한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그렇지만 고양이는 정말이지 잔인한 짐승이에요. 죽이는 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먹잇감을 죽이기 전에 고문하죠.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 그런 비난은 가당치도 않아요." 정말 그런가? 그녀의 남편은 사냥을 아주 좋아한다. 하지만 사냥터에 여우가 몇 마리 없는 탓에 사냥감의 수를 공들여 관리하지 않는다면 사냥하는 즐거움을 자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여우의 숨통을 끊어놓을 때, 사냥개의 턱에서 여우를 낚아채 같은 고통을 두세 번이고 치르게 하면서 실컷 즐거움을 맛본 다음 비로소 죽음에 이르게 한다. 부인이야 연약한 신경을 거스르게 할 이런 잔혹한 광경은 보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부인이 자신의 아이를 온 애정을 담아 포옹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부인의 아이는 그 작고 잔인한 손가락 사이로 예쁜 나비 한 마리를 짓이긴 뒤 제 어머니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바로 그 순간 고양이 한 마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입에 반쯤 집어삼킨 쥐꼬리를 매달고 있는 고양이는 그녀의 천사 같은 아이를 그대로 베껴놓은 모습일 테니까. 만약 아이가 입맞춤에 대한 복수로 우리 두 사람을 할퀸다면 더욱더 좋을 것이다. 남자아이들은 친구들의 애정 표시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기 쉬우니, 그런 면에서 고양이와 한층 더 닮아 보일 것이다. 고양이의 배은망덕함의 또 다른 이름은 통찰력이다. 고양이는 인간이 보이는 호의의 값을 정확히 매길 줄 안다. 그렇게 행동하는 인간의 동기를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인간의 동기는 때로 선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고양이는 자신의 모든 불행과 악한 자질이 고대 인류의 조상 때문이라는 사실을 언제까지고 기억할 것이다. 낙원에서의 고양이는 결코 악하지 않으니까.


에밀리 브론테 성격 장난 아니라고 보여주는 수많은 대목 중 하나인듯.......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렇게 가볍게 말하고는 있지만, 에밀리 브론테가 언급한 부인과 아들이 얄미웠다. 어쩜 저렇게 이중적일 수가.


그리고 에밀리 브론테가 인간보다 동물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도 그런 사람이라서 동의해....... 에밀리 브론테는 고양이를 이중잣대로 부당하게 까는 내로남불 인간을 보며 환멸을 느꼈을 것 같다ㅋㅋ 사실, 그런 게 어딨어? 다 인간이 비유하고 은유하면서 그런 이미지를 씌우는 거지.




(구글에 '이 쥑쥑이'로 검색했더니 나옴)



오랜만에 브론테 자매의 글을 읽어서 좋았다.


나는 자매가 없고 남동생만 있어서ㅋㅋ 브론테 자매가 자매끼리 사이가 좋은 게 너무 신기했다. 더군다나 글을 공유한다고? 서로 독려하며 이야기와 글을 썼다고?? 난 절대 못해...


그리고 에세이를 읽으면서 브론테 자매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브론테 자매의 소설은 앤을 제외하면 고등학생 때 읽은 게 전부다. 다시 읽고 싶어졌다. 곧 시간적 여유가 나니까 찬찬히 읽고 싶다.


브론테 자매와 관련된 책은 이것저것 있는데, 이 글 본문에서 언급하지 않은 두 권이 있다.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펭귄클래식코리아에서 출판했다.


제인 에어를 영국 백인 여주인공의 시선이 아니라 크레올 혈통, 로체스터의 미친 아내 버사의 시작으로 본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 제인 에어를 이전과 같은 감상으로 읽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제인 에어 읽고 사르가소 읽으려고 하는데, 도통 시간이 안 난다. ㅎㅎ


바네사 졸탄의 신성한 제인 에어 북클럽.


제인 에어를 경전처럼 깊게 읽은 책이다. 졸탄은 지적이고, 내가 잘 못하는 텍스트에 빗대어 독자인 나 성찰하기를 잘 하는 것 같음!!


여기서 로체스터를 주목하는데, 로체스터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 남자에 대해 이렇게까지 깊이 생각할 수 있구나ㅎㅎ 싶었다.


그리고 모든 독자의 마음을 무겁게 할 버사에 관해서도 글을 쓴다. 졸탄은 제인과 로체스터, 그 둘의 관계를 열심히 생각한 나머지 버사의 존재를 좀 늦게 떠올렸고, 이 책이 끝날 때까지 졸탄의 마음 안에서 버사에 대해 결론내지 못한다.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앤 브론테의 다른 면을 볼 수 있는 《벨기에 에세이》. 이걸 읽으면 우리가 좋아하는 소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언급한 다른 책

데버러 러츠, 브론테 자매 평전

노지양, 홍한별,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

진 리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바네사 졸탄, 신성한 제인 에어 북클럽




---이하 인용---

앤 브론테의 죽음에 대하여


내게는 인생의 기쁨이 거의 없고,
죽음의 공포도 거의 없다;
이별의 시간 속에서 바라보았던
내가 죽어서라도 구하고픈 이.

조용히 사그라지는 숨을 지켜보며,
부디 한숨 한숨이 마지막이기를;
애타는 마음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사랑하는 이목구비 위로 드리우기를.

그 먹구름이, 그 적막이 나를
내 인생의 사랑과 갈라놓겠지;
그러면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야지,
그분께 온전히 뜨겁게 감사드려야지;

비록 우리가 잃어버린
삶과 희망과 영광에도;
그렇대도, 어둠에 맞서, 폭풍을 헤치며,
홀로 감내해야 할 지치는 싸움. - P5

내 생각에는 이 글 첫머리에 정해둔 때가 오면―우리 즉, 나, 샬럿, 앤―모두 기쁨과 생기로 가득한 어떤 신학교의 응접실에 하하 호호 모여 앉아 한여름의 축일을 지킬 것이다. 우리는 빚도 다 갚고 수중에 상당한 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아빠와 이모, 브랜웰은 각각 우리를 보러 왔거나―보러 오는 중일 것이다―그 여름밤은 맑고 따뜻하겠지―이 황량한 풍경과는 아주 다를 거고 어쩌면 앤과 나는 정원으로 슬쩍 빠져나가 우리가 쓴 글을 잠시 훑어볼지도 모른다―나는 이런 것이든 아니면 더 좋은 것이든 현실이 되기를 바란다― _1841년 7월 30일 에밀리의 일기, 23p - P23

꽤 오랫동안 나는 스물다섯 살을 내 존재에 있어서 어떤 획을 긋는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건 진짜 예감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그저 미신 같은 공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후자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이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 봐야 알겠지.
_1841년 7월 30일 에밀리의 일기, 23p - P23

용기를 내서 화이트 부인에게 하루 휴가를 주실 수 있냐고 부탁까지 하면서 버스톨에 가서 엘런 너시를 보려고 한 게, 엘런이 나한테 마차를 보내주겠다고 했거든. 내 부탁을 들어 주시긴 했지만, 그 과정은 너무나 차가웠고 오래 걸렸어. 어쨌든 내 의견을 매우 모범적이고 놀라운 방식으로 고수했어. (...)
_1841년 4월 2일 어퍼우드 하우스에서 샬럿이 에밀리에게 보낸 편지, 47~48p - P47

사랑하는 엘런―에밀리는 이제 더 이상 아픔이나 연약함으로 고통받지 않아도 돼. 그녀는 두 번 다시 이승에서 고통받지 않을 거야. 그녀는 짧고 굵게 싸우고는 떠나버렸어. 그녀는 화요일, 내가 너에게 편지를 썼던 바로 그날에 죽었어. 나는 그녀가 몇 주 동안은 우리와 계속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불과 몇 시간도 안 되어서 그녀는 영원한 세상으로 떠나 버렸어. 그래, 이 시간 속에도 땅 위에도 에밀리는 이제 없어. 어제 우리는 가련하고, 쇠약하고, 죽을 운명이었던 그녀의 몸을 교회 박석 밑에 조용히 묻었어. 지금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찾았어. 우리가 그러지 않을 이유는 또 뭐겠어? 그녀가 괴로워하는 걸 보는 고통은 끝났고, 고통스러운 죽음의 장면도 지나갔고, 장례도 치렀는걸. 우리는 그녀가 평화에 이르렀다는 걸 느껴. 이제 된서리와 매서운 바람으로 떨지 않아도 돼. 에밀리는 그것들을 느끼지 못 하니까. 그녀는 장래가 촉망되는 시기에 죽었 - P59

어. 인생의 한창때에 가버렸어. 하지만 이건 하느님의 뜻이고, 그녀가 떠나간 곳보다 그녀가 지금 있는 그곳이 훨씬 좋을 거야.
_1848년 12월 21일 샬럿이 엘런 너시에게 쓴 편지, 59~60p - P60

순전히 재미만으로 어린 강아지 대여섯 마리를 죽인 어느 우아한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그렇지만 고양이는 정말이지 잔인한 짐승이에요. 죽이는 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먹잇감을 죽이기 전에 고문하죠.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 그런 비난은 가당치도 않아요." 정말 그런가? 그녀의 남편은 사냥을 아주 좋아한다. 하지만 사냥터에 여우가 몇 마리 없는 탓에 사냥감의 수를 공들여 관리하지 않는다면 사냥하는 즐거움을 자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여우의 숨통을 끊어놓을 때, 사냥개의 턱에서 여우를 낚아채 같은 고통을 두세 번이고 치르게 하면서 실컷 즐거움을 맛본 다음 비로소 죽음에 이르게 한다. 부인이야 연약한 신경을 거스르게 할 이런 잔혹한 광경은 보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부인이 자신의 아이를 온 애정을 담아 포옹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부인의 아이는 그 작고 잔인한 손가락 사이로 예쁜 나비 한 마리를 짓이긴 뒤 제 어머니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바로 그 순간 고 - P71

양이 한 마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입에 반쯤 집어삼킨 쥐꼬리를 매달고 있는 고양이는 그녀의 천사 같은 아이를 그대로 베껴놓은 모습일 테니까. 만약 아이가 입맞춤에 대한 복수로 우리 두 사람을 할퀸다면 더욱더 좋을 것이다. 남자아이들은 친구들의 애정 표시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기 쉬우니, 그런 면에서 고양이와 한층 더 닮아 보일 것이다. 고양이의 배은망덕함의 또 다른 이름은 통찰력이다. 고양이는 인간이 보이는 호의의 값을 정확히 매길 줄 안다. 그렇게 행동하는 인간의 동기를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인간의 동기는 때로 선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고양이는 자신의 모든 불행과 악한 자질이 고대 인류의 조상 때문이라는 사실을 언제까지고 기억할 것이다. 낙원에서의 고양이는 결코 악하지 않으니까.

_고양이, 1842년 5월 15일 에밀리 브론테가 쓴 에세이, 71~72p - P72


댓글(3)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오 2023-09-18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헐 고라니님!!!! 윤석열나이!! 저랑 친구야!!!!!!!!!!! 반가워요!!! 어쩐지 고라니님한테는 언니의기운이 느껴지지 않더라니 동갑이었어 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어릴땐 20대 중반이면 좀 으른같을줄알았는데... 마찬가지로 아니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 중딩뇌로 고대로 나이만먹은상태

공쟝쟝 2023-09-19 01:41   좋아요 2 | URL
30대 중반도 그렇습니다

책먹는고란 2023-09-19 10:20   좋아요 1 | URL
은오웅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