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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전두환의 마지막 33년 - 그는 왜 무릎 꿇지 않았는가
정아은 지음 / 사이드웨이 / 2023년 6월
평점 :
흔한 것을 거부한다. 서너 살 많은 남자와 그만큼 어린 여자의 연애는 너무 흔하므로 거부한다. 남자가 잘살고 여자는 서민이고 이 여자를 괴롭히는 잘사는 악녀가 죗값을 치르는 스토리는 너무 흔하므로 거부한다. 사이코패스라고 몰아가며 희대의 악인, 사람도 아닌 악마 취급하는 것은 너무 흔하므로 거부한다. 대단히 새로운 것만을 원치는 않는다. 다만 사소하게 비틀린 균열을 원한다.
나에게 전두환은 이런 사람이다. 독재자다. 사과 없이 죽은 인면수심이다. 설령 진실로 북한의 지령을 받은 남한 빨갱이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어쩔 수 없이 군으로 진압했더라도, 사람을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전두환은 자국민을 그렇게 죽였다. 분명히 부정한 방법으로 쌓았을 재산을 두고 돈이 없다고 했다. 뻔뻔하다. 수치를 모르는 악인이다.
정아은은 21세기의 독자를 이끈다. 전두환이 활동했던 시기로. 그의 마음, 그가 처한 상황, 그 시기의 국내 및 국제 정세와 함께. 가독성 좋고 담담한 문장은 이입에 방해되지 않는다. 전두환이 남긴 말과 글을 분석해서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하고 이런 마음을 가졌을 거라고 서술한다. 우리는 그를 이해한다. 정아은이 전두환의 삶이라는 맥락을 제시해주었으므로.
전두환은 단순하고, 낮짝 두껍고자 애를 쓰고, 완전히 뻔뻔하지 못할 만큼 의식했지만, 자기 자신을 직시하고 반성할 만큼 의식하지 않았다. 잠도 편히 못 잤겠다. 정통성이 없는 지도자는 언제든 불안한 법이다. 그의 죄와는 별개로 전두환이라는 한 인간이 측은했다. 자기가 믿었던 사람이 자길 압박하고, 전국민이 살인자라고 손가락질하고,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 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하고 부정적으로 언급되고, 또 언급된다. 그러면서 자기를 직시하지 않았다. 속죄는 고사하고 자기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다 죽었다는 점이 불쌍하다.
전두환이 측은하고 불쌍하다고 해서 내가 여태 고수하던 노선이 바뀌지는 않는다. 뭔가 추가됐다. 가고자 하는 방향은 그대로지만, 고려할 것이 늘어났다.
전두환을 악마화하고 증오의 말을 퍼붓는 게 신군부 세력과 그 후예들을 영영 내쫓는 일에 보탬이 될까? 그런 의문이 생겼다. 강력범죄자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저 사람을 사이코패스라고, 저 사람이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선을 긋고 절대 내 이야기는 될 수 없다고 단정짓는 게 과연 최선일까? 그런 의미에서 전두환이 악마고, 희대의 악인이라고, 저 사람이 특히 악해서 그렇다고 선을 긋는 게 적절한 태도일까? 최선일까?
이런 의문을 던진다고 해서 뭐, 어디에 도움이 될 지 솔직히 모르겠다. 어렴풋이 '범죄자를 걍 다 싸패취급하면 끝나냐??'라고 생각만 하던 것을 최근의 살인사건 몇 건과 이 책을 읽으면서 수면 위로 떠올렸고, 다른 사람에게 처음 알린다. 뭐가 도움이 될 지는 진짜 모르겠다.
하지만 전과 마찬가지로 그런 애들 다 사이코고 나랑은 전혀 관계 없다고 선 긋고 내 일상을 살러 갈 수는 없다. 행적과 결과만 보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나이가 들며 더 깊이 느끼고 있다. 맥락이 중요하다. 여자를 칼로 찔러 죽였다는 행적과 결과는 같지만, 누구는 길 가다가 선별해서 죽인 거고 누구는 학대 당하다가 못 참고 죽인 것은 다르지 않나. 그렇다면 처벌 역시 달리 내려야 하지 않나.
비뚤어진 마음으로 말하자면, 나라고 전두환과 크게 다를 것 같나? 어떻게 단정 짓나? 그 '사이코패스 새끼'와 내가 뿌리부터 다르다고.
그래서 나는 전두환을 악마로 여겼던 마음을 버린다. 전두환의 선조와 동시대 사람과 후예들이 모두 물러나서 한국 현대사의 흑역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의 마음이 되고 이해하고 그를 악마화하길 관두고 나와 같은 인간으로 보되, 나와 같은 인간에게 어떤 속죄를 요구할 것인지는 앞으로도 쭉 생각할 일이다.
이 관련 책 추천받습니다. 감사합니다.
문제는 전두환이 제 원죄에 대해 전면 부정함으로써 그가 영원히 ‘공’에 해당하는 사항을 인정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너무나 큰 죄를 저질러놓고 그에 대해 일말의 사죄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정체성은 오직 하나, ‘살인자’로 귀결되어 버렸다. 그가 세상을 향해 "내가 잘한 점도 있었잖아!’"라고 외칠 때마다, 세상은 그가 저지른 극악무도한 죄를 인식했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가 더 커다란 죄를 낳고,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죄의 부피에 압도되어, 전두환이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갖고 있었을 ‘부분적인 미덕’이 완전히 가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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