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담은 사찰 밥상 - 24가지 사찰음식 이야기와 간편 레시피
이경애 글.사진 / 아름다운인연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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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씩 시골에 내려갈 때마다 본적도 없고 먹어본 적도 없는 음식들을 접할 기회가 있다. 빨리 할 수 있고 쉽게 할 수 있는 요리를 선호하는 탓에 재료들을 일일이 준비하고 뜸 들이고 불리고 오래 끓이는 등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들어 내는 음식을 만드는 동안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옛날 사람들은 귀찮지 않았을까. 하루 종일 끼니에 정성을 쏟을 수 있었으니 가능하지 않았을까에서부터 시골에서나 이러지 누가 이렇게 일일이 해서 먹을까 싶어 죽어도 이렇게까지 하며 배를 채우지는 않으리라는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 찼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음식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인스턴트 음식들이 쉽게 질리고 자꾸 새로운 것을 찾게 되는 맛이라면 시골에서 먹던 정성이 담긴 한식은 질리지도 않았고, 어릴 적 향수를 자극하기도 했고, 이제는 일부러 재료들을 사다가 집에서 만들어 먹기도 할 정도가 되었다. 가족들의 건강을 생각해서이기도 하지만 우리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김훈 작가는 '인이 박인다'라고 했는데, 인은 혓바닥이 아니라 정서 위에 찍힌 문양과도 같다고 했다. 재료를 일일이 준비하는 동안 어머님이 들려주시는 음식에 얽힌 이야기는 또 어떤가. 음식이 단순히 우리 입으로 들어가 미각만 자극하는 것만이 아니라 선인들의 지혜와 문화와 추억과 역사를 아우르는 감동을 버무리는 것이기도 하다.

 

잊혀가는 우리 사찰음식을 찾아 책으로 엮은 이경애 님의 <이야기를 담은 사찰 밥상>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끼니를 준비함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삶의 즐거움은 물론, 불편함을 감수하는 고행의 시간이기도 하고, 옛 모습을 오롯이 지키고자 하는 고집스러움이기도 하고, 이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그리운 맛을 찾는 것이기도 하다. 더불어 밥상에 음식만이 아니라 마음을 담는 것이다. 비록 소박한 밥상이지만 밥상으로 올라오기까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도시에서 먹는 그 흔한 양념과 기름 한 방울 안 들어간 음식의 맛깔이 어쩌면 그다지 깊고 단지, 단출한 밥상 앞에서 참말로 행복했다. 제자리 오롯하게 지키고 선 한 불자의 정성이 만인의 방상 앞에 행복을 담아낸다." (본문 37쪽)

 

무왁자지, 상추불뚝이전, 느티떡, 참마백꽃전 등 이제는 사찰에서도 귀하디 귀한 음식들도 있고, 어릴 적 먹을 게 흔치 않던 시절 자주 먹었던 엄마가 생각나게 하는 메밀빙떡, 뺏대기죽은 또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물어보니 이제는 귀찮아서 안 하신다고 한다. 사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 명맥을 간간이 유지하는 사찰음식들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반찬을 만들어 먹으려니 덩달아 요리법이 다양해질 수밖에 없었고, '사찰음식'이라는 그 고유성을 유지하게 된 배경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책에 소개된 소박한 사찰음식은 우리 삶도 돌아보며 수행 아닌 수행도 하게 된다. 풍족하다 못해 세계 여러 나라의 식재료까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지금 이 시대에 재료 하나 버리지 않고 반찬으로 만들어 내는 지혜를 우리 또한 배워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남기고 남은 음식을 버리고 끊임없이 소비하고 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음식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는커녕 너무 쉽게 소비하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전화만 하면 몇 분만에 음식이 배달되고 맛없으면 남기고 버리는 일들을 너무 쉽게 하고 있는 것 같다. 음식 안에 마음을 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음식의 가치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일부러 재료들을 일일이 손질하며 어렵게 밥상에 올라온다는 사실을 알 때, 음식 하나에도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담긴다는 것을 알 때 더 맛있고 건강한 밥상이 되지 않을까 깊게 생각해 보게 된다.

 

빠르게 가기보다는 느리고 천천히 가는 것이 맞다, 라고 생각하고 나서부터 많은 것들이 변했다. 과일을 고를 때도 연중 아무 때고 먹을 수 있는 과일보다는 제철을 기다리고 기다려온 과일들을 일부로 골라서 먹는다. 싸게 구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달고 맛있다. 음식도 마찬가지. 조리가 다 되어 팩에 알맞게 들어 있어 언제든 해 먹을 수 있는 조리음식보다는 일부러 재료들을 구입한다. 재료들을 손질하는 동안에는 어머님에게 들었던 조리할 때 주의해야 할 것들도 떠올려 보며 즐거워진다. 정성스레 만든 음식을 밥상에 올리고 가족들이 맛있게 먹어줄 때 '맛있어~'라는 말을 굳이 듣지 않더라도 행복하다. 음식을 통해 삶의 소소한 즐거움들을 찾고자 한다. 시골에 가면 어머님이 해 주시는 밥상만 받아봤었는데, 책에서 소개된 귀한 사찰음식도 한 번 해드리고 싶다. 이야기를 담고 마음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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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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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변할 수 있어. 그뿐 아니라 행복해질 수도 있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어떤 사람일까. 늘 마음속에 하고 싶은 것을 간직한 채 열정만큼은 남부럽지 않아 자만하다가 시도도 못 해보고 지나가는 경우도 많고 마음속에서만 맴돌다 물거품이 되어 버릴 때가 많다. 나의 인관 관계도 온도로 치면 미적지근하고 단호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아이에게는 엄마라는 이유로 간섭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남편에게는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논쟁을 피하고 속 마음을 숨길 때가 많다. 혼자 속상하고 말지 으레 단념하게 된다. 그리곤 혼자 힘들어한다. 일, 사랑, 가족 어느 하나 내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주제는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지만 고민하는 것은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관계니 존재니 하는 화두는 어쩌면 우리 인간이 짊어지고 가야 할 영원한 숙제인지도 모르겠다. 관계 속에서 허우적대고, 하고 있는 일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 늘 저울질하는 현대인들에게 지금 당장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지라고 하는 책이 있다. 해답도 간단하다. 용기만 있으면 된다고. 타인에게 미움받을 용기만 있다면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책이다.

사실 나에게 알프레드 아들러는 생소했다. 프로이트와 융과 함께 3대 심리학자로 불린다고 하는데, 그의 사상을 접하게 된 것은 이 <미움받을 용기>가 처음이다. 이 작품은 아들러의 심리학을 토대로 철학자와 젊은이의 대화를 엮은 책이다. 이 책이 전해주고자 하는 목소리는 단호하다. 인생사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고 우리가 자유롭고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 관계의 실타래를 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문제를 인과관계를 중시하는 결정론에 따를 것이 아니라 목적론으로 시각을 전환하면 우리는 주체적으로 우리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논리다. 타인이 적이라는 생각을 버릴 때 열등감도 사라지고 모든 관계를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관계에서 오는 고민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타인의 시선이 두렵고 도전을 주저한다면 우선 시도라도 해보라고 권하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 따위에 좌지우지하지 말고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면 주저하지 말라고 한다. 그 삶을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용기'이다. 아들러의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이고 개인의 심리학이다.

그의 사상이 단호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그것은 또 아닌 것 같다. 나의 문제를 늘 트라우마로 눈 돌렸던 확고한 기존 관념이 있는데, 트라우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고, 세상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되고, 나의 불행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하고, 칭찬도 하지 말고 야단도 치지 말라고 하니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나의 논리로는 절대 풀어지지 않는 것이다. 쉽게 수용하지 못하겠는 의심증을 대표하는 청년의 모습은 우리의 진짜 모습이기도 하다. 젊은 청년의 의심과 불안과 분노와 현실적 직시가 공감이 가는 이유이다. 아들러의 가르침은 가르침이고, 결국 해답은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자신의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인생의 과제를 어떻게 직시하고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고 행복한 길을 선택할 것인지 불행한 삶을 살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다.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 자꾸 질문을 던지게 되는 책임에는 틀림없다.

어린아이와 시작하는 아침은 늘 초조하다. 제때 일어나면 해야 할 일들을 스스로 해주었으면 좋겠고,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아서 해 주었으면 좋겠고, 챙겨야 할 물건들도 알아서 챙길 줄 알았으면 좋겠고, 외출할 때는 정리도 해 놓고 나갔으면 좋겠는데 늘 바람과는 다른 풍경들이 펼쳐지니 말이다. 어쩌다 화가 나서 혼을 내거나할 때면 화가 난 본질은 흐려지고 엉뚱한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매일 반복되는 그런 관계가 아이에게도 즐거울 리 없을 터. 그곳에 행복이 있을 리 없다. 아이는 아이대로 세상에 태어나 좋은 것만 있는 줄 알았더니 부모와의 관계가 뭐 이러냐~ 하며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 나도 책의 가르침 대로 아이를 나의 수평관계로 놓고 각자의 과제를 분리하려고 한다. 인정의 욕구에 목말라 하는 아이보다는 스스로의 가치에 즐거워하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아이로 키워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는 관계없습니다. 내 조언은 이래요.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하든 안 하든 상관하지 말고." (본문 243쪽)

이 책을 읽게 된 배경은 단순했다. 서점가에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왜? 그저 궁금했다.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다 읽어보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 계발서 분야에서 다른 문학작품들을 제치고 오랫동안 상위권을 유지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대충 감이라도 잡고 싶어 도서관에 노크해봤지만 아니나 다를까 인근 도서관은 전부 대출 중이었고 대기 예약자까지 만만치 않았다. 자기 계발서를 사서 읽는 편이 아니었기에 책을 직접 구입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에게는 특별한 책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특별한 책일지도 모른다. 좋은 책을 혼자만 읽고 혼자만 안다고 한들 새로운 세상은 열리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새로운 변화에 동참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고 함께 변화해 나간다면 우리 인간관계도 훨씬 수월해지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고민들을 하고 있는 걸로 안다. 많이 가졌든 가지지 못했든 누구나 저마다의 고민도 있는 걸로 안다. 이제 진정한 자유와 행복한 삶도 서로 공유해야 할 차례다. 인간은 변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도 있다는 마법과도 같은 진리에 함께 다가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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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병 - 가장 가깝지만 가장 이해하기 힘든… 우리 시대의 가족을 다시 생각하다
시모주 아키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살림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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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희생이라는 단어가 생각난다. 자라면서 부모를 보면서 느꼈던 것도 당신들의 삶은 포기하면서도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보며 희생을 배웠고, 형제자매 간에도 누구를 위해 누구는 희생한다는 것은 너무나 흔했다. 그래서인지 결혼 후 나 또한 알게 모르게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이 양육을 위해서 일찌감치 꿈을 포기했고, 가족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가족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며 안위하기도 한다. 늘 당연하다고 여기던 것에 대해 새삼 '가족'이란 대체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질 리 없었다.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가족 모두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면 포기나 희생쯤 당연한 거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개인의 욕망은 꼭꼭 숨겨둔 채 가족의 일원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의무들을 순차적으로 해나갈 뿐이다. 언젠가 가족 간의 갈등이 생기면 폭발할지도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오늘도 살고 있다.

그래서 시모주 아키코의 <가족이라는 병>은 조금은 낯선 화두였는지도 모르겠다. 가족 간의 일은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이지, 까발리고 비판하고 날카롭게 바라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고정관념에 기인했던 것 같다. 존속범죄라도 일어나면 가해자는 공공의 적이 되어 모든 화살을 다 맞아도 아무렇지 않은 것이 우리 사회의 당연한 모습이었다. 때문에 왜 가족이 병이지, 하고 기존 생각의 틀을 원점으로 돌리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것 같다. 가족은 사회를 형성하는 최소한의 단위라는 개념에서 비추어 본다면 가족이 흔들리면 그 사회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패륜을 저지르는 존속범죄가 늘고 가족의 해체가 만연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지 묻게 된다. 가족이 최소 단위이기 이전에 한 개인의 삶을 기본으로 하는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한 개인의 삶이 중심이 될 때 가족의 형태는 반드시 혈연관계여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가족이란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소통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혈연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의 붕괴가 사회문제의 중심이 된 가운데 진정한 의미의 가족에 대한 논의는 현대 사회에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태어나는 순간 혈연으로 맺어지는 가족이라는 사회적 관계망 안에 놓이는 수동적인 삶에서 응당 존중받아야 하는 소중한 개인의 삶으로서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도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업이 없다는 이유로 부모 밑에서 부모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여전히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는 현실을 떠올리면 지금 부모나 자식들의 삶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언제까지나 부모 그늘에 머무를 수 없다. 함께 함으로써 서로의 삶을 피폐하게 하고 상처를 줄 뿐이다.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삶, 사회적 동물이기 이전에 개인으로서의 독립적인 삶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가족 구성원 개개인의 삶을 생의 출발선 상에 놓고 각자의 삶을 책임지고 살아갈 때 나의 삶이 보이고 가족의 삶이 비로소 보이게 된다. 마음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가족은 서로에게 짐이 되고 상처가 될 뿐이다.
"한쪽이 병을 앓으면, 다른 한쪽이 보살피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무슨 일이 생기면 상대를 배려하고 돕는 것이 가족이다. 진정한 가족은 핏줄로 이어진 가족을 뛰어넘는 곳에 존재한다." (본문 174쪽) ​
여전히 가족 하면 부양의 이미지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저자가 말하는 병으로서의 '가족'은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을 부양해야만 했던 사회도 변했고, 각자의 가치관도 달라진 세상에 여전히 우리는 가족 부양 의무라는 잣대로 가족을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사회를 돌아봐야 한다. 가족이 반드시 혈연관계로 이루어져야 할까. 결혼과 동시에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은 어느샌가 전화로 안부를 묻고 소식이 없으면 없는 대로 잘 살고 있겠구나 싶다. 그 가족의 빈자리를 친구나 이웃이나 공동체에서 만난 사람들과 정을 나누고 교감하며 채워가고 있다. 알게 모르게 우리 또한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결혼이 상식적이던 사회는 변해 어느덧 '나 홀로 가족'도 늘어 새로운 가족의 형태는 현재진행형이다. 앞으로 많은 변화가 감지되는 이 시대에 진정한 가족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찾아야 할 때이다.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인가 하고. 솔직히 말해 내가 생각하는 가족은 이 책의 저자와 생각을 같이 한다. 차이가 있다면 저자는 생각한 대로 실천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고 나는 가슴에만 품고 어쩌지도 못하고 문제가 많은 가족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 책의 시작은 가족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끝은 가족의 해체가 아니다. 가족이 굴레가 되어버렸다고 해서 가족을 당장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어쩌지도 못하는 가족의 굴레에서 각자 벗어날 수 있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함을 어필하는 것이다. 자신을 알고 가족 구성원에 대해 알고 이해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 인생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행복한 방법을 찾아 스스로 설계할 선택권은 가지고 있다. 그 선택권을 제대로 발휘해야 한다고. 그 책임은 가족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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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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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가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그에 관한 관련 기사를 보고 알았다. <무의미의 축제>는 2000년에 나온 <향수>이후 14년 만에 출간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지만 어쩌면 생애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여 더더욱 주목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관심 없을 테고, 그러면 그런대로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재미있게도 이 책은 삶의 무의미, 무의미의 가치, 농담과 거짓말에 대해 전하는 재미있는 책이다. 어쨌거나 책의 의미를 유추해 가는 것 또한 무의미하겠지만 그 무의미함의 가치를 찾아낼 수 있다면 축제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첫 장에 배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 중 하나인 알랭이 배꼽에 대해 생각하는데, 처음엔 무심코 읽다가 책을 읽다 보면 배꼽이 이 책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상징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여성들의 성적 매력으로 대표되던 가슴 엉덩이 허벅지가 아닌 달리 특별할 것도 없는 배꼽!! 알랭은 배꼽을 보며 성적 매력을 느낀다. 그것은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무의미함의 재발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존재의 본질일지도 모르고. 알랭의 어릴 적 기억 속 어머니가 배꼽을 꾹 누르던 기억으로부터 어머니와 자신을 이어주던 유일한 증표가 되었던 배꼽은 그만큼 상징적이다.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본문 147쪽)

알랭, 라몽, 샤를, 칼리방 네 남자들이 보고 느끼고 살아가는 내용을 담은 150쪽이 안되는 짧은 이야기지만 그 안에 담긴 저자의 '의미 있는 시선'이 여러 번 책을 읽어보게 한다. 의미를 찾아기며 재차 읽어본들 무의미하겠지만 삶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들과 마주하며 삶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걸로도 좋지 않을까 싶다.

우습지만 우리는 무슨 권리에 근거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거. 그러니 세상에 존재하는 보잘 것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짧지만 굵은 메시지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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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위한 미움받을 용기 - 아들러 심리학의 성장 에너지
기시미 이치로 지음, 김현정 옮김 / 스타북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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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있다'라는 말을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왠지 불안하고 조급해질 때 이 말을 떠올리면 괜스레 느긋해지고 여유로워짐을 느끼곤 합니다. 뒤늦게 했던 공부도 다 때가 있음을 체험하게 해 주었고 늦은 나이에 천생연분을 만나다 보니 결혼도 때가 있음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요즘은 커가는 아이를 통해 느낍니다. 남들 다 걷는데 걷지 못할 때나, 남들 말하기 시작할 때 엄마 소리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를 보며 때가 오겠지, 기다렸고 지금도 아이는 다른 아이들의 페이스와 다른 속도로 그때를 보여주기에 느긋하게 참고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육아가 힘든 건 엄마의 마음이 너무 앞서가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아이는 아직 때가 아닌데 엄마 혼자 저만치 가 있으니 육아가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요. 아이의 발육 정도나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거나 진로 선택에 있어서도 너무나 높은 기준을 세우고 부모가 미리 앞서가 있어 그 틈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나오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아이와 보조를 맞추고 나란히 걷되 절대 앞서지는 말자고 다짐하게 됩니다. 최근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를 읽으며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대해 짧게 언급이 되어 좀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여 <엄마를 위한 미움받을 용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아들러의 심리학에서는 관계에 주목합니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에 따라 육아에 대한 관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핵심은 아이를 대등한 인격으로 보고 존경하고 전폭적인 신뢰를 통해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사고하고 행동하는 아이로 성장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엄마의 과제와 아이의 과제는 분리되어야 합니다. 아이가 소유물이 아니기에 혼을 낸다거나 칭찬하는 전통적인 육아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들이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용기 부여를 하고 자립하는데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왜 기존의 육아 방식을 거부할까요? 전통적 육아 방식은 아이를 수직관계에 놓고 나쁜 행동에는 혼을 내거나 잘한 행동에는 칭찬을 하는 것인데요, 아들러의 심리학에 따르면 혼도 내지 말고 칭찬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혼을 내게 됨으로써 아이들은 주목받고 싶어 해 나쁜 행동을 계속하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혼을 내면 당장은 나쁜 행동이 고쳐진 것 같지만 부모에게 혹은 학교에서 주목받고 싶으면 언제든 똑같은 행동이 반복된다는 식입니다. 혼내기보다는 평소 용기 부여를 통해 스스로 공헌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더불어 지나친 칭찬도 육아에 좋은 것 같지 않습니다. 칭찬을 해 주다 보면 아이들은 어떤 행동을 함에 있어 자발적인 동기 부여가 아닌 보여주기식이 되거나, 잘했다는 평가를 받기 위한 행동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럴 경우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고 싶은 욕구도 사라질 것이고 힘든 것은 피하려고 하는 아이로 자랄 수 있겠지요.
문제행동을 바라보는 시각도 조금은 다릅니다. 관계에서 풀어야 한다고 하지요. 예를 들어 학교에서의 문제행동은 학교에서 교사나 학생들과의 문제라고 보지요. 마찬가지로 집에서의 문제 행동은 가족 간의 어떤 문제가 있어서 나타난다고 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요. 학교에서 문제아는 가정 내 불화에서 비롯된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부모와의 애착이 덜 되어 그렇다고도 하고, 가정이 화목하지 않으면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는 식이지요. 집에서 잘 지내던 아이가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먼저 의심을 하게 되죠. 저자는 그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애착이 덜 되어 있다고 해서 가정이 화목하지 않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라고 해서 다 비뚤어지고 문제아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과거에서 원인을 찾으면 문제행동을 개선할 수 없다고 해요. 인간관계의 틀 안에서 아이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이 해답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이 행동이 학교에서 교사를 상대역으로 행해졌음을 이해한다면 가령 아이가 가정에서 애정 부족이라고 해도, 학교에서 행동과는 적어도 직접적 인과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게 논리적입니다. 그리고 인간관계의 틀 안에서 아이 행동을 봄으로써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알 수 있습니다." (본문 67쪽)
전통적인 육아 방식에 대해 아들러의 심리학이 설명하는 바는 솔깃하고 납득이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의 행동을 관계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의문입니다. 가정 내 육아 방식이나 환경이 인간관계에 혹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할 수 있을까요. 가정불화나 가정 내 폭력의 트라우마를 가진 아이들이 다 잘못되는 건 아니지만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친다는 사례도 보고된 바 있습니다. 부모와의 애착관계 또한 영향이 아예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 얼마나 받아들여질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숙제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라는 말도 합니다. 한 인간으로 자라는 데 매번 정답이 있다면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엄마를 위한 미움받을 용기>를 이해하는 것도 나에게는 숙제인 것 같습니다.
일본의 유치원생들 원복을 본 적이 있는데, 추운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습니다. 1년 내내 반소매 반바지를 입는다고 보면 되는데요. 우리의 시선으로 보면 참 의아할 때가 많아요. 어린 꼬마들이 허벅지를 퍼렇게 내놓고 다니는 것을 볼 때마다 안쓰러웠습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어릴 때부터 강하게 키우기 위해 추운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힌다고 해요. 그렇게 하면서까지 유치원생때부터 혹독함을 경험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왠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육아의 법칙이 있는 것처럼 아이들을 대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 않나 싶어요. 저자도 유치원생 아들의 자립을 시킨다며 얇은 옷은 춥다는 사실을 스스로 체험하기 위해 1년 내내 반바지를 입혔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시대적, 문화적인 견해차는 육아에도 분명 존재할 거라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아이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부모라면 이럴 땐 이렇게 하고 저럴 땐 저래야 한다는 복잡한 원칙이 아니라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에게 바라는 기대나 부모의 욕망이 아니라 아이가 원하고 바라는 것에 대해 먼저 들어줄 수 있어야겠지요. 좋은 관계는 한쪽의 잣대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아이들은 충분히 스스로 사고하고 성장하고 자라갈 것입니다. 어딘지 부족한 엄마, 어딘지 빈틈이 많은 아이, 그게 더 자연스러워 보이고 인간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가끔은 큰소리로 혼도 내고, 깜짝 놀랄만한 일에는 칭찬도 하면서 말이지요. 사람은 세상 ' 속'에 있지만, '중심'은 아닌 것처럼 부족한 부모의 모습을 하고 살아간다고 해도 충분히 좋지 않을까 묻고 싶습니다. 그것이 세상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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