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보면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의 논리를 반박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책 내용 중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카이레폰이 델포이에 가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있는가?"라고 물어보죠. 그 대답은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는 답변을 듣게 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소크라테스는 각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가 반증을 시도하죠. 가장 먼저 찾아간 것은 정치가였는데, 명성은 높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함을 알고 실망합니다. 두번째로 시인을 찾아갑니다. 시인은 지혜가 있어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소질과 영감에 의해 시를 쓴다는 것을 알고 역시 자신보다 나음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장인(기술자)를 찾아갔는데, 지혜는 있지만 자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결국 자신의 무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롭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이 이야기로 시집의 서평을 꺼낸 것은 고대 그리스에는 그만큼 '시인'에 대한 대우가 남달랐다는 것이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강세환 시인의 <시가 되는 순간>은 시인의 9번째 시집이라고 합니다. 시인의 많은 시들을 음미하며 느낀 것은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더불어 시인이 시를 사랑하며 고뇌하는 마음이 듬뿍 느껴졌습니다. 시를 통해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세상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저에게 시는 한때는 친한 친구와 시집을 읽으며 동경했던 분야요, 청소년기에는 어려운 작품 해석에 불과한 정도였죠. 성인이 되고 나서는 지하철 곳곳에 있는 시들을 읽으며 지하철을 기다리는 정도가 되겠네요. 왜 시인들을 쉽게 쓰면 될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비유에 빗대어 표현하는지, 그 감수성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강세환님의 시들은 참 잘 읽힙니다. 시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시인의 생각이 직설적으로 전달되는 것들도 많습니다. '이렇게 표현해도 시가 되는구나'는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래도 시인만의 감수성과 고유성은 잘 묻어납니다. 시인이 어떤 사람이겠구나,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겠구나, 짐작되는 시들도 많았습니다.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 본 느낌이랄까요?
눈길이 많이 갔던 시 몇 편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내가 쓴 시를 읽고
굵게 밑줄까지 긋고 그랬을까
그 시의 행간에 밑줄 그을 때
나의 시는 기억하고 있었을까
내가 쓴 시 첫 행과 마지막 행은
내 힘만으로 쓴 것도 아니다
첫 행과 마지막 행은
그 시의 운명이거나 어긋남
- 시의 운명?
늦은 밤 시 앞에 앉아 있을 때
이게 밤인지 대낮인지
하루가 가고 있는지 하루가 오고 있는지
죽은 시인이 다시 되살아났는지
어디서 시인들이 모여 시를 낭독하는지
저 빗줄기도 귀 밝은 시 한 줄 되는
이것도 그 시의 운명이거나 헷갈림
- 귀 밝은 시?
매일매일 밤은 아침이 되고 아침은 저녁이 되는데
첫 행과 마지막 행은 또 얼마나 멀리 있는지
시인의 마음은 또 얼마나 멀리 있어야 하는지
그 가슴을 맨손바닥으로 쓸어내릴 수도 없고
가슴 쓸어내리다 시까지 쓸어내리면?
다시 시를 가슴에 꼭 껴안고 한없이 깊어지기를!
- 시가 깊어져?
그러다 시의 길도 시인의 길도 끝이 없다
- 시도 힘들어요?
단상 : 시인들에게 궁금한 점이 있어요. 시상은 어떻게 발견하는지, 영감이 떠오르면 시가 바로 써지는지, 아니면 고민고민하며 한 행 한 행을 써가는지 등 시인들의 머릿 속, 마음 속이 궁금해지네요. 내가 바라보는 세상과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은 왠지 다를 것만 같은 느낌이거든요. 나이를 먹어가며 소중한 것들 중 놓친 것을 없는지, 주의 깊에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어요. 죽음은 너무나 멀게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내 삶이 정말 유한하다는 것이 가슴 깊게 느껴지거든요. 그렇다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이 세상을 더 많이 아름답게 보고 싶어졌어요. 그런 면에서 시인의 렌즈가 내게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우울의 유혹
나는 잠시 우울을 먹고 살 것이다
서운할 것도 없다
우울도 시가 되고
힘이 될 것이다
좋은 것만 먹고 살 수 없듯이
우울도 약이 된다
저녁 산책길 밖에는
딱히 갈 곳도 없다
어디를 향해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향해
나를 위해
조용히 나의 길을 가는 것도 중요하다
오늘도 단 한 번 웃을 일이 없었다
시를 써도 혼자 읽을 때가 더 많다
시를 쓰는 것이
결코 웃고 울고 하는 일이 아니다
웃고 우는 일을
시가 해야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우울할 때 나를 지켜보는 것도 시가 된다.
나를
화장실 거울 앞에 세워 놓고 바라보는 것도
시가 된다
우울할 때 나를 다독이는 것도 시가 된다
우울하다고 낙실할 것도 아니다
- 전망은 없다 절망도 없다
단상: '우울할 때 나를 지켜보는 것도 시가 된다' 이 문구가 인상적이었어요. 요즘 명상을 하며 나를 들여다보는 연습을 많이 하고 있거든요. 참 새롭더라고요. 나의 마음을 자주 들여다 보고, 나의 몸에도 따듯한 관심을 주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