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를 영광학원에 취직시킨 익명의 독지가는 다른 사람 아닌 한수철이었다.

그는 동생을 모르는 척하는데 양심의 가책은커녕 난만한 꽃밭을 병충해로부터 지켜야 하는 원정으로서의 사명감마저 느꼈다.
악이란 생각보다는 돌발적인 격정이 아니라 용의주도하고 점진적인 현상이었다. 그리고 악의 한결같은 꿈은 위선이었다.
그는 그의 누이동생이 수인임을 망각하고 오목이로 행세하고 있음을 알고부터 더욱 열심히 수인이란 이름으로 동생을 찾는 일을 계속했다. 그의 이런 애타는 마음을 뭇사람에게 나타내서 남의 심금까지 울렸다.
그건 마치 일곱 살 적의 수지가 동생을 일부러 피난민 속에서 놓쳐버리고 나서 수인이란 이름으로 목메어 찾아 헤매고, 다시 식구들 앞에서 동생을 잃은 자신을 자책해서 까무러치도록 운 것과도 닮은 간교함이었다.
한 사람을 놓고 각각 두 개의 이름으로 서로 찾는 일은 마치 평행선처럼 아무리 줄기차게 계속돼도 서로 맞닿을 리가 없었다.

"수인인 살았을까?"
수지가 지나가는 말처럼 무심히 말했지만 그 분위기에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너도 그 애 생각이 나나 보구나?"
"그럼 오빠도?"
"그 애도 시집갈 나이가 됐으련만."
"살기나 했을까요?"
"글쎄다. 널 시집보내려니 그 애를 찾아 돌보지 못한 게 더욱 걸리는구나."
"오빤 최선을 다했어요. 그건 세상이 다 아는 일예요."
"그 애도 먼 훗날이라도 좋으니 그걸 알아줬으면 좋으련만……."
"오빠!"
"잘 살아야 한다. 그의 몫까지."
위선의 교감은 감미롭고 짜릿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道가 없는 나라에 ‘도학導學’을 세우려고 한 것이 어째서 잘못인가? 조선 사람들은 자신의 ‘도’와 ‘학’을 가지지 않고, 언제나 남의 나라가 만든 ‘도’와 ‘학’을 추종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있다. 외국에서 들어온 ‘유도’와 ‘불도’와 ‘선도’, 또는 ‘서학西學’에 대해선 좋다고 하고, 우리가 우리나라에서 창도한 동학만을 배척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동학이 우리나라의 소산이라서 비소卑小하다는 것인가? ‘인내천人乃天’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격하다는 것인가? 동학은 틀려먹은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했다. 포악한 관리들을 없애고 그릇된 정사를 바로잡으려는 것이 어째서 잘못인가? 조상의 뼈다귀를 빙자하여 비행을 거듭하고 백성의 고혈을 짜 먹는 놈들을 응징하는 것이 어째서 나쁜가? 사람이 사람을 팔아먹고 국토를 농락하여 사복을 채우는 놈을 치는 것이 어째서 나쁜 일인가? 너희들은 왜적을 이용하여 나라에 해독을 끼치는 그야말로 죄인들이다. 죄인들이 거꾸로 나를 죄인이라고 해?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다."

결국 재판관은 직권에 의해 독단적인 판결을 내렸는데,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들은 1895년 3월 17일, 한성 감옥에서 교수형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전봉준, 그때의 나이 41세.
전봉준의 사형을 집행한 당시의 집행총순執行總巡인 강모姜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전봉준이 압송되어 왔을 때부터 처형된 그날까지 그의 행동을 시종 지켜보았다. 그는 풍문으로 듣던 이상으로 걸출한 인물이었다. 우선 용모부터가 만인의 으뜸이었다. 맑게 빼어난 얼굴, 정채情彩 있는 미목眉目을 가지고 있었다. 엄한 기백과 강건한 의지로써 일세를 경동할 수 있는 대위인, 대영걸大英傑이었다. 정히 그는 평지에 홀연히 높이 솟아 민중을 움직인 자인 만큼, 죽음에 직면해서도 의지를 굴하지 않고 태연자약했다."


"위대한 영웅이 가셨다. 동학 접주 전봉준 선생은 분명 영웅이시다. 민심의 동향을 간파하여, 그 민심으로써 나라를 바로 세우려 한 포부도 컸거니와, 호남 각지에서 집강소를 운영한 그 경륜도 탁월했다. 뿐만 아니라, 동학군이라고 군軍을 들먹이지만, 농민들의 집단으로 오합지졸이 아니었던가. 그 오합지졸을 관군과 왜적의 연합군에 당당히 대적할 만큼 조직하고 훈련했으니, 과연 영특한 인재가 아닌가. 유방이 못 한 짓이고, 항우 역시 못 한 짓이다. 보다도, 각기 견식을 자랑하고 자호하여 대장大將을 일컫는 동학 접주들의 다사제제多士濟濟를, 그만큼 통어하여 인화人和를 이루고 심복케 하였으니, 과연 장재將才이며 왕재王才가 아니겠는가. 내 그가 직접 지었다는 격문과 방문을 읽었거니와, 그 식견과 문장은 실로 경탄할 만하다. 장재와 왕재를 넘어 천재天才라고 할 만하다.

나는, 최근에 해연(海淵. 박종태의 호)이 입수한, 전봉준 선생이 13세 때 지은 ‘백구시白鷗詩’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그걸 이 자리에서 피로하겠다.

 

자재사향득의유自在沙鄕得意遊

설상수각독청추雪翔瘦脚獨淸秋

소소한우래시몽蕭蕭寒雨來時夢

왕왕어인거후구往往漁人去後邱

허다수석비생면許多水石非生面

열기풍상이백두閱幾風霜已白頭

음탁수번무과분飮啄雖煩無過分

강호어족막심수江湖魚族莫深愁(‘스스로 하얀 밭에 놀매 그 뜻이 한가롭고/ 흰 날개, 가는 다리는 홀로이 청추(淸秋)롭다/ 소소한 찬비 내릴 때면 꿈속에 잠기고/ 고기잡이 돌아간 후면 언덕에 오른다/ 허다한 수석은 처음 보는 것이 아닌데/ 얼마나 풍상을 겪었던가/ 머리는 이미 희게 되었도다/ 비록 번거로이 마시고 쪼으나 분수를 알지니/ 강호의 물고기들이여, 깊이 근심치 말지어다.’)

이것을 어찌 13세 소년의 시라고 하겠는가? 백구를 읊어 의중意中을 나타내니 탄복할 지경이다.

이러한 대재大才, 이러한 대기大器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니, 나라의 불운이고 우리 조선인 전체의 불운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돈녕부사 김병시가 임금 앞에서 말했다.

"생각하건대, 동학군은 모두가 양민으로서, 처음에 열읍 수령의 학대로 곤고를 견디지 못하고 그 원통함을 호소하고자 모였던바, 그 관장官長된 자가 개유(開諭: 사리를 알아듣도록 잘 타이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이들을 동학비도라 단정하고 무력으로써 위협하므로, 저들이 황겁하여 몸을 보호하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취당창걸(무리를 모아 일어섬.)함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에 이들을 난역亂逆으로 몰고, 경병京兵을 발하기에 이르렀던바, 이것이 이미 경솔한 거조였으며, 더욱이 청국에 구원을 청한 것은 크게 실수한 조처였던 것이다. 설사 저들 무리가 모두 불궤不軌(당연히 지켜야 할 법이나 도리에 어긋남.)한 마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들은 한구석의 토비土匪에 지나지 않은데, 우리가 처치할 도리가 없어서 청국에 청병請兵까지 한 것이다. 이제 청병으로 하여금 기천 기만 명을 소멸시키게 한다면, 당장 일시의 쾌快는 있겠지만, 역시 불인不忍의 정政에 관계되는 것이다. 가령, 1인이 죄를 짓고 처벌에 이르러도 또한 애긍하여 즐겁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타국의 군사를 청하여다 우리나라 백성을 진살(盡殺: 모두 다 죽임.)하려고 하니,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일본군이 왔다고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군사 기천 명을 데리고 졸지에 도성에 들어오기를 무인지경과 같이 하되, 조정에선 그래도 한마디 말도 없으니, 이것이 어떻게 된 나라의 체면인가. 인천항에서 하륙할 때에 마땅히 금지하여야 할 것이되, 형세가 대적할 수 없어서 경성에 이르렀으면, 아울러 강경히 항의하여 힐책하여야 할 것인데, 그러한 일이 없으니 어찌 이와 같은 나라가 있겠는가."

‘어찌 이와 같은 나라가 있겠는가’ 하는 탄식은 김병시만의 것이 아니었다. 일본의 대군이 서울 거리를 행진하는 것을 본 백성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이 탄식을 되뇌고 있었다.

— 어찌 이와 같은 나라가 있겠는가.

망국亡國의 징조가 바로 눈앞에 전개되어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본의 어느 학자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했다.
  "조선을 개혁하려는 핵核과 같은 것이 동학에 있었다. 그런데 혁신파인 김옥균은 동학에 관심을 표명한 흔적이 없다. 결국 그는 사대부士大夫여서, 동학이 가진 서민적인 것은 생리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을 기사회생시키기 위해서라면, 김옥균은 이홍장을 만나러 갈 것이 아니라, 동학의 지도자를 만나러 갔어야 했다."

— 항쟁! 그밖에 도리가 없다.

결코 과격파의 선동이 아니었다. 자기의 체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낀 일에 대한 반발이었다. 관官이 하는 짓은 날을 좇아 심해만 갔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다. 죽어도 그만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된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다.

이미 들먹인 민란은 결코 동학교도들이 직접 일으킨 게 아니었다. 다만, 직소장을 낼 때 장두로 뽑힌 사람이 동학교도였을 뿐이다. 그러니 그들은 동학교도로서 직소한 것이 아니다. 주민의 대표로 뽑혔을 뿐이다.

허다한 예로서, 장두가 되기만 하면 체포되어 곤장을 맞게 되었다. 누구나 그 역할을 싫어했다. 싫어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동학교도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동학교도는 일반 사람보다 많은 탄압을 받았다. 그래도 그 신념을 버리지 않았으니 강한 성격이다. 동학에 마음을 둔다는 것은, 그만큼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된다. 동학교도는 신앙심만이 아니라 높은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백성들에 의해 뽑힌 이상 책임을 다하려고 했다. 자연히 민란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민란이 군 단위였던 것은 불평의 원인이 각각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뿌리는 하나이다. 이것을 발견한 것도 동학교도이다. 동학교도로서의 자각이 익어갔다. 그렇게 하여 동학란이 터지고 말았다.

동학이 성공하지 못할 까닭을 설명했다. 동학이 성공하려면, 그 세勢가 요원의 불길처럼 영남, 호서, 관동 등 각처로 퍼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점이 첫째 이유였고, 조정이 청국에 출병을 요청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일본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란 점이 둘째 이유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유림儒林이 동학을 이단시異端視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학의 씨가 뿌려진 것이 수십 년 되는데, 아직도 광범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은, 그것이 이단시되었기 때문이다. 고균(김옥균)은 위로부터 혁명하여 아래 민심의 지지를 얻지 못해 실패했고, 동학은 아래로부터 혁명하여 상층부의 지지를 얻지 못해 실패한다. 슬픈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반은 한 사람 빠지지 않고 다 죽어야 하오.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친청이니 친일이니 해선 씨알머리 없는 상소 따위나 올리고, 서원의 이익을 위해 유림이라 해서 일어나기나 하고, 남의 가색稼穡(곡식 농사.)에 업혀 사는 것도 뭣한데 그들의 등을 쳐 먹으려는 썩은 인간들을 살려 뭣 하겠소. 우선 나부터 말요. 한 놈 남김없이 양반이 없어지는 날, 백성들이 이 나라를 차지하고 친청을 하건 친일을 하건 그때 뭔가 길이 트일 것이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