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가 없는 나라에 ‘도학導學’을 세우려고 한 것이 어째서 잘못인가? 조선 사람들은 자신의 ‘도’와 ‘학’을 가지지 않고, 언제나 남의 나라가 만든 ‘도’와 ‘학’을 추종하는 것을 옳다고 하고 있다. 외국에서 들어온 ‘유도’와 ‘불도’와 ‘선도’, 또는 ‘서학西學’에 대해선 좋다고 하고, 우리가 우리나라에서 창도한 동학만을 배척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동학이 우리나라의 소산이라서 비소卑小하다는 것인가? ‘인내천人乃天’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격하다는 것인가? 동학은 틀려먹은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했다. 포악한 관리들을 없애고 그릇된 정사를 바로잡으려는 것이 어째서 잘못인가? 조상의 뼈다귀를 빙자하여 비행을 거듭하고 백성의 고혈을 짜 먹는 놈들을 응징하는 것이 어째서 나쁜가? 사람이 사람을 팔아먹고 국토를 농락하여 사복을 채우는 놈을 치는 것이 어째서 나쁜 일인가? 너희들은 왜적을 이용하여 나라에 해독을 끼치는 그야말로 죄인들이다. 죄인들이 거꾸로 나를 죄인이라고 해? 천부당만부당한 소리다."
결국 재판관은 직권에 의해 독단적인 판결을 내렸는데,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들은 1895년 3월 17일, 한성 감옥에서 교수형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전봉준, 그때의 나이 41세. 전봉준의 사형을 집행한 당시의 집행총순執行總巡인 강모姜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전봉준이 압송되어 왔을 때부터 처형된 그날까지 그의 행동을 시종 지켜보았다. 그는 풍문으로 듣던 이상으로 걸출한 인물이었다. 우선 용모부터가 만인의 으뜸이었다. 맑게 빼어난 얼굴, 정채情彩 있는 미목眉目을 가지고 있었다. 엄한 기백과 강건한 의지로써 일세를 경동할 수 있는 대위인, 대영걸大英傑이었다. 정히 그는 평지에 홀연히 높이 솟아 민중을 움직인 자인 만큼, 죽음에 직면해서도 의지를 굴하지 않고 태연자약했다."
"위대한 영웅이 가셨다. 동학 접주 전봉준 선생은 분명 영웅이시다. 민심의 동향을 간파하여, 그 민심으로써 나라를 바로 세우려 한 포부도 컸거니와, 호남 각지에서 집강소를 운영한 그 경륜도 탁월했다. 뿐만 아니라, 동학군이라고 군軍을 들먹이지만, 농민들의 집단으로 오합지졸이 아니었던가. 그 오합지졸을 관군과 왜적의 연합군에 당당히 대적할 만큼 조직하고 훈련했으니, 과연 영특한 인재가 아닌가. 유방이 못 한 짓이고, 항우 역시 못 한 짓이다. 보다도, 각기 견식을 자랑하고 자호하여 대장大將을 일컫는 동학 접주들의 다사제제多士濟濟를, 그만큼 통어하여 인화人和를 이루고 심복케 하였으니, 과연 장재將才이며 왕재王才가 아니겠는가. 내 그가 직접 지었다는 격문과 방문을 읽었거니와, 그 식견과 문장은 실로 경탄할 만하다. 장재와 왕재를 넘어 천재天才라고 할 만하다.
나는, 최근에 해연(海淵. 박종태의 호)이 입수한, 전봉준 선생이 13세 때 지은 ‘백구시白鷗詩’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그걸 이 자리에서 피로하겠다.
자재사향득의유自在沙鄕得意遊
설상수각독청추雪翔瘦脚獨淸秋
소소한우래시몽蕭蕭寒雨來時夢
왕왕어인거후구往往漁人去後邱
허다수석비생면許多水石非生面
열기풍상이백두閱幾風霜已白頭
음탁수번무과분飮啄雖煩無過分
강호어족막심수江湖魚族莫深愁(‘스스로 하얀 밭에 놀매 그 뜻이 한가롭고/ 흰 날개, 가는 다리는 홀로이 청추(淸秋)롭다/ 소소한 찬비 내릴 때면 꿈속에 잠기고/ 고기잡이 돌아간 후면 언덕에 오른다/ 허다한 수석은 처음 보는 것이 아닌데/ 얼마나 풍상을 겪었던가/ 머리는 이미 희게 되었도다/ 비록 번거로이 마시고 쪼으나 분수를 알지니/ 강호의 물고기들이여, 깊이 근심치 말지어다.’)
이것을 어찌 13세 소년의 시라고 하겠는가? 백구를 읊어 의중意中을 나타내니 탄복할 지경이다.
이러한 대재大才, 이러한 대기大器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니, 나라의 불운이고 우리 조선인 전체의 불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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