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어느 학자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했다.
  "조선을 개혁하려는 핵核과 같은 것이 동학에 있었다. 그런데 혁신파인 김옥균은 동학에 관심을 표명한 흔적이 없다. 결국 그는 사대부士大夫여서, 동학이 가진 서민적인 것은 생리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을 기사회생시키기 위해서라면, 김옥균은 이홍장을 만나러 갈 것이 아니라, 동학의 지도자를 만나러 갔어야 했다."

— 항쟁! 그밖에 도리가 없다.

결코 과격파의 선동이 아니었다. 자기의 체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낀 일에 대한 반발이었다. 관官이 하는 짓은 날을 좇아 심해만 갔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다. 죽어도 그만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된 사람이 많아지게 되었다.

이미 들먹인 민란은 결코 동학교도들이 직접 일으킨 게 아니었다. 다만, 직소장을 낼 때 장두로 뽑힌 사람이 동학교도였을 뿐이다. 그러니 그들은 동학교도로서 직소한 것이 아니다. 주민의 대표로 뽑혔을 뿐이다.

허다한 예로서, 장두가 되기만 하면 체포되어 곤장을 맞게 되었다. 누구나 그 역할을 싫어했다. 싫어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동학교도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동학교도는 일반 사람보다 많은 탄압을 받았다. 그래도 그 신념을 버리지 않았으니 강한 성격이다. 동학에 마음을 둔다는 것은, 그만큼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된다. 동학교도는 신앙심만이 아니라 높은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백성들에 의해 뽑힌 이상 책임을 다하려고 했다. 자연히 민란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민란이 군 단위였던 것은 불평의 원인이 각각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뿌리는 하나이다. 이것을 발견한 것도 동학교도이다. 동학교도로서의 자각이 익어갔다. 그렇게 하여 동학란이 터지고 말았다.

동학이 성공하지 못할 까닭을 설명했다. 동학이 성공하려면, 그 세勢가 요원의 불길처럼 영남, 호서, 관동 등 각처로 퍼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점이 첫째 이유였고, 조정이 청국에 출병을 요청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일본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란 점이 둘째 이유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유림儒林이 동학을 이단시異端視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학의 씨가 뿌려진 것이 수십 년 되는데, 아직도 광범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은, 그것이 이단시되었기 때문이다. 고균(김옥균)은 위로부터 혁명하여 아래 민심의 지지를 얻지 못해 실패했고, 동학은 아래로부터 혁명하여 상층부의 지지를 얻지 못해 실패한다.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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