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은 당신의 습관을 노린다 - 습관은 자아를 지배하고 운명을 결정한다
김병태 지음 / 브니엘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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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결국 인생은 습관의 모음집이다."

저자의 이 말이 가슴팍에 꽂힌다. 책의 글은 너무나도 간단 명료하다. 하지만 책의 내용이 정말 심오하다.

그저 수박 겉할기 식으로 이해하자면, 참으로 가볍기만한 책이 될 것 같다. 기존의 자기 계발서에서 읽을 수 있는 문장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곰곰히 생각해본다면, 한 문장 한 문장들이 정말 무겁게 다가오게 된다.

 

우리네 인생들이 그저 왔다가 그저 가는 인생이 아니라고 여길 줄 안다면, 지금이라도 우리는 돌이켜 보아야 하고, 점검해야만 한다. 저자가 직시하고 있는 그 면을 함께 바라보아야 하고, 저자의 도움을 우리는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네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이 책을 접하는 순간부터라도 '변화'와 '개혁'을 향한 박차를 가해야만 한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둘 중 하나겠지. 그저 그냥 내버려두라는 식의 자포자기나, 아니면 어쩔 수 없다는 습관에의 순응.

 

비그리스도인들에게도 분명히 설득력이 있는 글일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네 힘으로만 되지 않는, 깰 수 없는 습관들에 있어서는, 신앙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전도서의 역할도 할 수 있지 않을까란 희망적인 생각도 해보게 된다. 책 제목에 '사탄'이란 말이 있어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조금 혐오감을 제공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였지만, 습관이란 성격을 생각해보면 십분 이해하고도 남을 일이다. 단지 안타까운 것은 그런 사탄을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피력을 하였으면 좋았겠단 생각이든다.

 

아뭏튼 이 책을 주님을 믿고 이제 성화의 여정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우리를 견인해 가시는 성령님이시다. 성령의 인도함에 새 옷이 맞지 않는 것 같더라도, 저자의 권면처럼 '반복'해보자. 그러면 익숙해질 것이고, 그러면 이전에 내가 아닌,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느 순간 멋지게 서 있을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니깐 말이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직접 읽고 제가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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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껏 알지 못했던 기독교 역사 - 세계사에 숨어 있는 흥미로운 기독교 이야기
유재덕 지음 / 브니엘출판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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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만큼 보게 된다."

 

지나간 역사에 대해서, 그 당시를 직접 살아보지 않은 우리로서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그 안목을 갖추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게 한 원인이 되기 때문에 그저 간과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이야기해야만 한다. '역사의 중요성'에 대해서 여기에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만, '역사에 대한 해석'을 이용하여 지금의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를 펼치고자 하는 사람들로 인해, 주목되어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은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

 

저자는 우리에게, 특별히 대부분의 독자가 그리스도인 것을 생각했을텐데, 기독교 역사에 대한 지혜로운 안목을 갖추는데 도움을 주고자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챕터마다 저자는 나름대로 그 챕터의 주제에 따른 객관적인 자료들을 찾으려 애썼고, 그 내용들을 채우기 위한 노력을 한 것을, 참고자료를 보면 느낄 수 있다. 그러한 저자의 노력으로 인해 이 책을 접하는 독자인 우리는 손쉽게 지식(아는 것)을 쌓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아는 만큼 다시 한번 우리가 알고 있었던, 혹은 모르고 있었던 역사에 대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사실은 저자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다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의심'이 쌓여간 것이다. 의심이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저자가 독자들이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들춰냄으로써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된 눈이 생겼듯이, 저자가 제시한 자료들이 진짜 사실일까 하는 의심이다. 왜냐하면 처음 말했듯이 우리는 그 역사를 직접 체험한 사람이 아닐 뿐더러, (또한 덧붙여서 말하자면, 그 역사를 직접 체험하는 그 순간에 있었던 자였을지라도, 그가 취한 위치와 환경, 지위, 사상 등에 의해서 역사는 주관적으로 충분히 왜곡되어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접하게 되는 역사는 '전해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간접적인 것이며, 충분히 전하는 사람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심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닐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의심이 좀 더 깊은 연구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 대한 지혜로운 안목을 갖추는 데 필요한 것은, 아마도 고집을 내려놓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든다. 무조건 내가 아는 것이 사실일 수는 없다. 역사는 지금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친다. 획일적으로 어떤 하나만을 위해서, 어떤 이론이나 어떤 사람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그 시대와 그 상황과 그 문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미래도 예측하게 하는 안목도 갖추게 한다. 그러므로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는 해 보고, 지금에 필요한,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절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아서, 알맞는 것들을 배워야 한다.

 

방대한 주제들을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내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으리라 생각이 된다. 그러한 힘든 일을 우리가 너무 손쉽게 받고 있어서, 저자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역사는 현재에 있는 우리에게 미래를 보게 하는 스승이라고 했던가? 이 책이 어떤 이들에게는 더욱 배우게 하는 좋은 스승이 될 수 있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제가 직접 읽고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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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쉽게 배우는 쉬운 기도 - 초신자와 기도 초보자를 위한 쉬운 기도 여행
이대희 지음 / 브니엘출판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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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 참 많이 기도를 해왔다. 꼭 기도의 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루에 꼭 하게 되는 식사기도와 같은 종류의 기도들을 해 온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어떨 땐 형식적으로도 했었다. 하지만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하지만 기도를 하면 할 수록 기도가 어려워 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왜 그럴까?'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단순히 진심으로 하기만 하면 되는 양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접하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기도는 배워야 한다. 그런데 기도를 배운다는 것이 생소하다. 어떻게 배운다는 것인가? 나의 기도를 생각해보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주변의 기도하는 분들의 기도를 많이 듣고 자랐다. 그러다보니 저절로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그들과 같은 기도를 하게 되었다. 기도가 참으로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보다, 일단 '기도를 하는 것'을 익힘으로 인해서, 정작 기도의 참 의미를 잘 모르고 기도를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흔히 말하는 모양을 따라 말하자면, 기도가 깊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막혔었고 답답했던 점이 뚫리는 듯한 시원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기도가 하고 싶어졌다. 특히나 기도의 정확한 목적에 대한 언급("우리가 기도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하는 것이다...(중략)... 사탄은 가능한 우리로 하여금 기도의 목적을 하나님보다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향하도록 뱡향을 바꾸려고 한다.)은 기도를 왜 하고, 어떻게 하고, 또한 그저 말로만이 아닌 생활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력이 생기도록 도와주었다.

 

저자는 특별히 계속해서 기도를 하게 되는 원동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한다. 말씀의 홍수와 같은 이 세대 가운데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직접 읽는 것이 어려워진 이 시대에, 기도가 바르지 못하고 기도가 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참된 기도로 이끌어준다. 이런 저자의 말을 들으면서, 과거에 개인적으로 기도가 정말 뜨거웠던 때가 생각이 났다. 그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음을 상기할 수 있었다.

 

기도는 훈련이 필요하다. 분명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저자는 이를 위해서 여러 가지 '기도문'을 제시해 놓았는데, 이것은 어떤 제목으로 기도할 때, 만약 기도가 잘 되지 않을 때는 특히, 기도를 더욱 풍성해주는데 정말 도움을 준다. 기도문의 기도를 곱씹어 볼수록 그 상황과 형편에 따른 기도의 참 의미가 살아난다.

 

이 책은 초신자과 기도 초보자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기존의 신자들에게도 꼭 한 번 읽어보도록 권하고 싶다. 기도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므로,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므로 말이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가 제공한 책을 제가 직접 읽고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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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교사여, 절대 포기하지 마라 - 교사의 꿈과 열정이 아이들을, 주일학교를 살린다
최윤식.최현식 지음 / 브니엘출판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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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현재 한국교회의 다음 세대가 무너져 가고 있는 그 현장의 문제점을 정말 예리하게 파헤치며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각 교회들은 이러한 비판의 내용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각 교회들의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교회교육의 현실은 정말 암담하기 그지 없다. 이것은 그저 말이나 분위기, 어떤 소문들이 아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교회교육의 결과가 어떤지 통계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우려는 절대적으로 기우가 아니다. 그러므로 저자는 간절하다. 지금 이대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적으로 처해진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교사들'에게 매달리고자 한다. 교사가 살아야 다음세대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교육에 있어서 교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정말 크기 때문이다. 누군가 정말 좋은 교사를 만난다면, 그는 변화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이 또 다른 한계 설정이 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교사들'의 영향력을 너무 과대 평가한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다음 세대들이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 사람 중 주일학교 교사는 과연 몇 위쯤 될까? 저자도 이것을 생각하기에, 교사들이 다음 세대들과의 관계를 보다 깊이 맺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 관계 맺음이 예전과 지금이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이다. 아이들과 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어렵다.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것 때문에, 이 책을 썼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있다. 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오늘날 아이들과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이유로 여과없이 받아들이는 소비자 중심의 흥미유발 프로그램들이 교회교육에서 진짜 강화해야 할 부분을 오히려 약화시킨 면이 없지 않나를 유의해야 한다.

 

교사가 먼저 은혜를 누려야 하는 것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동의한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다 뒤로 가면서 점점 느낀 점은, 교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도 되지 않는 것을, 그저 교사가 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해서, 결국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도 들었다. 정말 준비되지 않은 교사가 이 책을 읽었다면 그 느낌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본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제가 직접 읽고 작성한 글입니다.]

 

---부가적으로 p.115쪽 하반부에 쓴 글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좀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우려가 든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최고의 긍휼은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 말에 동의 한다. 하지만 그 다음 말이 의문이 생긴다.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지 않고서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으셨다고 말한다. 정말 그렇까? 물론 좁은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다." 예수님이 구원자로 오시는 것이 좁은 의미인가? 저자는 곧 이어서 정말 위험한 발언을 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우리를 구원할 다른 방법을 찾으실 수 있는 분이다."

 

저자는 말한다. "만약 그것밖에 구원의 길이 없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저자에게 묻고 싶다. 저자가 고백하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이 방법외에 다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게 더 모순이 아닌가? 성육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이다. 다른 방법, 다른 길은 없다. 이것은 결코 좁은 의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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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 연습 (국내 최초 완역본) - 로렌스 형제의 시대를 뛰어넘는 불후의 명작
로렌스 형제 지음, 임종원 옮김 / 브니엘출판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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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은 감히 주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만한 자격이 없다고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허락하시는 선물이었다.'

 

이 책의 '프롤로그'는 책의 서평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중요한 의미를 닮고 있는 부분을 읽게 되었을 때, '어~! 이 부분 읽었던 것 같은데...'라는 느낌이 들면 어김없이 그것은 프롤로그의 한 구절이었다. 이 책의 서평으로 프롤로그를 강력히 추천하고 더 이상 글을 쓰고 싶지 않아진다. 그러나 맡은 바 책임과 의무가 있기에 써내려가야겠다.

 

로렌스 형제는 어느 순간 자신을 결코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에 관해 숭고한 깨달음을 얻는다. 이 순간이 바로 '회심'의 순간이었다. 세상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그 만물을 통하여 그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지만, 실제로 로렌스형제와 같은 회심의 고백은 처음 접해보았다. 대부분의 회심은 '말씀'을 통하여서가 아니었던가? 혹은 아무도 고칠 수 없는 아픔이나 병, 혹은 완전 실패하여 바닥 쳤을 때 일어나게 됨, 혹은 기적같은 체험들을 통해서가 아니었던가? 그가 어떻게 이런 회심의 순간을 만나게 되었는지 더욱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오늘날 그런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진다.

 

로렌스는 이 깨달음 후에 그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부지런히 '연습'을('훈련'이라고 해야하나?) 거듭해서 누구보다도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경지에 다다랐다. 그의 하나님의 임재 연습의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부분은 '기도'였다. 아니 짤막한 탄식이라고 해야 하나? 예를 들어. '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는 전적으로 당신 소유입니다. 오 주님, 당신 마음에 합당하신 대로 저에게 행하소서!' 같은 것들이다. 짧지만 진정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부분이 아닐까? 로렌스 형제는 분명 순수했고 진지했고 신실했을 것 같다.

 

로렌스 형제의 조언 중 다음과 같은 말도 마음에 든다. '어떤 일을 하는 도중에라도, 할 수 있는 한 자주 하나님을 떠올리도록 하세요.'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루에 얼마만큼이나 주님을 떠올리는지 돌아보게 된다. 밥먹을 때만 습관적으로 부르게 되는 것은 아닌지? 정작 중요한 일에서는 세상적인 논리나 기준을 의지하고,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함이나, 급하고 꼭 이뤄져야 하는 기적이 필요할 때만 주님을 떠올리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말이다. 로렌스 형제는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든지간에 하나님을 떠올리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았다.

 

그의 가장 즐기는 일상적인 습관은 단순히 하나님께 모든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며,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두루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는 강력하게 말한다. "주님과 함께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두려워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습관과 달리 나의 습관은 어느 틈엔가 나를 이 땅에 속한 것들로 끌고 간다. 이에 대한 로렌스형제의 처방은 "우리 허물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늘 경험하며, 하나님과 친해지고 싶다면, 하나님을 아주 자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로렌스의 말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자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로렌스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을 포기하였으며, 이 세상에 오직 하나님과 자신만 존재하는 것처럼 살아가기 시작한다.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름이나 이야기가 나올 법한데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페이지 124쪽에서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아니던가? 죄인인 우리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임재하신다는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없이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로렌스형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거나 언급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예수님이란 단어보다 하나님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한 것 뿐일 수도 있다.

 

로렌스 형제는 다음과 같이 마지막으로 말한다.

 "형제들이여! 나머지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사랑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향한 모든 부르심과 의무를 아우르는 결정체입니다." 

로렌스형제는 이 세상에 속한 것들로부터는 어떤 조그만 즐거움도 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오직 피조물을 통해서는 창조주를 사랑할 뿐이었다. 로렌스형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자신 인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제가 직접 읽고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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