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트문 사계절 1318 문고 133
탁경은 지음 / 사계절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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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한 인간으로서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는 건 굉장히 행복한 일이에요.

민트문 77p.

성적이 급하강하는 순간에 언니는 부쩍 오르기 시작한다. 탁경은 작가의 단편소설집 <민트문> 중에 타이틀 소설인 '민트문'의 주인공 여학생의 이야기다. 자매를 키우며 같은 잣대로 바라보는 부모의 말 한마디는 때로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녀에게는 비수와도 같다. 주인공은 그런 상처를 가진 소녀다. 부모의 시선으로부터도 비교당하고, 애정 없이 기계적인 잔소리만 듣는 소녀가 도망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일기장, 아이돌 가수의 노래, 그리고 팬픽이었다.

스타를 좋아하는 팬들의 일반적인 열광의 모습이 아닌 팬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며 물리적 거리보다 팬픽 속에서의 내적 친밀감을 쌓아가는 것이 소녀에겐 가장 좋아하는 일이 되었다. 게다가 소녀의 팬픽은 인기도 많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가 꼭 읽어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그의 마음에도 닿았을까?

어느 날 꿈 속에서 소녀는 민트색으로 염색한 그 가수, 오빠를 마주한다. '블루베리 머핀'이란 팬픽 아이디를 알고 있고, 이미 소녀의 팬픽도 다 읽었다는 오빠의 말에 소녀는 행복해한다. 그러나 정작 오빠는 늘 행복하지만은 않다. 무대에서 늘 인사말로 전하는 '팬들 덕분에 행복하다'라는 말이 사실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우울감을 가진 가수였다.

꿈에서 깨어나고 소녀는 팬픽을 마무리했다. 이번 팬픽은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슬픈 러브 스토리. 시작은 발랄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오빠와 주인공은 함께 죽는다. 그리고 소녀는 생각한다. 사랑하는 오빠와 여주인공이 같은 순간에 함께 죽는 건 비극이 아닌 축복이라고.

바로 그 팬픽을 올린 이후 수많은 독자로부터 질타를 받는다. 게다가 소녀의 팬픽 모델이었던 그 오빠의 소속사에서 조문 일정을 띄운다. 거짓말 같은 진실 앞에서 외톨이가 되어버린 소녀. 오빠의 장례식에 조문을 다녀온 후 마음이 복잡해진 소녀. 사람들은 소녀가 쓴 팬픽대로 그 가수도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메시지 알람이 오는 데도 확인하기가 두려울 정도로 소녀는 비난 받을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후드득 눈물이 떨어진다.

민트문이다. 오빠가 잘 도착했다고, 더는 울지 말라고 속삭이는 것 같아.

민트문 95p.

현실 속에서의 아픔과 상처를 견디도록 도와준 건 가수 오빠를 사랑하는 일이었던 소녀. 마음을 둘 곳이 없던 집, 한 명의 친구 외에는 밥 먹을 사람이 없던 학교와 같이 마음의 방황을 겪게 하는 곳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껏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빠질 수 있도록 도와준 아이돌 스타에 대한 사랑은 자칫 십대의 무모한 극성팬 심리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십대의 마음이 닿을 수 있는 곳이 아이돌 스타에 대한 사랑이고 그것이 순수하게 팬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모습이라면 그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 어른들의 시선이 조금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었다.

사실 민트문은 신비롭다. 꿈에서 본 가수의 민트색 염색이란 표현 외에 어느 곳에서도 추측하기 힘든 존재다. 그런 존재가 문자까지 보낸다. 그래서 여러 번 다시 읽어보며 작가가 말하려는 민트문이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민트색으로 염색한 가수 오빠의 존재는 소녀에게는 그 자체로서 완벽하고 완전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내면에 가진 오빠의 우울감을 사실 팬으로서는 다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어둔 밤 조용히 떠올라서 조용히 우리 곁을 비춰주는 달은 소녀의 삶에 희망이자 위로였던 민트색 머리의 오빠를 상징하는 것 같다. 그렇게나마 마음 둘 곳이 없는 십대 소녀의 마음을 토닥토닥 위로해주는 달, 민트문이 아닐까?

이 책은 이 작품과 같이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저 경험하는 그 자체가 아니라 십대 청소년들이 마주하는 현실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걸어나가는 당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어른으로서 참 미안한 마음이 드는 작품들이었다.

▶아빠와 단둘이 살아가는 여중생이 첫 생리를 시작하며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서 혼자 정보를 찾고 대처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인간의 생리적 현상의 의미와 소중함을 어른보다 더 분명히 깨달은 모습을 담은 '지금은 생리 중'이란 소설 역시 여전히 입 밖에 내기 부끄럽거나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생리'에 대한 편견을 깨고 진지하게 마주할 용기를 갖게 한다.

▶승리와는 거리가 멀고 잘 하는 것 하나 없다고 여기는 남학생이 삐딱한 심정으로 부모의 말 한마디에 반항하는 모습을 담은 '이번 생은 망했어'에서도 손가락에 난 애꿎은 사마귀로 성질을 부리거나 악한 생각을 자꾸 하게 되지만, 결국은 나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사마귀를 불끈 쥔 주먹 안에서 가두어둠으로써 자신을 극복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아래에서 숨죽이며 의무적으로 저녁 식사를 함께 해야 하는 가족의 모습을 담은 '모기'에서도 아들만 선호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그런 아버지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아들 그리고 무시당하는 두 딸들과 어머니의 모습이 나온다. 유독 모기에 약한 아들을 신경쓰며 식사 중에도 모기 잡기에 주의를 돌리고, 심지어 아버지가 싫어할 만한 말을 선언하려고 하는 남동생을 저지하기 위해 애써 모기로 주의를 돌리는 누나들의 모습은 독자들마저 조마조마한 마음을 갖게 한다. 굳이 부딪혀서 좋을 게 뭐가 있을까 하는 심정으로 부모지만 부모 같지 않은 존재 앞에서 살아내기 위한 연대가 안쓰럽고 또 안타까운 작품이다.

▶술에 취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로 인해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고통받는 청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동욱'에서도 부모 자격이 전혀 없는 아버지 아래에서 어쩔 수 없이 삐딱한 삶을 살아내는 동욱의 모습이 마음 아프다. 왜 어른들은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걸까.. 왜 어른들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위험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걸까? 아이들 앞에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작품이다.

이렇듯 이번 단편소설집은 일상적이면 안되는 아픔을 가진 청소년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모습이 담겨 있기에 그런 모습을 응원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어른의 일원으로서 미안함이 자꾸 생기는 작품들이다. '작가의 말'에 이런 말이 나온다.

지금 힘겨운 시간을 버티고 있는 이들에게 꼭 말해 주고 싶다. 버티다 보면 좋은 날이 온다고, 시간은 생각보다 힘이 세고 많은 일을 해결해 준다고, 도망치는 인생보다 기쁨과 슬픔을 빼곡히 느끼는 인생이 훨씬 멋지다고.

<민트문>의 '작가의 말' 중에서

세상에 많은 청소년들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른들 때문에, 부모 때문에 빚어진 고통이라 단언한다. 잘못 자란 부모가 왜곡된 생각으로 자녀를 키우고, 잘못 키운 자녀가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을 괴롭히고, 잘못된 사회 인식이 청소년들을 문제아로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순환된 결과 위험 무쌍한 청소년 범죄자도 양산되고 있다. 이런 사회 속에서 그나마 이 작품 속 청소년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살아내려고, 버텨내려고 노력한다. 그런 모습을 우리가 감지할 줄 알길 바란다. 또 그런 모습을 우리 청소년들이 체감하고 잘못된 어른들의 사회 속에서 같은 길을 가지 않도록 마음을 바로잡길 간절히 바란다.


진짜 한 인간으로서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는 건 굉장히 행복한 일이에요. - P77

지금 힘겨운 시간을 버티고 있는 이들에게 꼭 말해 주고 싶다. 버티다 보면 좋은 날이 온다고, 시간은 생각보다 힘이 세고 많은 일을 해결해 준다고, 도망치는 인생보다 기쁨과 슬픔을 빼곡히 느끼는 인생이 훨씬 멋지다고.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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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한국사 - 나의 관점에서 시작하는 역사 공부 사계절 1318 교양문고
심용환 지음 / 사계절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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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한국사'... 문득 옛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에게 한국사, '국사'교과는 언제나 학창시절에 열심히 암기하고 시험보며 공부하면 되는 과목으로 기억한다. 또 선생님께서 알려주시는 걸 잘 외우면 되는 과목이어서 그저 암기력의 대결이다 싶었던 과목이었다. 특히 스토리텔링의 형태로 칠판 상단에 가로줄을 좌악 긋고 연도를 써가며 재미난 역사 에피소드를 들려주시던 선생님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나름 참 매력을 많이 느낀 과목이었고, 특히 사극 '명성황후'를 보면서 한때는 역사교사를 꿈꿔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이 책을 읽으며 돌이켜보니 나에게 남은 건 한국사에 대한 엄청난 암기테스트의 경험과 어떻게 하면 사람 이름과 업적을 외울지, 장소나 조약을 기억해낼 건지 고민만 하던 내 모습이었다. 많은 역사선생님을 만났지만, 기억에 남는 분은 단 한 분이셨고, 역사적 사실들이 지금에 와서는 단편적으로만 몇개 생각날 뿐 흐릿해지곤 한다. 어느 정도 이상의 관심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당면한 삶에 바빠서 말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러하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역사적인 부분은 언론을 통해서만 접하다 보면 심각한 오류에 빠지기 쉽다. 그저 한 번 스쳐 지나간 보도자료인데 그것이 뇌리에 박혀서 마치 언론에 담긴 내용이 참이고, 내가 기존에 알던 역사적 지식은 거짓인가? 하는 문제다. 심용환 작가는 바로 이 지점을 잘 짚어준다. 평소 누구한테 말을 꺼내기도 좀 애매모호했던 역사 이슈도 평행 저울의 중심에 앉아서 양쪽을 같은 무게로 잘 조절해주는 어투가' 참 편안해진다.

'그동안 내가 알던 것이 이런 사연이 있었구나!'

 

유독 역사라서 영화나 드라마화 될 때 역사왜곡이니 하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곤 하는 모습들도 있는데, 그런 분위기도 속에서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관련 작품들을 바라보고 생각해야 할지 찬찬히 생각해보게 하는 힘을 가진 책이다. 작가는 역사 소재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소모적인 논쟁을 계속하는 현실을 우려하고 있다. 영화를 사실이 차원이 아니라 영감의 차원으로 이해하고, 또한 영화가 말하는 메시지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관람객의 인문학적인 소양이 필수적이라는 거죠.(109p.)

 

"왜곡이란 단어를 사용하려면 의도성이 있어야 하고 의도한 결과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 콘텐츠는 나쁜 의도를 가지고 구성되기보다는 흥미를 위해 이야기를 고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왜곡이라기보다는 오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110p.)"

 

작가의 말처럼 관람객의 분명한 인문학적 소양이 뒷받침된다면 소모적인 사실논쟁에서 벗어나서 의미논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텐데 말이죠.

 

그렇다면 작가가 제시한 사실논쟁과 의미논쟁의 예시를 살펴볼까요?

 

사실논쟁 : 드라마 <허준>의 주인공 허준이 시신을 해부하고 위암환자를 고치는 장면

동양 의학에서는 시신을 해부하지 않고, 위암은 지금도 한의학으로 고칠 수 없으므로 사실이 아님

 

의미논쟁 : 영화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청나라 군대가 밀려올 때의 상황 - 최명길과 김상헌이 사태 해결을 위한 방법을 두고 격돌하는 주화론 vs. 주전론

감독은 주화파와 주전파 중 어느 한쪽이 옳다고 보여주지 않고, 양쪽의 진정성을 균형있게 표현하려고 노력함. 과연 정답은 꼭 균형 잡혀 있어야 할까? 라는 의미논쟁 시작 가능!

 

이렇게 작가는 우리가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넘길 수도 있는 상황이나 의미 등을 하나씩 짚어줍니다. 몇년 전 논란이 되었던 '건국절'에 대해서도 말이죠. 뉴스나 언론의 댓글만 보고 우리의 입장을 정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자세인가 반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자기 주도적으로 역사를 공부해보고 싶은 동기를 유발하는 책'이자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역사지식이 아닌 편견을 깨고 관점을 달리해서 역사를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곡이란 단어를 사용하려면 의도성이 있어야 하고 의도한 결과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 콘텐츠는 나쁜 의도를 가지고 구성되기보다는 흥미를 위해 이야기를 고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왜곡이라기보다는 오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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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리아 : 내일의 바람 사계절 1318 문고 120
이토 미쿠 지음, 고향옥 옮김, 시시도 기요타카 사진 / 사계절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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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동일본대지진 후 24년, 다시 닥쳐 온 재앙의 물결 앞에

살아남기 위해, 살려 내기 위해 몸부림친 사람들의 치열한 생존 기록

(216p.) 지진이 일어나기 전, 나는 석 달 동안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살았다. 방에 틀어박힌 채 모든 것을 차단했다. 마음이 편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나 스스로 내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억누를 수가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언젠가, 어쩌면 다음 순간에 저질러 버리지 않을까 싶었다.

두려웠다. 두려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사람을 상대하지 않으면 누군가를 상처 줄 일도 나 자신이 상처 입을 일고 없다. 상처를 주는 것도 상처를 받는 것도 두려웠다.

책의 후반에 중학교 2학년 이치야의 마음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으로 마음의 문까지 닫아버린 이치야. 순수한 아이의 마음에 깃든 상처는 이렇듯 모든 걸 차단하게 만든다.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자기 보호본능이자 타인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마음임을 알기에 책에서 이치야를 대하기엔 마음이 참 아팠다.

"엄마 연어 주먹밥이 제일 좋아!" _ 7p.

그런 이치야를 묵묵히 옆에서 지켜보고 달래보기도 하고, 때로는 으름장도 놓아보지만 그래도 이치야가 제일 좋아하는 연어 주먹밥을 문 앞에 놔두며 "꼭 먹어~" 라던 엄마 '시호'

이치야가 태어나기도 전에 남편을 잃고, 홀로 아이를 키우는 시호에겐 든든한 친오빠 '겐스케'가 있다.

이치야에겐 아빠같은 존재인 겐스케가 있었기에 시호도 이치야도 안정된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2 이치야는 그런 겐스케조차도 점점 피하기 시작한다. 전형적인 사춘기 청소년을 둔 가정의 모습이랄까.. 분명 마음은 아닌데 거리두기가 시작된 부모와 자녀의 관계..

그날은 담임교사와 상담을 위해 직장에서 일찍 조퇴하고 시호는 집에 있었다. 어떻게든 아이를 돌보고, 과제만으로도 3학년으로 진급이 가능하다는 담임교사와 상담하며 아들 이치야를 돕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었다.

점심을 같이 먹고 싶었지만, 거부하는 아들을 더이상 달래지 못해 문 앞에 주먹받을 두고 내려온 시호. 담임과의 면담에 가기 위해 준비하던 순간이었다.

덜컹덜컹, 콰르르르릉...

지진이었다. 모든 것이 깨지고 가라앉고 무너지고.

이치야는 순간 엄마가 걱정되서 깨진 가구들 사이로 계단을 내려왔다.

콩콩콩...

엄마?

콩콩콩...

분명 엄마의 구조신호였다. 이치야의 힘만으론 도저히 치울 없는 더미 속에 분명 엄마가 있다. 그때였다. 한 남자가 나타났다. 엄마가 저 아래 있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바로 이어지는 쓰나미 경보에 결국 남자는 이치야만 데리고 대피한다.

"나 도망쳤어. 엄마를 두고 왔어. 내가 죽였어." - 180p.

이치야는 간신히 목숨을 구한 사람들과 한 건물에서 구조를 기다리다가 겨우 삼촌인 겐스케를 만난다. 그리고 목놓아 운다. 엄마의 구조 신호를 듣고도 그냥 왔다며.. 당시 자신을 구해준 그 남자, 가타기리를 원망하며...

"살려고 한 거야. 넌 살려고 했던 거라고!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 - 180~181p.

동생 시호의 생존여부가 희미해진 상황에서 마음이 아팠지만 겐스케는 조카라도 살아온 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구조를 기다리는 생존자들의 마음이 타 들어가는 것만큼, 생존자를 찾으려는 또 다른 생존자들의 마음도 같다. 부족한 식량을 아껴먹으며 구조를 기다리려는 의지가 어느 순간 개인의 욕망에 사로잡혀 타인을 생각치 않고 모두 먹어버리는 사건도 생기고, 한편으론 더 어려움이 처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이 위험해지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도 보인다.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처절한 삶의 현장이다. 생존을 위한 저마다의 방식이었다.

엄마를 구하게 내버려두지 않은 가타기리 아저씨를 끊없이 원망했지만, 엄마를 잃고 자책하고 상처받은 것만으로 삶을 가만히 두지 않았던 이치야는 어느 새 성장해있었다. 어쩌면 방에 틀어박힌 채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모든 것과 단절하려 했던 그 때보다 훨씬 더 살아내려고 애쓰고 있는 이치야의 모습은 함께하는 이들에게도 힘찬 생명의 에너지를 주고 있었다.

"..... 고맙습니다."

구해 줘서, 고맙습니다.

알고 있었어요. 진작에. 그때 아저씨가 데리고 나오지 않았으면 나는 죽었을 거라는 거. 엄마가 그것을 바랄 리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았어요. 아저씨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나 자신을 불쌍히 여김으로써 나는 엄마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거예요.

나는 약하고 비겁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이치야는 얼굴을 들고 가타기리를 보았다.

"살아갈게요. 저도, 여기서, 지금부터." - 220~221p.

얼마 전 4.16 추모 문화제가 있었다. 세월호 탑승 피해자들 중에는 생존자도 있고, 희생자도 있다. 그 긴 세월동안 생존자들은 어쩌면 이치야와 같은 마음의 아픔을 갖고 살아오지 않았을까? 그리고 여전히 그 아픔이 계속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왜 나는 살아있고, 그들은 희생되었을까.. 눈 앞에서 사라져 간 이들이 뇌리에 박혀서 어쩌면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건 겪어보지 않은 이는 절대 알 수 없는 아픔이다. 그러기에 그만 잊으라는 말은 얼마나 무례한 말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치야가 그 아픔의 과정을 딛고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한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재난과 사고의 생존자들이 살아내겠다는 힘을 얻도록 경험하지 못한 우리들은 묵묵히 응원하고, 지지해주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다만 나는 살아있다. 그래서 살아가야 한다. 똑바로, 다리에 힘을 꽉 주고, 여기서, 바로 지금부터!'

"엄마를 두고 왔어. 내가 죽였어."
"아냐! 이 바보야, 그게 아니잖아! 살려고 한거야. 넌 살려고 했던 거라고." - P180

"..... 고맙습니다."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 P220

"살아갈게요. 저도. 여기서, 지금부터."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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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만나다 사계절 1318 문고 132
이경주 지음 / 사계절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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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만나다> 이 책. 표지가 참 마음에 든다. 고등학교 도서관의 한쪽 벽을 채우고 싶은 디자인이다. 게다가 거기서 '우리'를 만날 수 있다는 메시지도 작품의 내용과 꼭 연결짓지 않더라도 자꾸 눈길이 간다.
     
출판사를 통해서 이 책의 소개글을 처음 접했을 때는 '삶을 읽는 도서관'이란 소재에서 매트 헤이그의 <미드나잇 라이브러리>가 떠올랐다. 그러나 '도서관'의 공간적 의미에서는 유사할 수 있으나 스토리의 전개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서 이경주 작가만의 매력이 살아있다!
     
도서관은 인류에 대한 모든 기록을 담은 곳이다.  그런 도서관이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우리의 삶을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도록 돕는 곳으로 설정된 것이 신비로우면서도 아주 적합한 설정이란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목차를 보면 도서관, 동호, 제로가 계속 반복된다. 도서관에서 시작된 소설 속에는 두 아이 - 소년과 소녀가 등장한다. 그리고 교차되며 각자의 이야기가 펼쳐지다가 도서관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조금은 신경쓰고 읽어야 한다. 두 아이의 삶은 마치 연작소설처럼 연결되어 있지만 또 각자의 스토리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도서관이었다.- 7p. 첫 문장
     
모든 기억을 잃은 채 도서관에 도착한 소년과 소녀. 그들이 도서관에서 발견하는 책마다 제목도 글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지만, 그들을 보지 못한다. 이상함을 느낀 두 아이들. 도대체 왜,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알 수 없는 두 아이에게 도서관 사서는 두 권의 책을 나눠주며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나갈 방법을 빨리 찾고 싶다면 책을 읽어라. -16p. 사서의 말_각색
     
소년이 든 책은 '동호'라는 아이가 '강이수'란 친구를 알게 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소녀가 든 책은 닉네임 '제로'라는 아이가 닉네임 '벤쿠버'란 친구를 알게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왕 읽게 된 거 두 아이들은 먼저 읽기를 중단하면 지는 거라며 내기를 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 책 말이야... 이 책 뭔가 이상해. - 19p. 소년의 말
     
첫 장에는 2004가 적혀 있고, 두 번째 장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두 아이는 서로의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오로지 자기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 
잃어버린 기억의 실마리일까? 두 아이는 이상하게 친숙한 책 속 이야기에 빠져들어가기 시작한다. 동호는 자신과 다른 성향의 이수와 친해지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우정과 다른 방향으로 다가오는 이수를 외면하게 되고, 제로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벤쿠버를 시기한 나머지 잘못된 선택을 하며 친구를 위기에 빠뜨리는 일이 발생한다. 
     
그렇다. 이 아이들이 읽는 책은 바로 자신의 삶이 담긴 책이었다. 145페이지가 넘어가도록 아이들은 자신의 책을 읽으며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나가기 시작한다. 마침내 이야기가 끝나고,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지워졌던 모든 기억이 되살아난 두 아이들. 
     
어쩌면 우리 삶에도 다시는 꺼내고 싶지 않아서 꼭꼭 숨겨두고 있는 것이 분명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스스로 망각기법을 활용해서 기억 저 너머로 던져버린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기억이라도 회피하기 위해 도망친다면 우리는 죽음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까?
     
우리 각자의 삶이 담긴 책으로 기억을 간직하는 도서관에선 우리가 외면하고자 했던 자신의 삶 바로 앞에 진실되게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너희들은 지금 삶과 죽음의 중간에 있다. 둘은 죽은 자도 산 자도 아니다. 너희가 여기에 온 이유는 책을 읽었으니 알겠지. 다시 돌아갈지, 이곳에 머물지는 너희 마음에 달려 있다. 
- 148p. 사서의 말
     
그리고 한번 더 기회를 준다. 이제 너희의 삶을 제대로 마주했으니, 정말 죽을지 아니면 다시 너희의 삶에 들어가서 살아낼지 선택하게 한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할 것인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며 현실로 돌아갈 용기를 가질 것인지, 그냥 삶을 포기하고 이제는 다 기억해버린 고통스러운 과거를 평생 짊어지고 죽을 것인지 말이다. 
     
이 작품이 따뜻하고 훈훈한 건 바로 이 아이들이, 청소년들이 어쩌면 현실 즉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힘들 수도 있는 상황에서 용기를 낸다는 거다. 소년과 소녀는 함께 있어줘서 고맙다며 서로를 어느 덧 의지하고 격려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내가 만나는 우리 아이들도 저마다의 삶이 있고, 그 안에서 겪는 아픔 그리고 남에게 주는 상처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제대로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갖는 건 어른인 나도 힘들 때가 많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만난 아이들을 통해 조금은 용기를 갖게 된다. 나로 인해 힘들었을 사람을 떠올려보고, 진심으로 다가가서 사과할 수 있는 용기를 말이다. 
     

OO아, 그땐 정말 미안했어. 너의 진심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속단했던 날 용서해주겠니..? 나의 기억 속에서 가장 순수하고 따스했던 너를 그날 이후 한 번도 잊지 못했어.. 미안하다 정말.. 날 찾아온 그날 그렇게 냉정하게 돌아서버린 것도 미안하고 모든 건 너로 인한 결과라고 판단한 후 한 번도 너의 해명을 들어보려 하지 않았던 것도 미안하다..  몇년 전 우연히 알게 된 너의 소식이 그저 감사할 뿐이야.. 잘 지내고 있어서 고맙고, 감사해!  다시는 만나거나 연락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만, 이 책을 읽으며 이렇게나마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언제 어디서든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도할께! - 나의 기억 속에 늘 아린 상처로 남은 그 아이를 위한 사과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도서관이었다 - P7

이 책 말이야... 이 책 뭔가 이상해. - 19p. 소년의 말 - P19

너희들은 지금 삶과 죽음의 중간에 있다. 둘은 죽은 자도 산 자도 아니다. 너희가 여기에 온 이유는 책을 읽었으니 알겠지. 다시 돌아갈지, 이곳에 머물지는 너희 마음에 달려 있다.

- 148p. 사서의 말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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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4-09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arissakim 2022-08-01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감사합니다!!!
 
우리를 만나다 사계절 1318 문고 132
이경주 지음 / 사계절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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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마주할 용기, 따스하고 진솔한 사과 - 진정한 성장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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